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비린내 나는 세상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31. 07:38

비린내 나는 세상에서


지금 시각 4 15, 글쓰기 딱 좋은 시간이다. 지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엄지치기 한다. 대강 시나리오는 정해졌으나 엄지 가는 대로 쓸 것이다.

삶에는 성찰이 있어야 한다. 성찰 없는 삶은 발전이 없다. 특히 자만으로 사는 삶이 그렇다. "내가 누군데?"라며 자만 했을 때 오늘은 어제의 연속일 것이다.

에스엔스에서 글을 보면 대부분 자만에 대한 것이다. 한상 거하게 차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식자랑, 손주자랑하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일상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밝히는 사람도 있다. 성찰하고 반성하는 글은 보기 힘들다.

대부분 단점은 숨기고 장점은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자랑이 되기 쉽다. 자랑은 자만이 되기 쉽다. 우월적 자만이다. 태생적 자만, 배운자의 자만, 부자의 자만으로 귀결되기 쉽다.

성찰하는 글이 아름답다. 이런 글을 발견하면 "사두! 훌륭합니다."라며 칭찬해 준다. 성찰이 있다는 것은 발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성찰이 있으면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 수 있다. 축적되면 몰라보게 달라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성찰하는 삶에 사띠도 해당되는 것 아닐까?"라고. 왜 그런가? 사띠는 기본적으로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결합된 기억이다. 자신이 체험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책에서 읽은 것을 기억해 내는 것도 사띠에 해당될 것이다.

책을 의무적으로 읽고자 한다. 머리맡에는 여러 권의 책이 있다. 돈 주고 산 것도 있고 선물받은 것도 있다. 그런데 손이 잘 가는 것도 있고 손이 가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경전과 수행지침서에는 자주 손이 간다. 그러나 일반 서적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읽어도 그만이고 안읽어도 그만인 것이다.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인 것이다.

이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유한한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금쪽 같은 시간이다. 시간 때우기로 책이나 유튜브, 에스엔에스(페이스북)을 해서는 안된다. 자신을 향상으로 이끄는 행위를 해야 한다. 경전과 수행지침서만한 것이 없다.

새벽에는 정신이 맑다. 정신이 맑을 때는 어제 일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대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다. 경전 읽은 것도 떠오른다. 그것은 새겨서 읽었기 때문이다. 새긴 것이 떠오른다면 확실히 내것이 된 것이다. 여기에다 글로 표현하면 공유할 수 있다.

영화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대사가 있다. 어쩌면 진리의 말씀인지 모른다. 가능하면 기억해 두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써 놓지 않으면 잊어 버린다. 경전의 한구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제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 한구절이 강렬하다. 기억하고 새기고 공유하고 싶어지는 구절이다. 그것은 "누가 사람의 목숨에 대해서 알겠습니까?"(D19.33)라는 말이다. 나는 왜 이말에 사무쳤을까?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오늘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오늘이 최후의 날이 될 수 있다. 이 건강이 천년만년 갈 것 같고 또한 이 젊음이 천년만년 갈 것 같다. 자신에게 죽음이라는 말은 없는 것 같다. 설령 주변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맛있게 식사를 할 것이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기대수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기대수명대로 산다면 아직도 수십년 남았다. 누구 보장해 줄까?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누가 사람의 목숨에 대해서 알겠습니까?"(D19.33)라고 했다. 이 말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수포와 같고, 풀끝의 이슬과 같은 것이고, 순간에 부서지는 성질이 있다."(Smv.669)


목숨은 순간에 부서질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사고사를 의미한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앞으로 한 시간 후를 장담할 수 없다. 운전할 때 늘 긴장하는 요인이 된다. 가게 앞을 지날 때 간판이 떨어질까 염려하는 요인도 된다.

어제 디가니까야 19번경 '마하고빈다의 경'을 읽었다. 마하고빈다는 왕립사제였다. 어느날 하느님을 만났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은 브라흐마를 번역한 것이다. 한역으로 범천이라고 한다.

범천은 고대 인도 브라만교 창조주 개념의 하느님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범천은 윤회하는 중생으로 보았다. 다만 선정수행을 해서 그 과보로 색계천상에 태어난 천신으로 보는 것이다.

초기경전 니까야에는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얘기로 가능하다. 왕립사제 마하고빈다가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도 역시 신화적이고 초월적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마치 소설을 읽듯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전을 읽는 맛을 내준다.

경전 읽는 것이 소설 읽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다. 먼저 스케일이 장대하다. 시간과 공간은 우주적이다. 여기에 천신들이 등장하고 하느님이 나온다. 부처님과 이들 천신들과 대화도 있고 천신들과 인간들의 대화도 있다.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경에서 하느님에 대한 묘사가 있다. 극적으로 묘사 되어 있다. 천신도 등급이 있는데 하느님은 상급신이다. 상급신이 하급신 앞에 나타날 때는 전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빛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경에 따르면 하급신은 상급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상급신이 하급신 앞에 모습을 나타낼 때는 그들 모습과 유사하게 변신하여 보여 준다. 그런데 하느님이 출현할 때는 먼저 빛을 던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나타나는 징조가 보이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D18.7)라고 했다.

