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에 찬 믿음으로 니까야를
지금 시각은 새벽 4시 18분, 행선을 끝내고 스탠드 불을 켰다.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를 읽기 위해서이다. 현재 16번경 마하빠리닙바나경을 읽고 있다.
몸이 찌뿌둥할 때 누워 있으면 망상만 일어난다. 이럴 때는 일어나야 한다. 몸과 마음을 다른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행선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것 같다. 여기에 암송까지 하면 금상첨화가 된다.
몸과 마음이 이전과는 다른 상태가 되었다. 새벽에 이 귀중한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까? 못 잔 잠을 자야 할까? 에스엔에스나 유튜브를 해야 할까? 해야 할 일이 있다. 경전을 보는 것이다. 매일 틈만 나면 조금씩 진도를 나가는 디가니까야를 말한다.
현재 디가니까야를 딱 반 읽었다. 총 34경에서 16경이나 책을 보니 딱 절반이다. 언제 다 읽을 것인가? 진도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새기며 읽는다. 각주까지 꼼꼼하게 읽는다. 새겨 두고 싶은 것은 형광메모리펜 칠을 해둔다.
디가니까야는 소설적 구성으로 되어 있다. 마치 단편소설을 읽는 것 같다. 이와같은 소설적 구성은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웅대한 소설적 구성으로 되어 있다.
디가니까야에서 가장 길이가 긴 경이 있다. 그것은 대반열반경이라 불리우는 마하빠리닙바나경(D16)이다. 부처님 열반 행적에 대한 것이다. 무려 124페이지에 달한다. 이쯤되면 중편소설분량이라 할만 하다.
오늘 새벽 '빠딸리가마 시의 건설'에 대해 읽었다. 불과 네 페이지 밖에 안되는 짤막한 분량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자극 받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거기에 사는 하늘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보시의 공덕을 바치라.
그들은 경배받으면 그를 경배하고
그들은 숭배하면 그를 숭배한다."(D16.32)
이 게송은 빠딸리가마에 터를 잡고 사는 천신들을 찬탄하는 게송이다. 이런 가르침을 접할 때 의심을 할 것이다. 과연 천신이 있는 것인지 의문하는 것이다. 더구나 천신을 경배하라고 했다. 대체 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읽다보면 신화적 내용으로 가득하다. 천신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더구나 신통도 빠지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를 지적하며 경전을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경전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경전에 있는 내용을 온전히 받아 들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선별해서 수용하는 것이다. 전자는 대체로 신심 있는 불자에 해당되고, 후자는 과학적 사고 방식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해당된다.
어떤 이는 경전을 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경전은 필요한 부분만 보면 된다는 것이다. 신화적 이야기, 신통에 대한 것, 윤회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경은 제외하는 것이다. 이것 제하고 저것 제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염처경 등 수행과 관련된 경 몇 개를 건질 것이다.
빠알리삼장은 방대하다. 모아 놓으면 한수레 된다. 이 많은 것을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 선별해서 읽는 것 같다. 필요한 부분만 참고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더구나 신화, 신통, 윤회와 관련된 내용을 빼버리면 부처님 가르침은 형해화(形骸化) 된다.
부처님 가르침이 해골만 남았을 때 어떻게 될까?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 될 것이다. 불교철학이 되는 것이다. 주로 불교를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 이런 태도를 볼 수 있다.
불교를 단지 철학적으로만 대했을 때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경전을 필요한 부분만 취했을 때도 보석과 같은 가르침을 놓치게 된다. 마하빠리닙바나경 역시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고 오로지 자신의 깜냥으로만 판단하려 한다면 자신만 손해일 것이다.
경전은 신화적으로 구성될 수 있다. 천신들이 등장할 수 있다. 신통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중립적 입장이다. 그저 그러려니 한다. 그럼에도 경전을 근거로 해서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 경전을 맹신한다고 비난한다. 더구나 경전에 있는 내용은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후대 사람들이 편집했다는 것이다.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에 걸린 사람과도 같다. 경전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개 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경전을 비난한다.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니까야를 문제 삼는다. 학자의 논문을 인용하여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요즘 경전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방대한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자는 것이다. 그것도 새기며 보는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보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는가? 속된 말로 건질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를 가졌을 때 신화적 이야기나 신통에 대한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게송에서는 천신이 등장한다. 게송에서는 천신에게 보시의 공덕을 바치라고 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럴 때는 각주를 봐야 한다. 주석에서는 "승단에 받쳐진 네 가지 필수품의 공덕을 신들에게 돌리시오 이득을 주시오."(Smv.542)라는 뜻이라고 했다.
경을 보면 천신에게도 공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주석에서는 "돌리시오"라는 표현을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는 다름아닌 공덕회향이다. 승가에 보시한 공덕을 널리 회향하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 법회에 참석하면 공덕회향이 있다. 오늘 자신이 지은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에 대하여 선망 부모를 비롯하여 삼계 모든 중생에게 돌리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질은 나누면 나눌수록 작아진다. 그러나 정신적 공덕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진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공덕을 주변에 회향하라고 말한다.
공덕은 천신들에게도 회향할 수 있다. 이는 천신들을 경배하는 것과 같고 숭배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주는 것만큼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배받으면 그를 경배하고 그들은 숭배하면 그를 숭배한다."(D16.32)라고 한 것이다. 천신들이 보호해 주는 것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을 보면 종종 초월적인 내용이 있다. 부처님이 신통으로 갠지스강을 건넌 이야기도 이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신통으로 저언덕으로 건넌 다음에 이런 게송을 읊었다.
"사람이 뗏목을 엮는 사이에
다리를 만들어 늪지를 지나서
바다와 하천을 건너는 사람들,
그들은 지혜로운 님, 건너는 님들이다."(D16.33)
게송에서 중요한 말은 건너는 사람이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사람을 말한다. 부처님은 바다처럼 넓은 갠지스강을 신통으로 건넜는데 이는 정신적 다리를 만들어 건넌 것과 같다. 이때 다리는 고귀한 길이다. 바다는 윤회의 바다이고 하천은 갈애의 하천을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건너는 가는 자이다. 건넌다는 것은 초월함을 의미한다. 정신적 초월이다. 이는 부처님의 고귀한 길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경전을 보면 신화적이고 초월적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를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서 걷어내려 한다면 대단히 어리석다.
경전에서는 종종 악마가 등장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왜 그런가? 악마는 항상 부처님과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신화적이고 초월적 이야기 역시 부처님 가르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오늘도 엄지로 치다 보니 아침 6시가 넘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 한다. 이는 경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다. 경전을 의심없이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어떤 이는 바이블을 빗대어 비난한다. 문자 그대로 믿는다든가 오류가 없다고 본다든가 등으로 말하는 것이다.
매일 니까야(경장)를 읽고 있다. 니까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나야(율장)도 있고 아비담마(논장)도 있다. 이와 같은 빠알리 삼장을 언제 다 읽을 것인가? 오히려 읽을 것이 많아서 축복이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읽는 것이다. 확신에 찬 믿음으로 읽는다. 확신에 찬 믿음으로 니까야를 대한다.
2023-01-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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