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유년시절 순수의 시대로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6. 07:20

유년시절 순수의 시대로


행위에 따라 귀하거나 천하게 태어난다. 부처님 가르침이다. 맛지마니까야를 비롯하여 앙굿따라니까야 등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업에 따라 귀하거나 천하게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 핵심은 업(kamma)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에 의하면 과거 출현했었던 모든 부처님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업의 가르침을 정견이라고 한다. 업이 나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임을 말한다.

내가 여기에 있게 된 것은 이유가 있다. 과거에 지은 업으로 여기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업의 탓으로 돌리는 숙명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는 것처럼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는 것이다.

나는 과거생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누구인지 의문하다 보면 과거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질문에 대하여 번뇌만 야기할 뿐이라고 했다. 존재도 하지 않는 자아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라고 질문하지 말고 "어떻게"라고 물으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법적 사유를 하라는 것이다.

연기법적 사유를 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 과거는 물론 미래에 대한 해법도 제시할 수 있다. 이때 나는 오온으로서 내가 된다. 조건발생하는 나를 말한다. 자아이니 영혼이니 하는 말들이 통용되지 않는 나를 말한다. 연기적 흐름으로서의 내가 있는 것이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는 죽어서 이 다음에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업의 가르침을 믿는 불교인으로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아기부터 시작할 것이다. 유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 과정을 거칠 것이다. 인생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천하게 태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학대받으면서 자란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부처님은 단계적 설법을 했다. 이를 한역으로 차제설법이라고 한다. 그 첫번째는 시계생천(施戒生天)의 가르침이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욕계천상을 말한다. 못되도 인간으로 태어나는데 귀하게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

귀하게 태어난 자가 있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는 자가 이에 해당된다. 잘 배운 부모 밑에 태어난다면 유년시절, 소년시절, 청소년시절을 행복하게 보낼 것이다. 교육도 최상의 교육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미래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모두가 자신이 지은 행위의 결과라고 말한다면 동의할까?

천하게 태어난 자도 있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가 이에 해당된다. 부모의 불화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면 앞으로 인생은 험난한 것이다. 부모가 일찍 죽었을 때도 해당된다. 어렸을 때 누가 인도해주는 사람이 없었을 때 방황하는 삶이 되기 쉽다. 한평생 한숨과 괴로움으로 보내기 쉽다.

최악은 신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것이다. 평생 남에게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학대를 당하기도 한다. 앞날에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삶이다. 죽을 때까지 괴롭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한다. 누구나 가능성 있다. 과거에 어떤 행위를 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상의 태어남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만한 태어남은 없을 것이다. 훌륭한 가문에서 훌륭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이다. 어느 정도일까? 디가니까야 14번경 '비유의 큰 경'에 이런 내용이 있다.


"
태어난 왕자 비빳씬은 많은 사람의 귀여움을 받고 사랑을 받았다. 수행승들이여, 마치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이 많은 사람의 귀여움을 받고 사랑을 받듯, 왕자 비빳씬도 많은 사람의 귀여움을 받고 사랑을 받았다. 참으로 이 팔에서 저 팔로 안기며 사랑을 받았다."(D14.39)


과거칠불 중의 하나인 비빳씬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이 팔에서 저 팔로 안기며 사랑을 받았다."라는 말이 가장 와 닿는다. 아기가 사랑받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나은 표현이 어디 있을까? 고귀하게 태어난 자에 대한 최대의 찬사라고 본다.

나의 유년시절을 돌아 본다.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젓먹이 시절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 팔에서 저 팔로 안기며"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유년시절을 회상해 보건데 행복한 시절 같았다. 괴로움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이다. 세상이 온통 행복으로 가득 했었던 것 같다.

유행가 중에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라는 구절이 있다. 유년시절의 행복은 세상을 몰랐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풍요로운 기억이 떠올려지는 것은 그만큼 순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유행가에서처럼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던 어린시절"도 있었고, "아침햇살에 놀란 아이 눈"과 같은 시절도 있었다.

