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업자성정견과 중생중도

담마다사 이병욱 2023. 2. 21. 07:18

업자성정견과 중생중도


중도란 무엇일까? 중도는 가운데 길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중도는 양변에 치우치지 않는 길이다. 양극단을 초월한 것이다. 어떻게 초월하는가? 십이연기로 초월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십이연기 환멸문으로 초월한 것이다.

이 세상을 초월한 것이 중도이다. 욕계의 세상에서 초월하면 무욕에 이를 것이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것이다. 건너 가는 것이 초월이다. 왜 초월이라 하는가? 정신적으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소용돌이 치는 폭류에서 헤엄쳐 건널 수 없다. 뗏목을 엮어 건너야 한다. 가르침의 뗏목이다. 이는 다름아닌 팔정도의 뗏목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는 중도를 팔정도라고 했다. 열반의 언덕으로 이끌어 주는 가르침의 뗏목을 말한다.

양극단은 피해야 한다. 양극단에 치우치면 파멸이다. 극단론자는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한다. 이것만이 진리이면 다른 것은 거짓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극단이다. 대표적으로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를 들 수 있다.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는 양극단이다. 절대 무의 허무주의와 절대 유의 영원주의는 양극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와 같은 양극단을 부수어 버렸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부수었는가? 연기법으로 부수었다.

연기법은 위대하다. 연기법을 모르면 연기법이 위대한 줄 모른다. 연기법이 왜 위대한가? 부처님 당시 유행했던 갖가지 사상을 모두 부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던 갖가지 견해를 연기법으로 부순 것이다.

 


허무주의는 절대 무를 말한다. 죽고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 단멸론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허무주의를 논파했다. 어떻게 논파했는가? 조건 발생하는 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유전연기로 논파한 것이다. 발생을 관찰할 때 허무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영원주의는 절대 유를 말한다. 절대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자아와 이 세상은 영원하다는 견해를 말한다. 영원주의 역시 연기법으로 논파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도 소멸한다."라는 환멸연기로 부수어진다. 소멸을 관찰할 때 영원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 이 세상 어느 것도 단멸하는 것은 없다. 오로지 연기적 흐름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육처의 세상을 말한다. 눈과 귀 등의 여섯 감역의 세상이다. 세상이라 하여 삼라만상 산천초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적 세상이 있다. 불교적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순간순간 일어 났다가 사라지는 세상이다. 한번 볼 때 마다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들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세상은 연기적 세상이다. 조건 발생하는 세상이다.

조건발생하는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우리 몸과 마음은 생멸한다. 오온이 생멸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멸에 진실이 있다는 것이다. 생멸하지 않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개념은 생멸하지 않는다. 자아와 같은 개념을 말한다. 명칭이나 이름처럼 언어적 형성으로 된 것은 생멸하지 않는다. 자아, 사람, 남자, 여자, 창조주와 같은 명칭은 생멸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영원히 존재한다.

생멸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생멸하지 않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 사람, 남자, 여자, 창조주와 같은 명칭은 언어적 개념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생멸하는 오온의 현상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것도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조건발생이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았을 때 시각의식이 생겨나는데 이를 삼사화합이라 한다. 삼사화합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발생된다. 느낌을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난다. 이렇게 연기가 회전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발생이다.

한번 볼 때마다 세상이 생겨난다. 한생각 일으키면 세상이 발생한다. 이런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어느 정도일까?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와 고성제 정형구로 알 수 있다. 세상의 발생은 항상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로 끝나기 때문이다.

누가 세상을 아름답다고 했을까?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이 본질이다. 생멸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아서 괴롭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괴롭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서 괴롭다. 궁극적으로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해서 괴롭다. 그래서 부처님은 팔고를 말했다. 이처럼 괴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몸과 마음은 내것일까? 범부들은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한다. 몸과 마음의 소유권이 실체도 없는 나에게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 제자들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온을 관찰하니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는 것이다. 오온에서 생멸을 본 것이다. 그래서 집착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물었을 때 어떻게 답해야 할까? 본래 부처라고 해야 할까? 나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부처님 제자라면 "나는 오온의 흐름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왜 오온의 흐름일까? 오온이 다발을 이루어 조건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므로 오온은 생멸한다. 조건발생하여 소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십이연기법은 사건과 사건으로 이루어진 열두 가지 고리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일어난다. 십이연기가 그렇다. 조건발생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다발을 이루어 흘러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나에 대하여 오온의 흐름이라고 말한다.

연기법을 알면 세상에 초연해질 수 있다. 오온에 대해서 내것이라고 집착하지 않을 때 마음의 평정과 경안에 이를 것이다. 이는 업자성정견과 관련이 있다.

디가니까야 대념처경(D22)을 보다가 눈에 띄는 문구를 발견했다. 각주에서 본 것이다. 한국빠일리성전협회본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경안(안온)각지와 사(평정)각지에 대한 설명에서 업자성정견이 중도임을 말한 것이다.

업자성정견이 왜 중도일까? 경안각지에 대한 주석을 보면 "중도를 닦는 것: 자기와 타자에 대한 업의 자성(kammassakata)-업을 자기로 삼는 것-을 성찰하는 것이다."(Smv.793)라고 설명해 놓았다. 사각지에 대한 주석을 보면 "뭇삶에 대한 중도인 것: 자기와 타자에 대한 업의 자성(kammassakata)-업을 자기로 삼는 것-과 뭇삶의 비실체성의 성찰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Smv.795-796)라고 설명해 놓았다.

중도란 무엇일까? 이제까지 중도에 대해서 목적론적으로 알고 있었다. 한국불교에서는 중도에 대하여 도달해야 할 목표로 설정해 놓았다. 마치 중도가 깨달음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중도는 초월의 길에 대한 것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이 중도임을 말한다.

중도가 초월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업을 자신의 주인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행위에 대한 과보가 자신의 것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업을 자신의 주인으로 보면 괴로운 세상에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또한 타자의 업도 타자의 주인 것을 반조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경안각지와 사각지에 대해서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업자성정견으로 설명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중도는 거창한 이념이 되었다. 중도는 중생의 삶과도 관련이 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업의 자성을 아는 것이 중도이다. 자타에 대하여 업이 주인이고 자신이 업의 상속자인 것을 아는, 업자성정견이 중도인 것이다. 이를 중생중도라고 해야 할까?


2023-02-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