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신이 자신을 의지처로 해야 하는 이유는?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26. 12:20

자신이 자신을 의지처로 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의지하고 가르침에 의지해라.” 이 말은 불자라면 누구나 아는 말이다. 흔히 자귀의법귀의라고 말한다. 혹은 자등명법등명이라고 말한다. 정확한 것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 D16)


이 가르침은 매우 유명하다. 상윳따니까야 칸다상윳따에도 실려있고,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도 실려 있다. 니까야 도처에 실려 있다는 것은 중요한 가르침임을 말한다. 여기서 자귀의 의미는 무엇일까? 법귀의는 알만하지만 자신을 의지처로 하라는 말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한국불자들은 자귀의, 즉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

블로그에 글을 쓰는 블로거이다. 글을 쓰면 페이스북에도 동시에 게재 한다. 나에게 있어서 글은 나의 삶의 전부와도 같다. 지식인들의 놀이터와 같은 페이스북에서도 진지한 글을 올린다.

블로그에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지난 2006년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쓰다시피 하고 있다. 요즘은 두 개도 좋고 세 개도 좋다.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자 한다. 영원히 남는 글을 쓰고자 한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는 경전의 문구를 곁들여 쓴다. 이른바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를 말한다. 왜 이렇게 하는가? 나의 이야기를 쓰면 개인적 견해가 되어 버린다. 사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을 근거로 하면 정견이 된다. 왜 그런가? 모든 판단 기준은 경전에 있기 때문이다.

며칠전에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에 대하여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훌륭한 스님이지만 모두 동의할 수는 없었다. 특히 스님의 윤회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과학적 유물론에 근거한 법문을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스님에게는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존경하는 스님이다. 스님의 명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스님에 대하여 악마의 낚시바늘을 문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저는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가겠습니다.”라고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분이 이의를 제기 했다. 스님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존경하는 스승이 비판 또는 비난 받았을 때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은 훌륭한 스님이다. 우리나라에 이런 스님만한 분은 찾아 보기 힘들다. 대부분 사람들이 존경한다. 안양에 행복투어 특강 왔었을 때 찾아가서 방청했다. 그리고 후기를 남겼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그 인간한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이해가 안되죠?" 법륜스님의 안양투어’ (2010-05-01, https://bolee591.tistory.com/16154604)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기록을 보니 지금으로부터 12년전의 글이다. 이밖에도 여러 편을 썼다.

스님에게도 헛점은 보인다. 그것은 스님의 윤회관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견주어 보았을 때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을 존경한다. 왜 그런가? 이는 “저는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가겠습니다.”라는 말 때문이다. 스님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더 중시하겠다는 것이다.

가르침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

스님의 윤회관은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스님이 아무리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이는 경전에 근거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경전에 근거해서 스님의 윤회관을 비판했다. 이럴 때 공통적으로 접하는 레파토리가 있다. 그것은 경전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후대에 편집되었기 때문에 부처님 원음이 아니라고 한다. 블로그에서 이런 댓글을 받았다.


내가 무식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윤회와 환생은 불교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 든 부분이다. 저 강아지가 당신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똥파리가 내 전생일 수도 있다는 것을 믿으란 말인가? 선업을 쌓으면 천신이 된다 하며 그 들의 수명이 수천 겁이라 하면 과연 짐작이나 되는가? 알다시피 일 겁은 우주가 한 번 생겨났다 사라지는 시간인데 우리의 두뇌로 현 우주가 언제 탄생했으며 언제 괴멸할지 상상이 가능한가? 즉 측정이 거의 불가능한 관념의 차원으로서의 천신의 수명이요 부처의 출현이다. 실감하지 못할 때 우리는 '믿음'으로 땡처리한다. 무조건 믿어서 해결하면 편할 것이다. 믿음천국 불신지옥하라는 거리의 전도사들을 경멸하는 불자들로서 니까야에 씌여 있다고 맹신해버리면 저 자살폭탄 특공대의 이슬람 전사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아직도 나의 숙제는 달라이 라마가 말씀하신 '왜 윤회가 이상한가? 그렇지 않다는 반증을 하나라도 나에게 제시하라'라는 그 것을 푸는데 있다.