나의 유년시절은 순수의 시대였다. 어느 정도였을까? 세상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세상천지와 하나가 된 것 같은 충만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나 둘 깨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 가속화 되었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때 서울 달동네산동네 살 때였다. 그때 유년시절을 회상했다. 세상과 하나가 되던 충만한 때가 생각났다. 그때와 비교했을 때 내가 너무 타락해져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만 있을 뿐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마치 엎질러진 물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순수한 마음이 점차 오염되어 감을 느꼈다.

영화제목에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다. 다리가 끊어졌거나 불살라져 버렸을 때 돌아갈 수 없는 다리가 된다. 소년기 때 유년기 때를 회상했을 때 참으로 멀리 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청소년기가 되자 양상이 달라졌다. 변성기가 되자 유년기 때 충만함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도 유년기 때 충만함을 떠올린다. 순수의 시대를 말한다.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없을까? 마음은 잔뜩 오염되어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세상과 하나가 된 기억이 있다. 그래서 경전을 읽고, 경을 외우고, 외운 경을 암송하고,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요즘 머리맡에 디가니까야를 놓고 있다. 현재 14번경을 읽고 있다. 과거불 비빳씬 부처님의 유년시절에 대한 것이다. 청소년시절은 어땠을까?

왕자는 어느 날 성 밖으로 나갔다. 그때 왕자는 "허리가 서까래처럼 꺽여 구부러지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비틀거리며 걷는"(D14.44) 늙은 사람을 보았다. 왕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왕자는 "이보게 마부여, 이 분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그의 머리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고, 그의 몸도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D14.44)라고 물었다.

 


왕자는 세 개의 궁전에서 살았다. 그것도 젊은 무희들에 의해 둘러싸여 살았다. 늙음이 무엇인지 몰랐다. 늙은 사람을 봤을 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때 왕자는 "아아, 태어난 자에게 늙음이 시설된다니 참으로 태어남이라고 하는 것은 혐오스럽다."(D14.45)라고 말했다.

여기 형편없이 늙은 노인이 있다. 노인을 보았을 때 다들 피하려고 할 것이다. 어떤 이는 벌레 보듯 혐오할지 모른다. 어떤 노인은 자신의 추한 모습을 혐오할지 모른다. 그런데 왕자는 늙음을 혐오하기 보다 태어남을 혐오했다. 이런 태도는 질병에 걸린자, 죽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 그 자체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는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자는 노, , 사에 대해서 "참으로 태어남이라고 하는 것은 혐오스럽다."라고 말한 것이다. 부처가 될 사람은 일반사람과 달리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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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갖춘 자는 두 가지 운명 중의 하나를 갖게 되어 있다. 재가에 살면 전륜왕이 되는 것이고, 출가의 삶을 살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왕은 왕자를 재가에 있게 하고자 했다. 그래서 출가하지 못하도록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즐기게 했다."(D14.58)라고 했다.

부왕은 왕자를 오욕락에 묶어 놓고자 했다. 오욕락에 빠져 있다보면 노, , 사를 잊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오욕락으로 마취시키는 것과 같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이라고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대부분 오욕락에 마취되어 살아간다. 옆에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이 있음에도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각적 욕망의 나날을 보냈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괴로움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S12.2)이다.

왕자는 노, , 사에 대해서 태어남을 원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태어남을 혐오했다. 태어남으로 인하여 노, , 사가 있게 되는데 이를 괴로움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보통 괴로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절망적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절망적 괴로움에 대해서 "소까빠리데바둑카도마낫수빠야(sokaparidevadukkhadomanass
ūpāyāsā)"라고 한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의 괴로움을 말한다.

나는 불교를 종교로 하고 있다. 이 세상에 부처님 가르침만한 것이 없다. 만일 부처님 가르침보다 더 뛰어난 가르침이 있다면 그쪽으로 갈 것이다. 아직까지 부처님 가르침보다 탁월한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괴로움과 윤회를 끝내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반복한다는 것은 지겨운 일이다. 죽어서 재생하게 되었을 때 유년기 시절부터 반복해야 한다. 훌륭한 부모를 만나면 다행이지만 학대 받고 자랄 수도 있다. 이 다음에 무엇이 되어 태어날지도 알 수 없다. 최소한 성자의 흐름에 든다면 사악도는 면한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유년시절 순수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


2022-12-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