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타인을 감동케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타인을 감동케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그 사람에 대한 자애의 마음이 생겼다. 여기서 자애는 사랑의 마음이라기 보다는 우정의 마음이다.
사랑의 종교가 있고 자애의 종교가 있다. 유일신교에서는 사랑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자애를 말한다. 어떻게 다른 것일까?
신의 사랑은 일방적 사랑이기 쉽다. 신의 피조물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이 대표적이다. 피조물 또한 신에 대해서 조건 없는 사랑을 한다.
유일신교의 사랑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연상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들끼리 사랑이기 쉽다. 신을 믿지 않는 자는 내리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불교에서도 사랑을 얘기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 대신 자애라는 말을 선호한다. 이는 초기경전, 즉 니까야에서 자애를 뜻하는 멧따(metta)가 수도 없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멧따는 무슨 뜻일까? 어원적으로 따지면 우정의 뜻이 된다. 친구나 도반을 뜻하는 빠알리어를 미따(mitta)라고 하는데 우정을 뜻하는 멧따와 어원이 같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우정의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은 우정이다. 우정 하면 친구가 떠오른다. 어려울 때나 즐거울 때나 항상 함께 하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애정 관계로 맺어진 사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불교에서도 사랑이라는 말이 쓰이긴 쓰인다. 사랑을 뜻하는 빠알리어 삐야(piya)가 그것이다. 그러나 니까야에서 발견되는 삐야라는 말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주로 남녀간의 관계, 부부관의 관계에서 삐야라는 말이 사용된다.
무엇이든지 단정적으로 말하면 오류가 되기 쉽다. 마치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교는 우정의 종교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왜 그런가? 니까야에서 수도 없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수행승이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방향을 가득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방향을 가득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방향을 가득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방향을 가득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채웁니다.”(D13.80)
디가니까야 '세 가지 베다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이는 자애에 대한 정형구이다. 니까야 도처에서 자주 발견된다.
부처님은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했다. 이를 동, 서, 남, 북, 사방뿐만 아니라 상, 하로도 내고 각 방향의 사이에도 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방, 팔방이 아니라 시방(十方)으로 빈틈없이 촘촘히 내라는 것이다.
“바쎗타여,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지어진 행위는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바쎗타여, 힘쎈 나팔수가 사방에 어려움 없이 소리를 알리듯,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지어진 행위는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바쎗타여, 이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입니다.”(D13.80)
부처님이 바라문 바쎗타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바라문들은 그들의 유일신이자 창조주인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타락한 바라문들은 불의 제사나 희생제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 가고자 했다. 또한 베다 성전을 암송해서 가고자 했다. 이에 부처님은 실천을 강조했다.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빠알리어 브라흐마(Brahma)를 번역한 말이다. 한역으로는 ‘범천(梵天)’이라고 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브라흐마를 '하느님'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한역을 따라 '범천'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한역보다 우리말 번역이 더 나은 것 같다.
하느님이라는 말은 우리조상이 오래 전부터 써 오던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하늘의 신에 대한 숭배는 다 있다. 고대 인도에서도 하느님 숭배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브라흐마이다.
누구나 하느님 세계에 갈 수 있다. 그것은 사무량심을 닦으면 된다. 자애, 연민, 기쁨, 평정 수행을 하면 된다. 그래서 자애의 정형구에 단어만 바꾸면 된다. 이렇게 시방으로 네 가지를 가득 채웠을 때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게 된다. 이를 네 가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四梵住)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라기 보다는 자애의 하느님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새롭게 해석한 하느님은 누구나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님을 말한다.
누구나 자애수행을 하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 자애수행을 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하느님이 될 수 있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음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늘나라는 색계와 무색계 천상을 말한다.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로서 하느님은 색계 초선천에 해당된다. 수많은 천상중에서도 지위가 가장 낮은 천상이다.
불교에서는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다. 색계와 무색계 천상에서 살아도 아라한이 되지 못하면 삼계를 윤회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하느님도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미얀마 속담에 "빛나던 하느님(Brahma: 범천)도 돼지 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타인을 감동케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우정의 삶이다. 자애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자애를 닦으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모두 하늘나라에 태어 나는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크게 세 종류의 천상이 있다. 욕계, 색계, 무색계의 천상을 말한다. 보시하고 지계하는 삶을 살면 욕계천상에 태어난다. 색계나 무색계 천상에 태어나려면 선정수행을 해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자애수행이다.
자애수행을 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다. 보시하고 지계하는 것 보다 더 수승하다. 수행공덕으로 색계나 무색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힘쎈 나팔수가 사방에 어려움 없이 소리를 알리듯"(D13.81)자애의 마음을 닦으라고 했다.
소라고동이 있다. 소라고동을 불면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 나간다. 자애의 마음도 소라고동 불듯이 내라는 것이다. 이 우주 끝까지 자애의 마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자애수행을 하면 가능하다. 마치 소라고동을 부는 것과 같다.
자애는 모든 것을 녹여 버린다. 자애의 마음을 내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한계지어진 행위는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D13.81)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색계와 무색계와 관계된 선정이 성취되면, 감각적 쾌락의 영역에 관련된 행위가 선정을 지배하지 못하고 그 업보를 낳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오히려 색계와 무색계와 관련된 행위가 감각적 쾌락의 세계의 행위를 지배하여 그 결과를 낳는다. 감각적 쾌락의 세계의 행위의 결과를 차단하고, 그가 닦은 거룩한 삶이 그를 하느님 세계로 이끈다.”(Pps.III.450)
흔히 업장소명을 말한다. 업장소멸하려면 선정을 닦으라고 말한다. 선정수행을 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업장이 소멸됨을 말한다. 자애수행도 선정수행에 해당된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줄여서 ‘자심해탈(慈心解脫)’이라고 한다. 자심해탈하면 하느님 나라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랑이 있다. 남녀간의 사랑이 있고 친구와의 우정이 있다. 불교에서는 후자를 강조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랑의 하느님이라기 보다는 자애의 하느님이다. 누구든지 자애수행을 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고 하느님이 될 수 있다.
불교는 우정의 종교이다. 부처님이 자애를 뜻하는 멧따를 강조한 것은 친구와의 우정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친구를 뜻하는 말도 밋따이다.
우정은 어떻게 해야 형성될까? 그것은 감동을 주는 것이다. 도움을 주는 친구, 배움을 주는 친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늘 함께 하는 친구, 연민할 줄 아는 친구는 감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어제 김치담그기 행사에서 유병화 선생에게 액자를 전달했다. 니까야공부모임 회향에 대한 기념사진이다. 이런 소소한 행위도 감동이 될 것이다. 그제는 '1402 강리도'의 작가 김선흥 선생에게 류코쿠본 강리도를 족자로 만들어 선물했다. 이런 것도 감동을 줄 것이다.
살아 오면서 남을 감동시킨 적이 별로 없다. 남한테 폐 끼치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달라졌다. 특히 초기불교를 접하고 바뀌었다. 그것은 남을 감동시키는 삶이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면서 공감하는 것도 남을 감동시키는 삶일 것이다. 그 사람을 감동케 하는 삶도 우정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2022-11-2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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