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칠불의 증명이 되어준 정거천
물건에도 수명이 있다. 계산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이상한 것이 디스플레이되는 것이었다. 계산기능에 이상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무언가 내부에서 고장이 난 듯하다. 액정가림막도 떨어져 나갔다. 계산기 수명이 다 되었음을 인지했다.
오늘 다이소에서 계산기를 하나 샀다. 사이즈가 큰 것으로 버튼도 크고 글자도 크다. 단순계산하기에 딱 맞다. 가격은 놀랍게도 5,000원이다. 부담없이 구매했다.
어떤 이는 애완견을 보냈을 때 비통한 심정을 말했다. 십년 이상 기르던 애완견이 떠났을 때 가족을 떠나 보낸 것처럼 슬펐다고 한다. 그렇다면 물건은 어떨까?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유정물과 무정물의 차이라고 본다.
계산기는 십년 이상 쓴 것 같다. 언제나 매번 쓰던 것이다. 늘 책상 한켠에 있어서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물건이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했을 때 폐기처분된다. 아쉽기는 하지만 애완견 보내는 것처럼 슬프지는 않다.
형상만 추구 했을 때
여행을 가면 이것저것 기념품을 구입한다. 코끼리를 하나 샀다. 돌로 만든 것이다. 아누라다푸라에서 행상이 자꾸 달라 붙어서 사준 것이다. 그런데 관리를 잘 못했서 깨졌다. 구입한지 불과 사흘만이다. 허무하게 10불이 날아갔다. 반면에 BPS(Buddhist Publication Society)에서 산 책은 남았다.
어느 것이든지 형상으로 된 것은 허무하다. 마치 그릇이 언젠가 깨질 운명에 있듯이 물건도 망가지고 기능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책은 영원히 남는다. 잃어 버리지 않는 한 항상 함께 한다.
책도 물건이다. 경전을 사서 책장에 꼽아만 둔다면 기념품을 장식장에 두는 것과 같다. 그러나 책에는 내용이 있다. 이는 다름아닌 정신이다. 형상 플러스가 있는 것이다. 특히 경전이 그렇다.
이번 스리랑카 순례에서 경전을 샀다. 상윳따니까야, 자타카, 청정도론이다. 모두 영역본이다. 책 가격이 싸서 부담없이 샀다. 더 사려 했으나 책의 무게 때문에 가지고 다닐 수 없어서 세 권만 샀다. 사고 싶은 책은 해외주문 하려 한다.
사람들은 형상만 쫓는 경향이 있다. 명품을 좋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명품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은 충족될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 만족감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만 지나면 쳐다 보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책에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경전이라면 가르침이 있다.
머리맡에 경전이 있다. 니까야 읽는 것을 생활화하기 위해서 머리맡에 둔 것이다. 머리맡에 있다보니 열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열어보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소설이나 인문학 등 일반서적을 읽는 것과 다른 맛이다. 그것은 나의 인식의 지평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부처님이 출현한 이유는
어제 저녁에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 14번경 ‘비유의 큰 경(Mahāpadānasutta)’을 읽었다. 과거 칠불의 행적에 대한 것이다. 비빳씬 부처님의 행적 위주로 되어 있으나 과거에 출현 했던 부처님들의 행적은 모두 같다. 이는 깨달은 내용이 같음을 말한다.
현재 시대를 정법시대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정법시대는 세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한다. 부처님 원음이 전승되어 와야 하고, 팔정도 수행이 있어야 하고, 사향사과와 열반이 있어야 정법시대로 본다.
현재의 부처님 가르침만 정법은 아니다. 과거 출현했었던 부처님 가르침도 정법이다. 어느 부처님이 출현해도 연기법으로 깨달음을 얻고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한다. 제자들은 사향사과와 열반을 증득한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부처님이 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의 정법이 살아 있다면 새로운 부처가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늘에 두 태양이 없는 것과 같다. 어느 부처님이 출현해도 깨달은 내용은 똑같기 때문에 두 부처가 출현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가 출현할 때는 정법이 사라졌을 때이다. 어느 때에 부처가 출현하여 정법을 펼치지만 후대로 내려갈수록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린다. 다음 부처가 출현할 때까지는 정법이 없어서 암흑기가 된다.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 경을 보면 모두 일곱 분의 부처가 출현한 이야기를 싣고 있다. 가장 먼저 91겁 전에 비빳씬 부처님이 출현 했다. 다음에는 31겁 전에 씨킨 부처님이 출현했다. 공백은 60겁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60겁동안 정법이 사라진 것이다. 60겁이 지나고 나서 씨킨 부처님이 출현했다.
니까야에서는 과거칠불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주석서에서는 과거 25불 이야기를 한다. 디빵까라부처님(연등불)이 과거 25불의 시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았다. 이는 자타카에 잘 묘사되어 있다.
과거 부처님들의 한결 같은 가르침은
과거 부처님들이 깨달은 내용은 다 똑같다. 그렇다면 과거 부처님들의 한결 같은 가르침은 무엇일까?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참고 인내하는 것이 최상의 고행이다.
열반은 궁극이다. 깨달은 님은 말한다.
