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스마트폰은 괴로워 하지 않는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3. 2. 8. 08:16

스마트폰은 괴로워하지 않는다

H스님은 K스님의 잘못을 지적했다. 목탁은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연히 책상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괴로워하는 존재는 유정중생이다.

 


삼법인 중에 일체개고가 있다. 이는 법구경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Dhp.278)라는 가르침에서도 볼 수 있다. 일체가 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삽베 상카라 둑카(Sabbe sa
khārā dukkhā)”라고 했다. 일체라고 했으니 모든 것(sabbe)이 해당된다. 목탁도 일체에 해당되고 책상도 일체에 해당된다. 이런 논리라면 당연히 목탁도 괴로워해야 하고 책상도 괴로워해야 할 것이다.

괴로움의 본질이 있다. 이를 니까야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세가지 괴로움이 있다. 어떠한 것이 세가지인가? 고통의 괴로움, 형성의 괴로움, 변화의 괴로움이 있다.”(S38.14, S45.165)라고 하여 삼고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괴로움 그 자체인 고고성(dukkhadukkhat
ā), 형성된 것으로서 괴로움인 행고성(sakhāradukkhatā), 그리고 변화에 따라 소멸되는 괴고성(vipariāmadukkhatā)이 있다. 일체개고는 이 세 가지 범주에 모두 들어간다.

세 가지 괴로움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행고성이다. 이를 청정도론에서는 평정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의 형성들은 생멸에 핍박받기 때문에 형성의 괴로움이라고 한다.”(Vism.16.35)라고 했다. 여기서 삼계의 형성들이라는 말이 있다. 산천초목과 삼라만상을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 가르침에서 형성을 뜻하는 상카라는 마음부수와 관련되어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초님은 십이연기분석경에서 무엇을 형성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그것들 가운데는 세 가지 형성, 즉 신체의 형성, 언어의 형성, 정신의 형성이 있으니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형성이라고 부른다.”(S12.2)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 존재의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에 대한 것을 말한다.

 

일체개고라고 하여 삽베상카라에 대하여 산천초목과 삼라만상으로 넓혀서 본다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부처님이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라고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오온으로 한정된다. 우리 몸과 마음을 떠나서 진리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삽베상카라라고 하여 책상도 포함하고 스마트폰도 포함한다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당연히 책상도 스마트폰도 괴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K스님은 책상도 스마트폰도 괴롭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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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K스님의 유튜브 영상 강의를 비판했다. 스님은 자신의 블로그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에서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https://whoami555.tistory.com/m/13743180)라는 제목의 포스팅에서 K스님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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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K스님의 영상의 주소까지 공개했다. 문제의 영상 제목은 ‘(3) 스마트폰, 목탁도 괴로움이다 | 왜 깨달은 분, 부처님이라고 합니까? | 사성제 | 각묵스님 초기불교 이해 3’(https://m.youtube.com/watch?v=EnhwfBbtle8)이다. 이 영상의 1시간 10분 되는 시간대에서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동영상에 들어가 봤다. 영상은 2020 1월에 제작된 것으로 실상사 수련회에서 초기불교이해교재에서 행고성을 설명한 것이다. 유튜브에 공개된 것은 한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유튜브 영상제목을 보면 스마트폰, 목탁도 괴로움이다라고 했다. 니까야를 번역한 스님이 이렇게 말할 리가 없다. 그런데 문제의 영상 1시간 10분 부근에 들어가 보니 정말로 스마트폰도 괴로움입니다.”라고 말했다. 행고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스님의 권위가 있다. 같은 말을 해도 스님의 말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다. 니까야를 번역하고 대중강연으로 잘 알려진 K스님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그런데 스마트폰도 괴로움이고 목탁도 괴로움이라니! 이렇게 본다면 당연히 책상도 괴로워할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사실을 접한 H스님은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같은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남겼다.


이렇듯이 부처님은 목탁같은 무정물이 고통이다고 한번도 이야기 한적이 없다.오히려 그렇게 오해할까봐 여러곳에서 인식과 마음을 가진(sasaññimhi samanake), 느낌을 느끼는 자에게(Vediyamānassa)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한다고 말하고 있고, (tina)이나 나무토막(kaṭṭha) 같은 무정물에게 괴로움이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각묵스님은 청정도론의 "삼계에 속하는 형성된 것들"을 잘못 해석하여 "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목탁이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스로 갈애를 일으켜야한다. 목탁이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스로 갈애를 일으킬 수 있는가?”(스마트폰과 목탁이 괴로움이다?, H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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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목탁은 괴로워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행고성을 설명하는 K스님의 괴로움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K스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비판했다. 이는 “ ‘설마, 각묵스님이 실수 했을려고?’하는 믿음때문에 사람들은 목탁도 괴로움이다.’라는 비상식적이고 비불교적인 주장에 반박을 못하고 있다.”라는 글로 알 수 있다.

스님의 말이라고 해서 그냥 믿어야 할까? 스승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 들여야 할까? 스님이 스마트폰도 괴로워하고 목탁도 괴로워한다라고 했을 때 곧이곧대로 받아 들여야 할까? 이럴 때는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주석을 찾아 보아야 한다.

