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앗따닷타 존자의 "뭣이 중헌디?"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18. 07:26

앗따닷타 존자의 "뭣이 중헌디?"


이번에도 동시성을 경험했다. 오늘 경에서 읽은 내용이 논서에 똑같이 나왔다. 우연의 일치일까? 융의 동시성 이론이 또 한번 일어난 것 같다.

오늘 점심 때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을 읽었다. 쌀라 쌍수 아래에서 설법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최상의 공양에 대해 말씀하셨다. 꽃이나 향 등으로 불공하는 것보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러한 것으로 여래가 존경받고 존중받고 경배받고 예경받고 숭앙받는 것은 아니다. 아난다여,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대들은우리는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D16.108)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 부처님 전에 여러 공양물을 올려 놓고 비는 것이다. 과연 이런 행위를 부처님이 좋아할까? 부처님이 좋아하는 행위를 해야 한다. 그것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부대중이 "우리는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하리라."라고 서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저녁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경에 있는 내용과 똑같은 내용을 읽었다. 시간차이는 있었지만 동시성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융이 환자의 황금빛 풍뎅이에 대한 꿈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창에 황금빛 풍뎅이가 나타난 것과 같다.

부처님께 합장공경하는 행위는 선법이다. 꽃과 향을 공양하는 것도 선법이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예경, 합장공경, 헌공 등으로는 부처님을 진실로 예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셨다."(1 212)라고 표현 되어 있다.

부처님이 예경 받고자 4아승지 10만겁동안 바라밀을 닦았을까? 오로지 공양만 한다면 이는 어쩌면 부처님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부처님이 되신 것은 천신과 인간들로 하여금 도와 과를 증득하게 함이었다."(1 212)라고 했다. 이 말은 경에서 "우리는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하리라."(D16)라는 말과 일치한다.

미얀마 불교에는 힘이 있다. 그것은 주석의 힘이다. 경에 대한 수많은 주석이 있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도 이에 해당된다.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꽃과 향을 헌공하는 것 정도로 큰 선업을 지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진짜 큰 선업은 수행하는 것이다.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자들이 불공 드리는 것으로 그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그러한 예경은 부처님의 교법을 하루조차, 죽 한 숟가락 마실 시간 정도조차 머물게 할 수 없다."(1 213)라고 했다.

부처님 법이 좋은 줄 안다면 부처님 법이 오래 머물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겨우 죽 한 숟가락 뜰 정도로 교법이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서 사향사과의 성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열반의 증득으로 가능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이렇게 경을 해석한다.


지계, 사마타, 위빳사나라고 하는 실천(patipatti)을 행하는 것만이 부처님의 바람에 딱 들어맞는 예경이라고 말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213)


부처님이 지금 계시다면 부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 부처님에게 꽃과 향 등으로 예경하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 가장 좋아할 것이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부처님이 기뻐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앗따닷타(attadattha), 자신의 이익만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렇다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일의 우선순위를 알라는 것이다.

"
뭣이 중헌디?"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에 목숨을 거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것이다.

어떤 수행승이 있었다. 수행승은 부처님이 4개월 후에 열반에 드실 것을 알았다. 이런 사실을 알자 사원에서 소임 맡는 일에 소홀 했다. 소임이 선업으로서 공덕이 되는 일이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아라한이 되는 것이었다.

수행승은 오로지 수행만 했다. 어쩌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수행인지 모른다. 이런 모습에 대하여 어떤 수행승이 못마땅 했었던 것 같다. 사원에서 해야 할 일을 소홀히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부처님에게 말했다. 부처님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놀랍게도 사두라고 말했던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수행승에게 훌륭하다라며 칭찬해 주었다. 왜 그랬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 비구들이여, 나 여래를 진실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라면 앗따닷타 존자처럼 행해야 한다. , 비구들이여, 향 등으로 공양하는 것은 나 여래를 예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출세간법에 알맞게 실천을 행하는 것만이 나 여래를 예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그대들도 앗따닷타 존자와 같이 실천해야 한다.”(DhpA.ii.102)


법구경 주석에 있는 말이다. 이 주석은 "다른 이의 많은 이익이라는 핑계로도 자신의 이익을 늦추지 말라. 자신의 진짜 이익, 번영을 잘 알고 이해하고서 그 자신의 일만을 열심히 노력해야 하느니라."(Dhp.166)라는 게송에 대한 것이다.

스님이면서 부업에 열심인 스님이 있다. 니까야 경전은 언제 다 읽어야 할까? 도와 과는 언제 이루어야 할까? 본업인 수행을 하지 않고 부업에 열중할 때 부처님이 좋아할까?

부처님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불공 드려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대신 불공 드리는 일에 소홀해도 도와 과를 위해 수행한다면 기뻐할 것이다. 설령 자신만의 이익을 실천한다는 비난을 들어도 이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오늘 동시성을 경험했다. 경을 읽고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마침 논서를 읽다가 쓰고 싶은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앗따닷타, 자신만의 이익을 실천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런 사람을 부처님은 칭찬했다.

부처님은 하루빨리 욕계를 떠날 것을 말했다. 하루빨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한다. 그럼에도 윤회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은 윤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지혜, 위빳사나 지혜라고 하는 눈이 없기 때문에, 보통의 눈이 있어도 장님과 같다."(Dhp.174)라고 했다.


2023-01-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