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담마다사, 어떻게 가르침의 거울에 비추어 볼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7. 23:53

담마다사, 어떻게 가르침의 거울에 비추어 볼 것인가?

 


내 법명은 담마다사이다. 글을 쓸 때 실명과 함께 서명할 때 사용한다. 글을 마칠 때 날자와 함께 "담마다사 이병욱"이라 하는 것이다.

세상에 수많은 법명이 있다. 한자 법명도 있고 요즘에는 빠알리 법명도 있다. 물론 한자 법명도 있다. 2004년 불교교양대학 수계식할 때 받은 것이다. 그때 받은 법명은 성공(聖供)이다.

법명 성공은 사용하지 않았다. 블로그 초창기 때 두 세달 사용하다 그만 두었다. 너무나 흔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 법명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성인 성(聖)자에 이바지할 공(供)인데 이는 성인을 받들어 모시라는 뜻이다.

불교교양대학 졸업자는 많았다. 그때 당시 한기수가 수백명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법명도 많았다. 어떤 방법으로 지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자랑스럽게 사용하는 도반들도 있었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 반드시 서명했다. 이는 글에 대한 무한책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날자와 이름을 서명 했으므로 함부로 쓸 수 없다. 미래 책을 낼 것을 염두에 두고 썼다.

글을 쓸 때 형식과 내용을 갖춘 글을 쓰고자 했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의미와 형식을 갖춘 글을 말한다. 2006년 처음 블로그에 글을 쓴 이래 지금까지 이런 기조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 필명은 '진흙속의연꽃'이었다. 법명 성공을 써야 하지만 내가 만든 필명을 쓴 것이다. 그래서 글을 마칠 때 날자와 함께 "진흙속의연꽃"이라고 서명한 것이다.

이름을 함부로 짓지 말라고 했다. 이름대로 운명이 따라 간다는 것이다. 필명을 "강아지"라고 했을 때 개가 될 것이다. 블로그 필명도 함부로 지어서는 안될 것이다.

필명으로 무엇으로 해야 할까? 행복한 고민을 했다. 나만의 독특한 이름을 갖고 싶었다. 좀 더 긴 이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 스모 선수 이름이 떠올랐다  '다까노하나'라는 이름이다. 이름에 '의'자가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는 꽃이다. 이런 식의 이름이 근사해 보였다.

필명을 하나 빨리 만들어야 했다. 2006년 당시 블로그에 올인하던 시기였다.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던 시기였으므로 시간부자였다. 불교음악에도 관심가졌다. 그 중에서도 명상음악에 끌렸다.

명상음악 시리즈에 이름이 여러 개 있었다. 동방의 샛별, 태양의 후예, 대승의 바다, 진흙속의 연꽃 등 다섯 글자로 된 것이 많았다. 공통적으로 '의'자가 들어가 있다. 참으로 근사한 이름들이었다. 이 중에서 '진흙속의 연꽃'을 필명으로 했다. '대승의 바다'는 블로그 이름으로 했다.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시작할 때, 초창기 때는 몰랐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커졌음을 말한다. 사업을 해서 성공한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블로그도 그랬다.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사업 초창기라 시간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글을 쓰면 시간이 잘 가기 때문에 블로그를 한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생각없이 필명을 지었고 블로그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이름에도 값이 있는 것일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이름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이름값 하기 힘들다. 필명 '진흙속의연꽃'도 그랬다. 스리랑카에서 공부한 어느 비구니 스님이 지적해 주어서 알았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 물위로 솟아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

 


상윳따니까야 '꽃의 경'에 있는 부처님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자신을 '진흙속의 연꽃'과 같다고 했다.

필명 진흙속의연꽃은 엄청난 이름이다. 비구니 스님은 왜 부처님을 상징하는 말을 필명으로  사용하느냐고 했다. 이런 지적에 크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처님에게나 쓰는 말을 필명으로 사용한 것이다.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쓸 때 보잘 것 없었다. 그저 시간 때우기 식으로 끄적거려 본 것이다. 누가 볼 사람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블로그에 글 쓴지 일년이 되었을 때 주목 받기 시작한 것 같았다. 칭찬도 있었지만 태클도 있었다.

엄청난 필명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한자 법명 성공으로 교체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수백개 글에서 필명 교체가 쉽지 않았다.

필명 교체작업은 그만 두었다. 불경스럽기는 하지만 부처님을 상징하는 말인 '진흙속의연꽃'을 그대로 사용하고자 했다. 그대신 글을 쓸 때 더 신중하고자 했다. 이후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가 되었다.

이 세상에 무상하지 않은 것은 없다. 블로그 필명도 그런 것 같다. 2018년에 필명을 담마다사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필명 진흙속의연꽃을 사용한지 12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블로그는 크게 성장해서 누적조회수가 600만명이 넘었다. 불교계에서 이와 같은 조회수를 넘긴 것을 보지 못했다. 불교계 넘버원 블로그가 된 것 같았다.

