담마의 거울

내가 사람을 호칭할 때 "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24. 08:02

내가 사람을 호칭할 때 "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시각은 새벽 4 47, 딱 적당한 시간이다. 3시대면 이르고 5시대면 너무 늦다. 4시대 정도가 되어야 내시간이라 볼 수 있다.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몸살 기운이 있다. 노인이 다 된 것 같다. 노인은 오늘 건강하다가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타이레놀 하나를 먹고 잤다. 그러나 잠의 질이 좋지 않다.

몸과 마음이 몹시 무겁다. 몸과 마음이 찌뿌둥한 것이다. 누워 있어도 힘들고 앉아 있어도 힘들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몸과 마음의 상태를 바꾸어야 한다. 한마디로 기분전환을 해야 하는 것이다.

기분전환하는데 있어서 행선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좁은 방을 왔다 갔다 보면 비틀거린다. 이럴 때는 암송해야 한다. 경을 암송하면 확실히 효과가 있다는 것을 여러차례 해 보아서 알 수 있다.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암송 효과는 즉각적이다. 비틀거리던 걸음걸이는 바로 잡힌다. 발의 움직임에 마음이 따라간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 온 것은 아니다. 더 집중을 해야 한다. 이렇게 스마트폰 자판을 치는 것도 집중의 효과가 있다.

오늘 새벽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를 읽었다. 디가니까야 12번경 '로힛짜의 경'을 다 읽었다. 경의 내용은 '질책 받을만한 세 종류의 스승'에 대한 것이다.

가르친다고 하여 모두 스승이 될 수 있을까? 교단이나 강단에 선다고 하여 모두 스승이 될 수 없다. 단지 아는 것을 전달하는 지식소매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자식을 잘못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K교수는 남아시아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느 유튜브 채널에서 자이나교와 불교의 차이에 대해서 1프로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같은 종교라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잘못 전달한 것이다.

K
교수는 자신의 분야에서 권위자이다. 그러나 타분야에서도 권위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분야가 아닌 영역에서 단정적으로 말했을 때 신뢰가 무너진다. 그가 불교에 대해서 강연을 했을 때 "그는 니까야를 다 보았을까?"라고 의문하게 된다. 검색해서 필요한 정보만 수집해서 말했을 때 그는 더 이상 피에이치도 아니고 프로페셔널도 아니다. 그의 불교에 대한 강연은 볼 것도 없다.

권위로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 한번 면허증을 따면 평생 먹고 살듯이, 한번 학위를 받고 한번 교수를 하면 평생 박사라 불리우고 평생 교수라고 불리우는 것 같다. 그가 설령 타분야에 대해서 말을 해도 그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해당분야 사람이 보았을 때는 아마추어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사람을 호칭할 때 "선생"이라고 부른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사람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는 것은 타당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아무리 많이 배웠고, 그가 해당분야에서 피에이치디이고, 그가 해당분야에서 프로페셔널일지라도 선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사람을 호칭할 때 선생으로 통일한다.

누구나 선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스승이 될 수는 없다. 스승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당분야의 전문가라고 해서 스승으로 불러야 할까? 나를 정신적인 향상으로 이끌지 못한다면 스승이라 할 수 없다. 나 보다 먼저 배운 것을 알려 주는 세속적 지식에 대한 것이라면 선생이라는 호칭이 적합할 듯 하다.

나에게 스승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있을까? 몇 명 되지 않는다. 면허증과 같은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스승이 될 수 없다.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을 스승이라 할만하다. 이 세상에 부처님같은 스승이 어디 있을까?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마땅히 존경할만한 스승이 없으면 가르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를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어떤 외도의 스승도 부술 수 없는 부처님의 연기적 가르침을 말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니까야만한 스승이 없다.

 


머리맡에는 늘 니까야가 있다. 모든 니까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겠다고 서원했다. 머리맡에 놓고서 틈만 나면 열어 본다. 하루 한페이지도 좋다. 습관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매일 꾸준히 읽다 보면 어느 때 다 읽게 될 것이다.