부처님 제자중에서 마부출신이 있었다. 부처님의 유성출가를 도운 마부 찬나를 말한다. 찬나도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상이 하늘을 찔렀다. 그것은 자신이 부처님의 출가를 도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부처님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진상은 있는 것 같다. 마치 진상고객이 난동 피우는 것과 같다. 찬나도 승가에서 진상이었던 것 같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 때 찬나에게 범벌(梵罰)을 주라고 한다. 이를 브라흐마단다라고 하는데 하느님의 처벌이라고 번역한다. 아무도 찬나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대구도 하지 말라고 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왕따에 해당된다.

찬나는 승가에서 골치덩어리였다. 찬나는 내가 누군데?”라며 아상이 대단했다. 찬나는 부처님의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해서도 “ ‘우리야말로 부처님의 으뜸가는 제자다.’ 라고 뽐내며 뜰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꼴이라니!”라며 속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이런 찬나를 모두 싫어했다.

찬나는 출가한지 40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었다. 부처님도 열반했다. 누구도 자신과 얘기하려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출가목적도 달성해야 했다. 하루는 장로 수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게 훈계를 베풀어 주십시요. .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게 교시를 베풀어 주십시오.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설법을 해 주십시오.”(S22.90)


아상이 높은 부처님의 마부 출신 찬나는 장로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아직 수다원에도 이르지 못한 자신에게 가르침을 알려달라고 청원청한 것이다.

찬나는 범벌중에 있었다. 부처님의 유훈대로라면 장로들은 묵빈대처 해야 한다. 하지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벗이여, 찬나여, 물질도 무상하고 느낌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합니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느낌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 ”(S22.90)


장로들은 찬나에게 무상과 실체없음(無我)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아상이 강한 찬나에게 오온이 무상한 것이고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삼특상 중의 하나인 괴로움에 대한 것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찬나는 장로들의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가르침을 들었다. 이에 찬나는나도 역시 이처럼물질도 무상하고 느낌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하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느낌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무상하다고 생각한다.”(S22.90)라고 이해했다.

장로들은 찬나에게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가르침만 알려 주었다. 장로들은 일체개고를 말하지 않았다. 장로들은 왜 일체개고를 말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Srp.II.318
에서 붓다고싸는모든 수행승들이 그를 가르치면서 왜 무상의 특징과 무아의 특징만을 말하고 괴로움의 특징은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묻고는왜냐하면 괴로움의 특징이 시설 되면 이와 같이 이 수행승은 물질도 괴롭고 의식도 괴롭고 길()도 괴롭고 경지(果位)도 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한국빠일리성전협회 상윳따니까야 통합본 3307번 각주)


이 주석은 한국빠일리성전협회(KPTS) 번역본에 실려 있다. 장로들이 찬나에게 일체개고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은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체개고라고 했을 때 모든 것이 괴로운 것이 되어 버리는데 심지어 도와 과도 괴로운 것이 되어 버린다. 당연히 열반도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혜가 성숙되지 않은 자에게 일체개고의 가르침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부처님 마부출신 수행승 찬나가 대표적이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에 대해서는 이해 했을지 몰라도 일체개고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로들은 일체개고만 제외하고 설명한 것이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모르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보면 괴로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해 놓았다.

부처님은 초전법륜경(S56.11)에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설했다. 괴로움을 사고와 팔고로 설명한 것이다. 이는 현재의 내가 겪고 있는 괴로움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말했을 때 이를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사고와 팔고를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입해 보면 틀림없는 사실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럴 때 확신에 찬 믿음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부처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삿다(saddha)라고 한다.

부처님은 고성제에서 결론적으로 오온에 집착된 것이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른바 오취온고를 말한다. 이는나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라고 집착함에 의해 비롯되는 괴로움을 말한다. 또한 오취온고는 조건지어진 것, 형성지어진 것에 대한 괴로움을 말한다.

오취온고는 행고성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행고성을 존재일반으로 확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책상도 괴로움을 느낀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일체개고라고 했을 때 도와 과도 괴로운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열반도 괴로운 것이 되어 버린다.

도와 과가 괴로운 것이라면 도를 닦지도 않고 과를 추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도와 과의 산물은 열반이다. 도와 과가 괴로운 것이라면 열반도 자동으로 괴로운 것이 된다. 열반이 괴로운 것이라면 누가 열반을 추구할까?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다. 열반은 괴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열반은 지각할수도 느낄수도 없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지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에 최상의 행복이라 말하는 것이다.

일체개고를 잘못 알면 찬나와 같이 된다. 지혜가 낮은 자들은 도와 과도 괴로운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책상도 괴로운 것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스마트폰도 괴롭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괴로운 것은 내가 괴로운 것이다. 오온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K
스님은 스마트폰도 괴로움이다.”라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니까야를 번역하고 수많은 대중강연을 한 스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믿기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영상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K스님은 자신이 번역한 상윳따니까야 찬나경에서 일체개고에 대하여 각주를 했다. 스님은 장로수행승들이 찬나에게 일체개고를 설명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물질도알음알이도 괴로움이라면 도도 괴로움이요 과도 괴로움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괴로움을 얻은 비구에 지나지 않는다.”(초불연 상윳따 3327번 각주)라고 오해를 할 것이라고 각주를 해 놓았다. 이렇게 써 놓은 스님이 어떻게 스마트폰도 괴로움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K
스님은 실수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몰라서 한말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H스님은 이렇게 주문했다. “각묵스님은 니까야를 번역하여 한국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분이고 그 만큼 영향력이 크게 끼치고 있는만큼, 이러한 주장은 서둘러 철회되어야 할것이다.”라고.


2023-02-0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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