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오온이 윤회한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29. 08:53

오온이 윤회한다


그동안 헛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세월을 돌아 보니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오로지 집과 직장밖에 몰랐던 시절을 말한다. 이를 잃어버린 20년 세월이라고 말해야 할까?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다. 오늘 새벽에 한시간가량 읽었다. 읽다 보니 어제 읽은 것을 복습하는 셈이 되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다는 것이다. 이는 내용이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언제 보아도 새롭다. 마치 법구경을 보는 것 같다. 언제 열어보아도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디가니까야 18번경 자나바싸바의 경도 그렇다.

니까야를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이다. 마치 해외여행 갔을 때 낯선 풍경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는 것과 같다. 경전을 보면 새로운 하늘과 땅을 보는 것 같다. 미지의, 이지의 경이로운 세계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 읽고 또 읽는다.

니까야를 읽다 보면 새겨두고 싶은 구절이 있다. 노랑과 분홍 형광메모리펜 칠이 덫칠 되어 있다. 새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진다. 그래야 확실히 내것으로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각주에 있는 주석에서 본 "존재의 다발의 윤회"(Smv.638)가 대표적 케이스이다.

무엇이 윤회하는 것일까? 어떤 이는 영혼이 윤회한다고 말한다. 어떤 변치 않는 고정된 자아가 있어서 몸만 바꾸는 식의 윤회를 말한다. 이른바 힌두교식의 윤회이다. 부처님은 이런 식의 윤회를 부정했다.

힌두교는 브라만교가 환골탈태한 것이다. 불교가 출현하자 브라만교는 크게 밀렸는데 이에 위기를 느끼자 인도 토속신을 끌어들여서 힌두교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자아가 있다는 아트만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부처님은 힌두교의 전신인 브라만교를 비판했다. 자연스럽게 유일신과 영혼사상도 비판했다. 어쩌면 불교는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성립된 종교의 성격도 있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창조주도 없고 영혼도 없기 때문이다.

불교에도 윤회가 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은 윤회를 부정한다. 불교인들이 말하는 윤회는 힌두교식 윤회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사람이 동물이 되고 사람이 천신이 되는 윤회를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윤회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고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한다.

불교의 윤회는 무아윤회이다. 윤회의 주체가 없는 것이다. 윤회의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을까? 그래서 외도들은 유아윤회를 말한다. 어떤 변치 않는 고정된 실체, 영혼같은 것이 있어서 자아가 윤회한다는 것이다.

자아윤회는 존재론에 기반한 것이다. 자아가 있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연기법에 기반한다. 이는 사건과 사건이 조건발생함을 뜻한다. 그래서 무아윤회가 된다.

십이연기는 연결고리로 되어 있다. 사건과 사건에는 조건발생이 있다. 그래서 십이연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순환하다. 이것이 윤회이다. 이를 순간윤회와 일생윤회로 설명할 수 있다.

오늘은 어제가 있어서 성립된다. 지금 내가 머리가 아프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제 과음 했다면 머리가 아플 것이다. 어제 없는 오늘은 상상할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윤회이다. 순간순간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에 순간윤회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지금은 시간에 대한 것이고 여기는 공간에 대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무한히 확장하면 일생을 윤회하는 삶이 된다.

순간윤회는 일생윤회가 된다. 십이연기가 일상에서 회전하면 순간윤회가 된다. 십이연기가 일생너머로 회전하면 일생윤회가 된다. 모두 조건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형성을 조건으로 식이 발생한다.”가 될 것이다.

식은 마음이다. 마음이 윤회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마음을 영혼으로도 볼 수 있고 자아로도 본다면 유아윤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조건발생하는 십이연기에서는 유아윤회가 될 수 없다. 십이연기는 존재론적 윤회가 아니라 사건과 사건의 조건발생적 연기의 회전이다. 조건발생에는 주체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무아윤회가 될 수밖에 없다.

무엇이 윤회하는가? 업이 윤회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조건발생하는 업이 윤회하는 것이다. 그래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Sa
khārapaccayā viññāa)”(S12.2)라고 했다. 여기서 상카라는 형성 또는 업으로 번역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가 윤회함을 말한다.

업이 윤회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십이연기 연결고리에서 명확히 밝혀져 있다. 사건과 사건이 조건발생하는 십이연기의 연결고리를 감안하지 않고 윤회를 말하면 유아윤회가 되기 쉽다.

외도들은 연기법을 모른다. 연기법을 모르는 외도가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고 물어 본다. 오물장같은 질문이다. 질문같지 않은 질문이다.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다. 악취나는 질문이다. 왜 그런가? 유아론자가 유아윤회를 가정하고서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며 넌지시 물어 보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를 읽다가 윤회와 관련하여 놀라운 구절을 발견했다. 그것은 오온이 윤회한다는 것이다. 이는 빔비사라왕의 윤회와 관련이 있다.

디가니까야 18번경에 따르면, 빔비사라왕은 죽어서 야차로 태어났다. 왕은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서 성자의 흐름에 든 자가 되었지만 야차로 태어난 것이다.

야차는 가장 하급신이다. 그렇다고 악처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 있을 때는 사군을 호령하는 대왕이었지만 신들의 세계에 태어 났을 때는 신들의 시중을 드는 가장 저급한 신으로 태어난 것이다. 더구나 용모도 흉측한 거친 몸을 가졌다.

야차는 부처님에게 자신이 전생에 빔비사라왕이었음을 밝혔다. 야차는 벳싸바나 대왕의 동료로 태어 났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왕으로 죽어서 여기 신들 사이에 출현할 수 있었습니다.”(D18.8)라고 말했다.

주석에 따르면, 야차는 14번 윤회했다. 7번은 천상계에서 윤회하고, 7번은 인간계에서 윤회했다. 현재 야차로 있다. 야차의 이와 같은 윤회에 대해서 주석에서는 모두 열네 번의 존재의 다발(칸다)의 윤회”(Smv.638)를 뜻한다고 했다.

오온도 윤회할 수 있을까? 업이 윤회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주석에서는 왜 오온이 윤회한다고 했을까?

불교에서는 오온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래서 저기 남자가 간다.”라거나, “저기 여자가 간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말하는가? “저기 오온이 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언어로 개념화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남자나 여자라는 말도 개념화 된 것이다. 그런데 개념화 된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언어적으로만 존재한다. 오로지 언어적 명칭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나라는 말도 언어적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없다. 무아인 것이다. 굳이 나를 부르고자 한다면 오온이라고 말해야 한다. 나라는 명칭은 색, , , 식이라는 다섯 가지 다발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S5.10)

 


불교인이라면 나는 간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오온이 간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나는 간다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세상의 관례에 따르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를 보다가 오온이 윤회한다는 주석을 보았다. 이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불교인들만이 쓰는 용어로 윤회를 설명한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한다면 '내가 윤회한다'거나, '자아가 윤회한다'거나, '영혼이 윤회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윤회는 없다. 유아윤회는 없는 것이다.

윤회가 있다면 무아윤회가 있을 뿐이다. 연기법에 따른 윤회를 말한다. 나를 존재론적으로 보면 유아윤회가 타당하다. 그러나 세상을 사건의 연속으로 보면 무아윤회가 타당하다. 업이 윤회하는 것이다. 이는 행위가 윤회함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오온이 윤회하는 것이다.

오온에 대해서 자신의 것이라고 움켜쥐고 있는한 윤회할 수밖에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취온이 윤회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온에 집착하면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이다. 오온을 내것으로 집착하지 않았을 때 연기의 회전은 멈춘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것이다.


2023-01-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