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산냐(相)의 척파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26. 08:58

산냐(相)의 척파에 대하여

 


여전히 의문이 있다. 불교에 대해서 아는 사람, 불교를 밥벌이로 하는 사람들은 니까야를 왜 읽지 않는 것일까에 대한 것이다. 왜 이런 의심을 하는가?

부처님 원음이라 불리우는 니까야는 완역되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의 경우 쿳따까니까야 서너권만 번역하면 5부 니까야 번역은 모두 끝난다. 그런데 KPTS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한 니까야를 사보는 사람은 일년에 2백명가량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부니까야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디가니까야를 말한다. 이들 니까야의 초판이든 개정판이든 한번 출간하면 천부가 세상에 나온다. 그런데 천부가 소진되는데는 5년 걸린다고 한다. 일년에 2백권 판매되는 것이다. 한국불자들은 지독히도 경전 사보는 것에 인색함을 알 수 있다.

머리맡에 디가니까야가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틈만 나면 열어 본다. 한꺼번에 많이 보지 않는다. 고작 일이페이지 본다. 심오한 부처님 말씀을 소설 읽듯이 넘어갈 수 없다. 한번 읽고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기고자 한다. 형광메모리칠을 해가며 읽는 이유가 된다.

책을 읽을 때는 독후기를 쓸 것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 경전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구절 한구절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오래오래 기억해 두고자 한다. 그래서 인상깊은 구절에 대해서 이를 근거로 글을 남긴다.

디가니까야에 9번경 '뽓따빠다의 경'이 있다. 부처님이 외도 유행자 뽓따빠다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화를 보면 매우 심오하다. 그것은 내가 체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험한 자라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선정이나 열반 체험같은 것이다.

부처님은 친절하다. 체험이 없는 자에게 언어로써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 놓았다. 부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연기법을 홀로 깨친 연각승이라면 가능하지 않다.

연각승은 교리나 교학에 대한 지식이 없다. 그래서 대중교화를 할 수 없다. 홀로 깨달은 자로 조용히 살다가 열반에 든다.

니까야에는 놀라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나를 부정하는 듯한 가르침도 있다.

명상을 하다보면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이를 참나라고 오해하기 쉽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뽓따빠다여, 지각이 먼저 생겨나고 다음에 앎이 생겨납니다. 지각이 생겨난 뒤에 앎이 생겨납니다. '이것을 조건으로 나에게 앎이 생겨났다.'라고 이와 같이 분명히 압니다."(D9.46)

 


여기서 앎은 냐나(ñāna)를 말한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빠알리어 냐나는 궁극적 지혜를 뜻한다고 했다. 경전에서 말하는 궁극적 지혜는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를 뜻하는 지견과 갖가지 신통으로 나타난다.

선정에 들었을 때 아는 마음만 있게 되었을 때 이를 참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참나를 말한 적이 없다. 있다면 조건발생적 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조건으로 나에게 앎이 생겨났다."(D9.46)라고 분명히 알라고 했다.

니까야를 읽다 보면 대승경전의 모티브가 되는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뽓따빠다의 경에서 금강경의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라는 식의 문구를 발견했다. 명칭 붙여진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거친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에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의 획득이라고 불리지 않게 되고, 물질을 여읜 자아의 획득이라고 불리지 않게 됩니다. 그때에는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고만 불립니다."(D9.74)

참으로 심오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매우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다. 갖가지 비유를 들었다. 이런 점은 금강경에서 축약된 문구를 보는 것과 대조적이다.

경을 보면 세 가지 자아가 있다. 거친 자아,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아, 물질을 여읜 자아를 말한다. 각각 욕계, 색계, 무색계의 자아를 말한다. 이런 자아는 있을까?

외도 유행자 뽓따빠다는 단정적으로 말한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외도들의 특징이다. 그러나 연기법에 따르면 일부만 아는 것이 된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진리가 아닌 것이다.