출가자는 남을 해치지 않는 님이고
수행자는 남을 괴롭히지 않는 님이다.”(Dhp.184, D14)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Dhp.183, D14)
“비방을 삼가고 해치지 않고
계행의 덕목을 지키고
식사에서 알맞은 분량을 알고
홀로 떨어져 앉거나 눕고
보다 높은 마음에 전념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의 가르침이다.”(Dhp.185, D14)
세 개의 게송 중에서 담마빠다 183번 게송이 잘 알려져 있다. 이를 칠불통계게라고 한다. 그러나 칠불통계게는 디가니까야에 따르면 세 개로 되어 있다.
니까야는 매우 방대하다 너무 방대하여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니까야를 읽어 보면 이 니까야에는 없지만 다른 니까야에 있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
“수행승들이여, 미래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
“수행승들이여, 현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
이 가르침은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막칼리 고쌀라의 도덕부정론을 비판한 것이다. 막칼리가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라고 주장한 것에 대하여, 과거에 출현했던 무수한 부처님도 업과 업의 과보의 가르침을 설했음을 말하고 있다.
부처님은 사성제와 같은 출세간적인 진리만 설한 것이 아니다. 번뇌로 인하여 윤회하는 중생에게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도 설했다. 이렇게 본다면 과거부처님들은 출세간의 진리로서 사성제를 설했고, 세간적 진리로서는 업자성정견을 설했음을 알 수 있다.
색계 정거천에 사는 천신들은
과거에 수많은 부처가 출현했다. 이는 정법이 오래 가지 못했음을 말한다. 정법이 사라지면 아득한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 부처가 출현한다. 이러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을 알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색계 정거천에 사는 천신들을 말한다.
색계 정거천은 누가 가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불환자가 된 자들이 가는 천상의 세계를 말한다. 그런데 정거천에 사는 존재들은 매우 오래산다는 것이다.
정거천에는 모두 다섯 천상이 있다. 수명이 가장 낮은 단계부터 차례로 나열하면 무번천, 무열천, 선현천, 선견천, 색구경천이 있다. 수명은 각각 1,000겁, 2,000겁, 4,000겁, 8,000겁, 16,000겁이다.
정거천에 사는 천신들은 1,000겁이상 16,000겁까지 산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주가 1,000번에서 16,000번 성주괴공할때까지 오래 사는 것을 말한다. 니까야에 따르면 우주가 생겨나서 소멸할 때까지 일겁으로 잡고 있다.
정거천의 천신들은 과거칠불이 출현 한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왜 그런가? 과거칠불이 출현했을 때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존재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주의 역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는 경에서 “세존이시여, 지금으로부터 구십일 겁 전에 세상에 존귀하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한 깨달은 님이신 비빳씬이 세상에 출현했습니다.”(D14)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정거천에는 얼마나 많은 천신이 살고 있을까? 경에 따르면 “수천 수십만의 신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들 신들은 우주의 전역사를 알고 있다. 그래서 부처가 출현한 것도 알고 있다.
정거천의 천신들은 부처님에게 과거 부처님에 대해서 말해 준다. 언제 어디서 어떤 부처가 출현했는지 알려 주는 것이다. 이는 오래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치 마을에서 촌로가 그 마을 사람들의 모든 것에 대하여 다 알고 있는 것과 같다.
정거천의 존재들은 과거칠불이 출현하기도 전에 있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시간을 알 수 없는 과거에 어떤 부처님이 출현했는데, 그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불환자가 되어서 정거천에 살게 된 것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가르침을 실천했을까? 비빳씬 부처님의 정법이 살아 있을 때 불환자가 된 천신들은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존이시여, 우리는 세상에 존귀하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한 깨달은 님이신 비빳씬 아래서 청정한 삶을 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탐욕을 여의고 여기에 태어났습니다.”(D14)
여기서 키워드는 ‘청정한 삶(brahmacariya)’과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탐욕(kāmesu kāmacchanda)의 여읨’이다. 이 두 가지를 실천하여 정거천에 태어난 것이다.
부처님은 일체지자이다. 숙명통으로 과거 전생을 볼 수 있고 타인의 과거 전생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과거출현 했던 부처님들에 대하여 숙명통으로도 보았지만 정거천 존재들이 증명해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청정한 삶을 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탐욕의 여읨을
니까야를 보면 놀라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그 크기는 우주적이다. 수명도 우주적이다. 이는 경전을 읽는 자의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과장되고 신화적인 내용일지라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수용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니까야는 책으로 되어 있다. 책은 하나의 형상이고 물질이다. 책장에 있으면 마치 기념품처럼 장식이 되기 쉽다. 그러나 책에는 내용이 있다. 마치 사람이 물질로 되어 있지만 정신으로 되어 있는 것과 같다. 니까야가 그렇다.
이번 스리랑카 순례에서 영역 경전을 산 것은 큰 수확이다. 여행가서 이것저것 기념품을 살 수 있지만 그때뿐이다. 그러나 한번 산 경전은 훌륭한 장식품이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 내용도 있어서 일거양득이다.
여행가서 기념품만 살 것이 아니라 책도 사야 한다. 그러나 사 놓고 읽지 않으면 기념품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 맡에 놓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청정한 삶을 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탐욕의 여읨을 실천하는 것이다.
2022-12-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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