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법념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2. 26. 08:42

 법념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최근 디가니까야 대념처경을 읽었다. 사념처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법념처이다. 법념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디가니까야를 처음부터 읽고 있다. 이전에는 필요한 것만 읽었다. 글을 쓸 때 필요 문구를 인용할 때 관련부분만 읽어 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심도있게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식의 경전읽기는 도움이 안된다.

경전은 새기며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도 나가듯이 읽어야 한다. 매일 한두페이지라도 꾸준히 읽어야 한다. 무엇보다 새기며 읽어야 한다. 각주까지 빠짐없이 읽어야 한다. 이러다 보니 진도를 빨리 나갈 수 없다.

법념처를 읽고 법념처에 대해서 숙고해 보았다.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는 구분이 뚜렸해서 어떤 것인지 대략 알 수 있다. 그러나 법념처는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법념처를 보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 많다. 오장애, 오온, 육처, 칠각지,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이 중에서 사성제는 디가니까야 대념처경에만 있다. 맛지마니까야 염처경에는 사성제가 없다.

법념처는 무엇일까? 법념처 정형구대로 법에 대해서 법을 관찰한다.(dhammesu dhamm
ānupassī)”(D22. 20)라고 생각하면 될지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법(dhamma)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상 모든 것을 말한다고 봐야 한다. 사념처 중에서 뚜렷하게 구분되어 관찰될 수 있는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법념처의 대상이 된다.

법념처는 현상에 대한 관찰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한국빠일리성전협회(KPTS)본 번역에서는 담마를 '사실'로 번역했다. 일어난 모든 현상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생멸에 대한 것이다.

사념처는 한마디로 생멸에 대한 관찰이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생멸에 대한 관찰이다. 이와 같은 생멸에 대한 관찰이 사념처의 본질이다. 왜 그런가? 생멸을 관찰한다는 것은 실재하는 성품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처는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호흡관찰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들숨과 날숨은 생멸 현상이라는 것이다. 동작을 관찰하는 것도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 된다. 행선할 때 의도와 행위 역시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느낌도 생멸에 대한 것이다. 마음도 생멸에 대한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생멸에 대한 것이다.

생멸을 보아야 실재하는 성품을 본다. 실재하는 성품은 생멸하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빠라맛타, 즉 구경법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쪼갤 수 없는 근본이 되는 법은 생멸하기 때문에 실재하는 법이 된다.

실재가 있다면 비실재도 있다. 실재하지 않는 법도 있는 것이다. 비실재법을 빳냣띠라고 한다. 이는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이다. 이름이나 명칭같은 것을 말한다.

언어적 형성에는 생멸이 없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다. 사람, 남자, 여자, 자동차, 자아, 영혼, 창조주 같은 개념을 말한다. 이름과 모습으로만 존재할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멸이 없어서 영원한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영원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말 했을 때 그런 자아와 세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이름이나 명칭, 모양, 모습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면 차종의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 명칭, 모습, 모양은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이기 때문에 생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비실재라고 하는데 실재하지 않는 것임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실재를 보기 위한 것이다. 개념으로 보지 않고 실재를 보는 것이다. 실재를 보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호흡이다. 이는 신체에 대한 것이다.

호흡관찰은 신념처의 범주에 들어간다. 통증을 관찰한다면 수념처의 범주에 들어간다. 탐욕이나 성냄을 관찰한다면 심념처에 들어간다. 그 외의 것은 모두 법념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사념처 중에서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를 제외한 모든 것은 법념처에 해당된다. 법념처에서는 부처님의 여러 핵심 가르침 중에서도 오장애, 오온, 칠각지, 사성제가 소개 되어 있다.

법을 뜻하는 담마의 쓰임새는 실로 다양하다. 진리, 원리, 가르침, 심지어 ''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포함하여 삼라만상 모든 것이 해당된다. 정신적인 현상도 해당된다. 그래서 말끝마다 "그런 법이여"라며 법을 붙이는 것인지 모른다.

대념처경에서 법념처를 접하면서 법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부처님 가르침으로 법이고, 또 하나는 모든 현상으로서 법 또는 존재일반으로서의 법이다. 부처님 가르침으로서 법은 'Dhamma'이고, 모든 현상으로서의 법 또는 존재일반으로서의 법은 'dhamma'로 구분한다. 차이점은 대문자 D와 소문자 d에 있다.

별을 단 장군이라고 해서 같은 장군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법이라고 해서 같은 법이 아니다. 사성제와 같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는 대문자를 써서 'Dhamma'라고 한다. 그 외 것은 소문자를 써서 'dhamma'가 된다.

담마라고 해서 같은 담마가 아니다. 대념처경 법념처에서의 담마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부처님 가르침으로서 담마(Dhamma)가 있고, 일반 현상으로서의 담마(dhamma)가 있다. 이를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로 구분한다.

법념처에서 부처님이 설한 오장애, 오온, 육처, 칠각지, 사성제는 담마(Dhamma)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담마에 대한 설명을 보면 모두 생멸현상에 대한 관찰임을 알 수 있다. 예를들어, 오장애에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일어 났다면 "나에게는 안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있다."(D22.20)라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생멸의 관찰은 오온, 육처, 칠각지, 사성제에서도 적용된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dhamma)을 관찰하는 것이다.

법념처를 육처관찰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각과 시각대상이 만났을 때 시각의식이 발생하는데 이와 같은 삼사화합촉으로 인하여 느낌이 생겨난다. 이때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된다.

연기의 끝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을 끊으려면 연기가 회전되지 않게 해야 한다.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에 대해서 윤회의 출구라고 말한다.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리면 연기가 회전하지 않게 된다. 더이상 업으로서 태어남은 없게 된다. 윤회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늘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 법 아닌 것이 없다. 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부처님의 담마(Dhamma)와 현상으로서의 담마(dhamma)로 나뉜다. 이를 대문자와 소문자로 구분한다.

법념처에서는 부처님의 담마(Dhamma)와 일반담마(dhamma)가 함께 있다. 그래서 법념처인지 모른다.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하신 오장애, 오온, 육처, 칠각지, 사성제의 가르침은 언어적 형성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담마(Dhamma)는 빤냣띠이다.

빤냣띠는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실재하는 것이다. 개념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누군가 부처님의 가르침(Dhamma)을 기억하고 있다면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부처님 가르침은 빤냣띠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법(dhamma)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 실재하는 법을 관찰하는 것도 부처님 가르침이다.

실재하는 법은 생멸이 있다. 생멸이 있어서 법의 성품을 알 수 있다. 무상, , 무아의 성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성품을 봤을 때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처럼 실재하는 법의 성품을 관찰하는 것이 사념처 수행이다. 그 중에서도 가르침에 대한 법의 성품을 관찰하는 것이 법념처 수행이다.

디가니까야 대념처경을 보면서 법념처에 대해서 숙고해 보았다. 부처님이 왜 법념처를 설했는지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것이다. 그것은 빤냣띠로서 담마(Dhamma)와 빠라맛타로서의 담마(dhamma)에 대한 것이다. 법념처에서는 이 두 가지를 설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그 근거가 되는 경이 대념처경이고 구체적으로는 법념처가 된다. 사띠라고 하여 반드시 수행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고 사유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2023-02-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