이처럼 부분적 진리만 아는 것을 비확정 원리라고 하고, 전체를 아는 것을 확정적 원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계는 영원하다.'는 등의 견해에 대해서 비확정 원리라고 말했다. 그리고서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로 시작되는 확정적 원리를 설했다.

자아는 있는 것일까? 외도들은 지금 여기서 지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각은 조건발생적이다. 그럼에도 욕계의 자아, 색계의 자아, 무색계의 자아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은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 외도 뽓따빠다의 잘못된 견해를 알려 주었다. 그 중에 우유의 비유가 있다.

우유는 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유제품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소에서 나온 것을 우유라고 한다. 우유가 요구르트가 되고, 요구르트는 생버터가, 생버터에서 버터가, 버터에서 버터크림이 생겨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유가 생겨났다면, 그 때에 요구르트라 불리지 않고, 생버터라 불리지 않고, 버터라 불리지 않고, 버터크림이라 불리지 않고, 우유라고만 불립니다."(D9.75)

이는 명칭에 대한 것이다. 조건에 따라 달리 불리는 이름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욕계의 존재라면, 색계나 무색계의 자아의 획득이라 불리지 않고 오로지 욕계의 자아의 획득이라고만 불릴 것이라고 했다.

경을 읽어 보면 부처님이 강조하는 이야기는 후반에 있다.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찟따여,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여래가 집착없이 설하는 세간의 명칭이며, 세간의 언사이며, 세간의 언표이며, 세간의 시설입니다."(D9.76)

부처님은 욕계의 거친 자아에 대하여 욕계의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라고 지각되는 자아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만 명칭으로만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세간의 명칭이며, 세간의 언사이며, 세간의 언표이며, 세간의 시설"(D9.76)이라고 했다.

금강경에서는 상을 내지 말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스님은 산냐(saññā: 相)를 척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금강경에서는 "반야바라밀 즉비바라밀 시명바라밀"이라는 식의 표현이 무수하게 등장한다. 이는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라는 공식에 해당된다.

금강경은 심오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상세한 설명이나 비유가 없어서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수많은 금강경 해설서가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니까야에서는 진리를 언어로써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체험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는 풍부한 비유를 들었다. 친절한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자비를 느낀다.

니까야에서도 상을 척파한다. 자아라는 것도 단지 이름이나 명칭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부처님이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 종류 자아를 말씀하셨지만 이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관용어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최상의 의미, 즉 승의에서 생겨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공한 것이고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두 가지로 논한다. 세속적 논의와 승의적 논의가 있다. 세속적 논의의 주제는 뭇삶(중생), 인간, 신, 하느님과 같은 것이고, 승의적 논의의 주제는 무상, 괴로움, 실체없음, 존재의 다발, 세계, 감역, 새김의 토대 등과 같은 것이다. 세존께서는 최초에 세속적 논의를 하고 그 다음에 승의의 논의를 한다."(Smv.382)

부처님은 세간에서 세간의 언어로  진리를 설했다.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말로 진리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진리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무상, 고, 무아와 같은 것을 주제로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름이나 명칭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금강경에서도 강조하는 것이다.

니까야는 금강경보다 먼저 성립되었다. 금강경 찬술자가 산냐(相)의 척파에 대하여 강조했다면 아마도 "뽓따빠다의 경을 모티브로 삼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해 본다.

불자들은 좀처럼 니까야를 보지 않는 것 같다. 이는 스님들이라고 해서 다른 것 같지 않다. 시중에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해설서는 넘쳐나지만 니까야 해설서는 보기 힘들다. 한국불교가 아무리 선종계통이라고 하지만 이제 눈을  돌릴 때도 되었다고 본다.

니까야는 대부분 번역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볼수 있다. 절에 불사하듯이 니까야불사를 하면 방대한 니까야를 갖추게 될 것이다. 니까야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2022-11-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