새벽노을은 해가 뜨기 전의 전조현상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출현할 때 먼저 광명이 뻗친다. 해가 뜨듯이 마침내 하느님이 나타났을 때 어떤 모습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건달바로 묘사되어 있다. 신들의 세계에서 가장 하급신에 해당되는 건달바의 모습이다.

영화에서 보는 건달의 이미지가 있다.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에 나오는 존 트라볼타가 연상된다. 영원한 청년의 이미지이다. 경에서도 건달바는 영원한 청년의 이미지이다. 경에서 하느님 씨낭꾸마라는 영원한 청년 빤차씨카라는 건달바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느님은 청년모습으로 하급신들과 대화한다. 그리고 인간과도 대화한다. 그 목소리는 어떠할까? 경에서는 "유창하고, 지적이고, 달콤하고, 또렷하고, 낭랑하고, 분명하고, 심오하고, 공명하는 특성을 가졌습니다."(D18.15)라고 했다.

하느님 목소리는 여덟 가지 특징을 가졌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부처님도 똑같은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목소리인지 모른다. 특히 심오한 목소리에 대해서는 단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경을 읽고 하느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신체는 건달바로서 영원한 청년 모습이다. 목소리는 심오하고 공명을 특징으로 하는 여덟 가지 소리의 특징이 있다. 그런데 탁월한 특징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황금상이다. 황금상이기 때문에 "그 용모와 명성은 신들을 능가하여 훨씬 빛납니다."(D18.13)라고 했다.

왕립사제는 바라문이었다. 왕립사제는 하느님을 보고자 했다. 홀로 명상하며 선정을 닦으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왕국의 관리에 대해서 물어 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노력해도 볼 수 없었다.

왕립사제 앞에 하느님이 나타났다. 영원한 청년의 모습을 한 황금상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왕립사제에게 부처님을 대신해서 가르침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비린내에 대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비린내가 있다. 비린내가 있는 한 하느님 나라(범천계)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왕립사제가 "어떤 것에 덮여 뭇삶이 비린내를 풍기며 하느님 세계는 차단되고 나쁜 곳으로 떨어집니까?"(D19.29)라며 묻는다. 이에 하느님은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
분노, 거짓, 잘못, 사기, 속임수,
인색, 자만, 질투,
욕망, 의심, 타인에 대한 폭력,
탐욕, 성냄, 취기, 어리석음,
이러한 것들에 묶여 비린내를 벗어나지 못하니
하느님 세계는 차단되고 나쁜 곳으로 떨어집니다."(D19.29)


비린내는 불선법에 대한 것이다. 온갖 해로운 마음부수가 총망라되어 있다. 마치 고기냄새나 생선냄새가 나는 것 같다. 사람에게도 사람냄새가 날 것이다.

생선에 비린내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비린내가 있다. 대표적으로 탐, , 치를 들 수 있다. 이런 비린내가 있는 한 결코 하느님 세계, 즉 선정의 세계에 들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비린내가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왕립사제는 하느님의 말을 듣고 출가하고자 했다. 이는 "인간이 아닌, 신의 말을 듣고 나서 저는 재가의 삶에 흥미를 잃었습니다."(D19.30)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재가에 살면 비린내를 부수기가 힘들기 때문에 출가의 삶을 살고자 한 것이다.

왕립사제는 권력을 가진 기득권자였다. 하느님을 친견하고 출가의 길로 가고자 했다. 다른 나라 왕립사제들도 설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시간을 달라고 했다. 7년 후에 출가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왕립사제는 "누가 사람의 목숨을 알겠습니까?"(D19.33)라며 지금 출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의 목숨은 알 수 없다. 젊어서 출가하는 것도 사람의 목숨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이 보장되어 있다면 노년에 출가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는 한시가 급한 것이다.

왕립사제는 모든 기득권을 놓고 출가했다. 40명의 아내도 두고 출가했다. 7년 후에 출가하겠다는 다른 나라 왕립사제들을 설득해서 7일 후에 출가하게 만들었다. 사람의 비린내를 제거해야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왕립사제와 동료들은 출가해서 모두 천상에 태어났다. 하느님 세계(범천)에 태어난 자도 있고 욕계천상에 태어난 자도 있다. 가장 낮은 지위는 건달바로 태어나는 것이다. 부처님 전생담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 시각은 6 35분이다. 2시간 20분 동안 쳤다. 엄지 가는 대로 친 것이다. 어제 경전 읽은 것에서 새겨 두고 싶은 것을 글로 표현해 보았다.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해야 한다. 출가도 지금 해야 할 것이다. 젊었을 때 즐기는 삶을 살다가 노년에 출가해도 된다고 말하면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보아야 한다. 누구도 나의 목숨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출가하지 못하면 심출가(心出家)라도 해야 한다.

지금 문 바깥으로 나가면 한시간 후의 운명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자타카에 이런 게송이 있다.


풀잎 끝의 이슬이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듯,
이와 같이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니
어머니, 저를 방해하지 마시오.”(JA.IV.122)


어머니는 눈물로 출가를 만류한다. 그럼에도 목숨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한시가 급하다. 그래서 "어머니, 저의 출가를 방해하지 마십시오."라며 뿌리치는 것이다. 비린내 나는 세상에서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서.


2023-01-3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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