결국 니까야도 누군가 인간의 기억력에 의해 구전되다 인간의 손으로 언어화된 것이다. 니까야에 적혀있으니 추호의 착오도 없으리라 믿는 것은 글쎄요...이다. 나는 부처까지 의심할 줄 알아야 진정한 깨달음과 해탈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추운 겨울날 빈 절에 들어간 어느 유행승이 목불을 뽀개서 불을 지펴 잤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관념의 노예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담마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여겨야 한다. 법륜스님도 그렇다. 나는 그 분과 하등의 인연이 없지만 그 분이 무슨 악업을 짓고 있다는 증좌를 보지 못했다. 남북통일운동, 인도의 빈민구제, 환경보호 어느 것 하나 발벗고 나서는 사림이 많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24시간이 모자라라고 뛰어다닌다. 자기수행과 점검을 뒤로 하고서라도 세상을 맑고 따뜻하게 하려는 보살정신이에 앞장선다고 본다. 산중에서 지겨운 나날을 지내는 겉모습 스님이나 조계종 따뜻한 요람에서 일생을 럭셔리하게 보내는 역시 무늬만 수행자에 비할 수 없는 훌륭한 분이라 생각한다.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진실이 따로 있는지?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상에 취착하지 않는지 누가 장담하랴?”(연하산인)


연하산인이라는 필명이 글을 주었다. 글을 보면 즉문즉설 스님이 말하는 것과 거의 일치한다. 큰 물줄기를 보면 결국 과학이다. 윤회가 과학적 증거가 있느냐는 것이다. 또한 경전을 맹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니까야도 누군가 인간의 기억력에 의해 구전되다 인간의 손으로 언어화된 것이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침을 비난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전되어 전승되어 온 가르침을 믿지 못하면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 즉문즉설 스님이 재해석한 교리를 믿어야 할까? 그래서인지 스님은 경전을 근거로 하는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불자들은 삼귀의함으써 불자가 된다. 오계를 받아서 불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해서 재가신자가 됩니다.”(S55.37)라는 가르침에 근거한다.

글을 쓸 때도 경전을 인용한다. 경전이야말로 최고 판단기준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도 강조한 것이다. 부처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비난 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없습니다.”(D1)라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뿐만이 아니다.

누군가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D1)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 가르침과 맞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 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D16.98)


불자들이 의지해야 할 것은 경전이다. 그래서 삼귀의 하는 것이다. 삼귀의 중에서도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라고 법귀의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겠다는 의미를 말한다. 그럼에도 가르침과 다른 말을 하는,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가르침과 동떨어지는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서 보고 있어야만 할까?

스님의 잘못된 윤회관을 지적하는 글도 있는데

며칠전에 즉문즉설 스님의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글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반면에 글에 동의하는 글도 있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법륜스님의 윤회관을 지적하는 것 같군요~

바른 지적 입니다!
저는 법륜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경주 불국사 포교당 법장사에서 최석호 법사로 활동 할 당시부터 알았으니 출가 이전부터 그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는 불교를 혼자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한 스님을 은사로 삼아 종단이라는 공식 틀을 벗어나 자칭 출가자가 된 인물입니다~

지금까지 그가 한국불교에서 이룬 업적과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해도, 그의 사상과 불교 교학에 대한 인식이 과연 부처님이 설한 정법에 부합하는가 하는 의문은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특히 그의 윤회에 대한 인식은 불교를 근본부터 부정한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듯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법륜스님의 잘못된 인식과 왜곡된 불교인식을 종단적이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연꽃님의 지적은
그래서 더욱 의미있고
시의적절한 지적이 아닐 누 없습니다!”(愛雨)



애우라는 필명을 지닌 분이 올린 글이다. 애우님은 즉문즉설 스님의 잘못된 윤회관을 지적했다. 아마 스님의 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불편하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불자들이 많을 것이다. 스님이 비록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불교의 근본을 부정하는, 불교의 뿌리를 부정하는 발언에 대해서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회 때마다 삼귀의 하는 이유는?

불자라면 가르침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법회 때마다 삼귀의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만일 불자가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을 의심하면 어떻게 될까? 삼귀의 중에서 법귀의를 하지 않는 것이 된다. 삼보에 귀의 해야 불자라고 할 수 있는데 가르침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지 않는 자를 불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불교에는 부처님의 정법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삼귀의도 잘못되었다. 삼보중에 승보에 대한 것이 그렇다. 분명히 니까야에는 “상강사라낭 갓차미”라 하여 승가공동체에 귀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스님들께 귀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국불교에는 승보가 없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가르침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왜 그런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조사 스님 가르침은 믿어도 부처님 가르침은 믿지 않는 것 같다.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서 자신의 말만 하기 때문에 스님의 가르침을 믿으라는 것과 같다. 여기에 법보가 있을 수 없다.

한국불교에는 불보가 없는 것과 같다.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불보살을 신앙으로 한다. 한국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뒷방에나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한국불교에는 불보가 없다.

한국불교에는 삼보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삼보가 없기 때문에 불자도 없는 것이다.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부처님 말보다는 스님의 말을 더 믿는다. 부처님의 원음에 대하여 후대 편집된 것이라 하여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말하는 스님의 말을 더 믿는 것 같다. 즉문즉설 스님의 윤회관이 대표적이다.