담마다사는 빠알리 법명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빤냐와로 삼장법사가 지어준 것이다. 2018년 11월 담마와나선원에서 수계식이 있었는데 그때 받은 것이다.

삼장법사는 빠알리 법명을 설명해 주었다.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맞는 법명을 지어 준 것이다. 법의 거울처럼 반조해서 글을 쓰라는 것이다.

담마다사(Dhammadasa)는 우리말로 가르침의 거울이다. 담마다사는 법을 뜻하는 담마(Dhamma)와 거울을 뜻하는 아사다(Asada)의 합성어이다. 이를 진리의 거울 또는 법의 거울이라고도 한다. 한자어로는 법경(法鏡)이다. 2018년 11월 이후 지금까지 담마다사를 필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요즘 니까야를 의무적으로 읽고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수시로 열어 본다. 현재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다. 오늘 16번 경 마하빠리닙바나경을 읽다가 '가르침의 거울'에 이르렀다.

부처님은 열반을 앞두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어느 마을에 이르자 제자들이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수행승과 수행녀, 남자재가신도와 여자재가신도는 죽어서 어디에 태어 났는지 물어 본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들었거나 선처에 태어났음을 알려 주었다. 모두 성자들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를 궁금해 하는 것 같다. 부처님은 모두 다 답변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난다여,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D16.38)라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누구나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악덕을 지은 자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 두려움에 떨 것이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어갔다면  안심이다. 왜 그런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아난다여, 고귀한 제자가 그것을 성취하여 그가 원한다면 스스로 자신을 이와같이 '지옥도 부서졌고, 축생도 부서졌고, 아귀도 부서졌고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도 부서졌고 나는 이제 흐름에 든 님이 되어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라고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이라는 법문은 이러한 것이다."(D16.39)

 


이 법문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역으로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하면 악처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나의 안전은 나에게 맡겨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안전하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절대 지옥, 축생, 아귀와 같은 악처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장된 것은 아니다. 과거에 지은 업이 있어서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그래서 천만금을 보시했어도, 평생 계행이 청정했어도 악처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아잔브람 스님이 말했다고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 악처를 면한다."라고. 이런 말은 경전에 근거한 것이다. 바로 마하빠리닙바나경에 있는 '진리의 거울(담마사)'에 대한 법문이다. 법사들 상당수는 경전적 근거를 밝히지 않고 법문하지만 이미 부처님이 다 말했던 것이다.

담마다사는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디가니까야 ‘위대한 열반의 경’(D16)을 비롯하여 맛지마니까야 ‘다양한 종류의 세계의 경’(M115), 상윳따니까야 ‘긴자까바싸따의 경’(S55.8), 그리고 테라가타 395번 게송(Thag.395), 이렇게 네 곳에서 발견된다.

 


“앎과 봄을 얻기 위해
가르침의 거울을 붙잡고
이 몸이 안팍으로
공허한 것을 관찰했다.”(Thag.395)

 


테라가타 게송에서도 담마다사(가르침의 거울)가 발견된다. 이 게송은 무슨 뜻일까?

거울은 액면 그대로 비춘다. 주석에 따르면, “뭇삶들이 거울로 자신의 몸이나 얼굴에서 장점이나 결점을 보듯이, 이와 같이 수행자는 자신의 존재에서 오염과 정화를 그대로 보는데, 그 통찰에 의한 앎을 여기서 가르침의 거울이라고 한다.”(ThagA.II.168)라고 했다.

가르침의 거울, 진리의 거울, 법의 거울 담마다사는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면 액면 그대로 보이듯이, 자신의 성품 또한 가르침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액면 그대로 볼 수 있다.

부처님은 가르침의 거울이라는 법문을 설했다. 이는 어쩌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법문일 수 있다.

악처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 한다. 유신견, 의심, 계금취라는 세 가지 결박을 풀어야 한다. 그 이전에 또한 네 가지가 요청된다. 그것은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에 대한 믿음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졌을 때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D16.38)라고 했다.

큰 건물에는 초석이 있다. 진리의 길에도 초석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담마다사, 가르침의 거울은 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정초석과 같은 것이다. 또한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가게 하는 정초석같은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삶에 정초석이 있는 것과 같다. 자신과 가르침에 의지하여 주욱 그 길로 가면 되기 때문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려면 의심이 없어야 한다. 삼보와 계행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전제 조건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성찰하고 반조해야 할 것이다. 가르침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자주 탐욕스러운가, 자주 탐욕스럽지 않는가? 나는 자주 성내는가, 나는 자주 성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는가, 자주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지 않는가? 나는 자주 흥분하는가, 나는 자주 흥분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회의적 의심을 하는가, 자주 회의적 의심을 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분노하는가, 자주 분노하지 않는가? 나는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는가,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격정적으로 마음을 내는가, 자주 격정적으로 마음을 내지 않는가? 나는 자주 게으른가, 자주 열심히 정진하는가? 나는 자주 집중에 들지 못하는가, 자주 집중에 드는가?”(A10.51)

 


2023-01-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