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지금 이순간에 최후를 맞이한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4. 08:35

지금 이순간에 최후를 맞이한다면


머리맡에 읽고 있는 책이 있다. 그런 책중에 하나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다. 마하시사야도가 짓고 일창스님이 번역한 것이다. 미얀마어로 된 것을 우리말로 직접 번역한 책이다. 일창스님은 미얀마어가 유창하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수행지침서이긴 하지만 주석서로서의 성격도 있다. 니까야와 청정도론을 근거로 한다. 책의 구조를 보면 청정도론 주석서처럼 보인다. , , 혜 삼학으로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계청정에 이런 글이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건성으로 대하면서 계를 범하고 있는 그 순간에 갑자기 죽게 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악처에 떨어지기 때문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1, 149)


참으로 무시무시한 말이다. 이는 누구든지 계는 목숨처럼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말이다. 계에 대해서 "나중에 지키지, "라고 하면서 건성건성 살면 큰 일이 닥칠 수 있음을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자신은 천년만년 살 것이라는 착각을 말한다. 최소한 기대수명 때까지는 살 것이라는 착각도 한다. 그러나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 나의 안전을 보호해 주는 것은 자신 밖에 없다. 먼저 계행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계행을 청정하게 하면 사악도는 면할 수 있다.

요즘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작년 붓다데이 때 일창스님이 선물로 준 것이다. 1권과 2권 두 권으로 되어 있는 꽤 두툼한 책이다.

책을 선물 받았으면 읽어야 할 것이다. 책장 속에 진열만 해 놓을 수 없다. 그래서 머리맡에 놓았다. 그러나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빠알리어와 함께 대역이 되어 있어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천천히 읽는다. 하루 한두 페이지가 고작이다. 그럼에도 새길 것이 많다. 계가 청정하지 않으면 사악처에 떨어진다는 가르침도 이에 해당된다.

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윤회는 허구라고 말한다. 이는 아마도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전에는 저세상이 있는 것을 믿지 않아 낭패 당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디가니까야빠야씨의 경’(D23)이 바로 그것이다. 빠야시 왕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존자 깟싸빠여, 저는 이러한 이유로저 세상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삶의 뭇삶도 없고, 선행이나 악행도 없고, 업의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D22.7)

이 장면을 보면 오늘날 윤회를 부정하는 단멸론자를 보는 것 같다. 왕자는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직 죽어서 돌아온 자가 없기 때문에 저세상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죽기전에 말했다. 저세상에 가거든 꼭 돌아와서 저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사람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왕자는 저세상이 있는지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이는 허무주의적이고 단멸론적 견해이다.

이세상만 있고 저세상이 없다면 굳이 애써 힘들게 계를 지키며 공덕을 쌓을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다면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고 현자는 취한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인과를 부정하는 말과 같다. 과보를 부정했을 때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도 서슴지 않고 자행할 것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세상이 되었을 때 약육강식, 축생의 세상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저세상은 있다. 왜 그런가? 이유는 분명하다. 이세상이 있기 때문에 저세상이 있는 것이다. 이세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저세상도 없을 것이다. 저세상이 있는 것은 연기법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연기송이 있다. 이는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imasmi
sati ida hoti: 若有此卽有彼)”(M38)로 시작되는 연기송을 말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 것이 있는 것이다. 이세상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저세상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불교에서 저세상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깟싸빠존자가 빠야씨 왕자에게왕자여, 그대는 이러한 이유로저 세상도 있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있고, 선행이나 악행도 있고, 업의 과보도 존재한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D23.15)라고 말했다.

이세상이 있으면 저세상은 있기 마련이다. 좀더 양보해서 저세상이 있을 확률은 반이라고 하자. 이는 '있다'에 반이고, '없다'에 제로가 된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있다'고 여기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에 있는 말이다.