디가니까야 로히짯의 경을 보면 세상에 비난 받을만한 세 종류의 스승이 있다. 그 중에 한 스승이 있다. 그는 수행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이전의 속박을 버리고 새로운 속박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D12)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심오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을 니까야를 통해 접한다. 이런 이야기를 예전에 들어 보지 못했다. 경전을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알리지 않기로 생각했다. 그는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
세상의 수행들이나 성직자들이 착하고 건전한 것을 얻을 수 있더라도, 착하고 건전한 것을 얻은 뒤에 타자에게 알려서는 안된다. 타자가 타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전의 속박을 끊고 다른 새로운 속박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그것은 악한 탐욕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타자가 타자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D12)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견이다. 경에서는 악한 생각이라고 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 결여 되었기 때문에 열악한 생각이 된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나서 홀로 조용히 열반에 들고자 했다. 그러나 사함빠띠의 간청에 따라 법을 설하기로 했다. 세상 사람들을 불쌍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보아서 그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45년 동안 길에서 길을 알려 주었다.

어떤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었다. 과연 그 깨달음은 바른 것일까? 자신이 깨달은 것이 바른 것임을 증명하려면 타인에게 적용해 보면 알 것이다. 마치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법을 설한 것처럼 자신의 깨달음을 검증해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타자에게 알려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연각승은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법을 설할 수 없다. 체험으로만 알고 있을 뿐 교학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것이 바른 깨달음인지 알려면 타인에게 적용해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타자가 타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전의 속박을 끊고 다른 새로운 속박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그것은 악한 탐욕의 원리라고 생각한다."(D12)라는 견해를 가졌다면 그의 깨달음은 바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자는 알리기를 꺼려 할 것이다. 이때 그는 "타자가 타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D12)라며 의문한다. 이에 대해서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
타자로서 교시되는 자가 그 타자인 교시자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획득한 착하고 건전한 것은 스스로 존경하고 존중하고, 나중에는 버려야 하는 것이다."(Smv.395)


이 주석을 보면 뗏목의 비유를 연상케 한다. 저 언덕으로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타자에게 자신의 뗏목을 지게 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경을 보면 세 종류의 질책 받을만한 스승이 있다. 그 중에서도 깨달음을 얻은 자가 타인을 교화 했을 때 타인이 전혀 교화되지 않는 케이스가 있다. 이에 대해서 이전의 속박을 버리고 새로운 속박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깨달음이 바르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육사외도와 같은 가르침이 이에 해당된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정등정각이라고 한다. 지극히 원만하고 바른 깨달음임을 말한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세 종류의 질책할 만한 스승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계, , 혜 삼학으로 가르침을 설한다.

, , 혜 삼학에 기반하지 않는 가르침은 바른 가르침이라고 볼 수 없다. 어떤 수행자가 열심히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타인을 교화시킬 수 없을 때 바른 깨달음이라고 볼 수 없다. 가르친다고 하여 모두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갖가지 도인이 있다. 그 중에는 은둔형도 있다. 무언가 깨달았는데 자신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타인에게 알려 줄 마음이 없다. 설령 소문을 듣고 찾아 와도 알려 주지 않는다. 저 언덕으로 건너 갔음에도 타인에게 알려 주는 것에 대해서 속박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계, , 혜 삼학에 기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른 깨달음이 아니다.

세상에 선생은 많다. 모든 선생이 다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강단에 섰다고 해서 다 스승이 될 수 없다. 그가 그 분야에 대해서 권위자라고 할지라도 타분야에서는 초짜에 불과 하다. , , 혜 삼학을 갖춘 자는 스승으로 삼을만 하다.

스마트폰으로 글쓰기 하다 보니 6 31분이 되었다. 찌뿌둥하던 몸과 마음도 상태가 바뀌었다. 무엇이든지 집중하면 바뀌는 것 같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2022-11-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