삼보에 귀의해야 불자가 된다.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 그분이 누군인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일생부터 공부해야 할 것이다. 또한 부처님 그분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니까야를 읽어야 할 것이다.

니까야를 읽는 맛을 느낄 때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비난한다. 책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책의 내용을 비난한다.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니까야를 비난한다.

불자라면 항상 삼보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설령 스님의 말이 부처님 말처럼 들릴지라도 의지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 D16)라고 했다.

처음에는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에게 의지해 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귀의법귀의를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니까야를 읽다 보면 심오한 가르침에 인식의 한계를 느낀다. 나의 인식을 벗어난 심오한 가르침이 니까야에 있었던 것이다. 니까야를 비난하며 니까야를 읽지 않는 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자귀의에 대한 것도 그렇다. 이는 “왜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야 하는가?”(2022-10-24, https://bolee591.tistory.com/16161717)라는 이전에 포스팅한 글에서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자신을 의지처로 한다는 것은 니까야와 주석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이는 먼저 법구경에서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라는 게송을 알아야 한다. 이 게송은 자귀의에 대한 것이다.

처음에는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혜가 쌓이면 결국 자신에게 의지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라고 했다.

자신이 자신의 수호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놀랍게도 주석에서는 “윤회의 바다는 그 지지처인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그 바닥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래서 스스로 거룩한 경지(阿羅漢果)인 섬을 만들어야 한다."(DhpA.I.255)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 주석 문구를 보고서 인식의 지평의 넓어지는 것 같았다. 경전을 읽는 맛을 느낀다. 니까야를 멀리하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은 자신의 수호자가 되어야

자신은 자신이 수호해야 한다. 왜 그런가? 나의 안전은 남이 지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르침(담마)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에 의존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원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신을 수호하려면 가장 먼저 법귀의해야 한다. 이는 가르침을 의심없이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거나 자신의 깜냥으로 판단해서 의심한다면 자신을 수호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은 예류과, 즉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면 안심이다. 왜 그런가? 성자의 흐름에 들면 사악처에 떨어질 중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많이 잡아도 일곱 번 윤회하면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다.

자신은 자신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할 수 없다. 이는 부처님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의심했을 때

성자의 흐름에 드는 데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세 가지 족쇄를 풀어야 한다. 이는 유신견, 의심, 계금취를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족쇄를 푸는 것은 라따나경(Sn.2.1)에도 실려 있다.

라따나경을 보배경이라고 한다.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에 대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11년전에 빠알리원문으로 외운바 있다. 2007년 이후에는 이미우이의 라따나경 음악을 매일 듣고 있다. 그런데 라따나경은 테라와다불교의 예불문이자 수호경이라는 사실이다. 세 가지 족쇄와 관련하여 이런 게송이 있다.


Sahāvassa dassanasampadāya
Tayassu dhamm
ā jahitā bhavanti,
Sakkāyadiṭṭhi vicikicchitañca
Sīlabbata vāpi yadatthi kiñci,
Cat
ūhapāyehi ca vippamutto
Cha c
ābhihānāni abhabbo kātu
Idampi sa
g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개체가 있다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Stn.231)

게송에서 세 가지 족쇄는 개체가 있다는 견해(Sakkāyadiṭṭhi), 매사의 의심(vicikiccha), 규범과 금계에 집착(Sīlabbata)을 말한다. 이중에서 의심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에 대한 의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열반은 정말 있는 것일까?’ 라든가 ‘윤회는 정말 있는 것일까?’라는 등으로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의심하면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다. 부처님이 윤회에 대해서 니까야 도처에서 이야기했음에도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고, 가르침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 했을 때 성자의 흐름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자신도 수호되지 않는다.

자신이 자신을 의지처로 해야 하는 이유는?

부처님 가르침은 뗏목과도 같다. 저 언덕에 건너가기 위한 탈것이 되는 것이다. 이를 팔정도의 뗏목이라고 니까야에서는 말한다. 저 언덕, 저 섬에 가야 안온한 것이다. 그곳은 열반의 세계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먼저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했다.

삼귀의에서 법귀의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열반이라는 궁극을 맛 보아야 한다.

열반을 맛 본 수행자는 주욱 그길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자신이 자신을 의지처로 하여 가는 것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수행을 하난 것이다. 이렇게 성자의 흐름에 들면 자신이 자신을 수호하게 된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지혜로운 님은 거센 흐름에 난파되지 않는 섬을 만들어야 하리.”(Dhp25)라고 했다. 이는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 D16)라는 가르침과 일치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믿음을 갖추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알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창피함을 알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정진을 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지혜를 갖추는 한,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수행승에 대하여 이제 근심이 없다. 그 수행승은 자신의 수호자로서 더 이상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다.”(A5.7)


2022-12-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