여기 윤회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가 있다. 어리석은 자는 '저세상은 없다'라고 본다. 그래서 막행막식을 한다. 반면 현명한 자는 부처님의 업과 업의 과보의 가르침을 알기 때문에 공덕행을 한다. 두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막행막식을 하다 죽은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저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M60)라고 했다. 부처님은 왜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질 것이라고 했을까?

그는 아직 죽어서 돌아온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는 저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저세상은 없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다. 되는대로 막행막식하며 산 것이다. 그런데 태어나보니 악처이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낭패일 것이다. 그래서 불운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어리석은 자는 살아서도 불운이고 죽어서도 불운이다. 왜 그런가? 그가 '저세상은 없다'라는 단멸론적 견해를 가졌을 때 도덕적으로 금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고 자행할 것이다. 그로 인해 비난 받으면 불운에 떨어지는 것이 된다. 살아서 불운에 떨어지는 것이다. 죽어서는 어떻게 될까? 저세상이 있다면 악처에 떨어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역시 불운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양쪽에서 다 불운을 겪는 것이다. 이는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을 믿지 않거나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명한 자는 어떠할까?

현명한 자에게는 저세상이 없어도 안심이고 있어도 안심이다. 저세상이 없다면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M60) 라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그가 내세에는 내세가 없으므로 현세에서처럼 고통을 겪지 않는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런 견해는 단멸론자에게도 해당된다.

저세상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단멸론자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다. 반대로 현명한 자에게는 축복이 될 것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M60) 라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착하고 건전하게 사는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다. 오히려 축복이다. 천상과 같은 선처에 태어날 것이 때문이다.

저세상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확률은 반반이다. 확률이 반반이라면 저 세상이 있는 것에 내기를 걸어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이렇게 하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의 업과 업의 과보의 가르침에 대해서 어떤 견해로도 부술 수 없다고 했다. 이를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이라고 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사고는 순간에 일어난다. 지금 이순간에 최후를 맞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어갈까? 저세상은 없는 것이라 하여 막행막식하며 산 자는 두려워할 것이다. 마치 악행을 밥먹듯이 한 자가 임종에 이르러 두려움에 떠는 것과 같다.

누구나 최후를 맞는다. 최후를 축복으로 맞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계행을 잘 지킨 자들이다. 계행이 청정한 자에게는 천상과 같은 선처가 기대될 것이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는 한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계는 중시해야 할 실천행이라고 했다. 지켜도 그만 안지켜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건성건성 지키다가 계가 무너져 지내게 되면 99퍼센트는 사악처에 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왕자여, 계행을 갖추고 선한 원리를 갖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오랜 세월 머무르면 머물수록, 많은 공덕을 낳습니다.”(D23.15)


부처님은 살아 있을 때 공덕을 많이 지으라고 했다. 계행과 선한원리의 공덕을 말한다. 이는 계행공덕뿐만 아니라 보시공덕과 수행공덕도 해당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오래 살고자 한다. 당장 한시간 후를 알수 없음에도 자신만큼은 기대수명대로 살고자 한다. 그렇다면 대체 오래 살아서 어떻게 할 것인가?

오욕락을 즐기면서 오래 사는 사람이 있다. 오래 살면 살수록 악덕이 된다. 이런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시각, 청각 등으로 감각을 즐겼을 때 그 순간에 죽는다면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후각, 미각, 촉각처럼 직접적인 감각은 어떠할까? 아마 더욱더 악처에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 감각을 즐기며 오래 사는 것은 재앙이다.

장수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오래 살면 살수록 공덕 지을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오래 살면 공덕의 총량은 늘어난다. 특히 수행공덕을 쌓아야 한다. 이런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죽음은 축복이 될 것이다. 선처에 태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계청정을 강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행을 하면 계는 자연스럽게 청정해진다고 했다. 매일 암송하고 행선하고 좌선해야 하는 당위성을 말하는 것 같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나의 안전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안심이다. 이후부터는 자신을 의지처로 해서 살아간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귀의(自歸依)’이다. 자신이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다.


2023-01-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