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고락중도가 팔정도인 이유는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11. 10:44

고락중도가 팔정도인 이유는
 
 
양극단이 있다. 대표적으로 쾌락과 고행을 들 수 있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과 고행을 즐기는 것은 정반대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를 양극단이라 하여 부정했다.
 
양극단은 왜 문제가 되는가?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는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S56.11)라고 했다. 또한 고행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는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S56.11)라고 했다.
 
쾌락과 고행은 공통적으로 무익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행자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임을 말한다. 여기서 극단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일반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 고행을 추구하는 것은 수행자들이 하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쾌락을 추구하고 자이나교도들과 같은 수행자들은 고행을 추구한다. 이와 같은 양극단은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도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S56.11)라고 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는
 
중도란 무엇일까? 양극단을 떠나 가운데 길로 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는 일반적으로 십이연기를 말한다. 십이연기는 조건발생이기 때문에 양극단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고락중도에 대해서는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S56.11)라고 했다. 고락중도는 팔정도임을 말한다.
 
여러 가지 중도가 있다. 초전법륜경(S56.11)에 실려 있는 고락중도,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 실려 있는 유무중도가 대표적이다. 초전법륜경에서는 고락중도에 대해서 팔정도라고 했고,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는 유무중도에 대해서 십이연기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중도는 공통적으로 연기에 대한 것이다.
 
팔정도가 왜 연기인가? 이는 정견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팔정도의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성제는 고의 원인과 고의 소멸이라는 이지연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팔정도를 닦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명확하게 정의 되어 있다. 부처님은 중도가 팔정도임을 선언하시면서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S56.11)라고 했다.
 
중도는 저언덕으로 가는 것이다. 이는 건너감을 뜻한다. 어떻게 건너가는가? 정신적으로 초월해서 건너 가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에 대하여 ‘초월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극단적 고행에는 어떤 것이
 
니까야를 보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고행에 대한 것도 많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행은 주로 외도들이 행하는 극단적 고행을 말한다.
 
극단적 고행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디가니까야 ‘우둠바라까 사자후의 경’(D25)에 따르면 “니그로다여, 세상에 고행주의자는 벌거벗고, 편의를 거부하고, 손가락을 빨고, 오라는 초대를 거부하고, 머물라는 환대도 거부하고, 제공된 음식을 거부하고,..”(D25)로 시작되는 수십 가지 고행이 있다.
 
부처님은 고행도 해 보았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사자후에 대한 큰 경’(M12)에서도 확인된다. 부처님은 “나의 고통스런 삶은 이와 같았다.”(M12)라며 회상하면서 외도들이 했던 고행을 나열했다. 또한 부처님은 이런 고행에 대하여 “이러한 다양한 방법으로 나는 몸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을 추구했다.” (M12)라고 했다.
 
고행은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몸을 학대하는 것일까? 이는 맛지마니까야 ‘삿짜까에 대한 큰 경’(M36)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 자이나교도 삿짜까는 몸을 학대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을 조복받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행을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것이다. 몸이 괴로우면 마음은 몸에 복종하게 되어 있다. 통증이 심한 자에게 즐거운 느낌이 생겨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몸을 학대하여 과거에 지은 업을 씻어내기 위한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행으로 청정해지기 위함이다.
 
자이나교도들은 몸을 닦는 수행에 열중했다. 그것은 고행을 말한다. 자이나교도들은 몸을 괴롭히는 고행만 할 뿐이지 마음 닦는 수행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이나교도 삿짜까가 보기에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은 마음만 닦는 수행에 열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몸을 닦는 수행과 마음을 닦는 수행
 
어떤 이는 불교에 대하여 마음공부라고 말한다. 유튜브에서 어느 원로스님은 마음공부라는 주제로 법문을 하고 있다. 불교에는 정말 마음공부만 있는 것일까?
 
자이나교도 삿짜까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마음만 닦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불교가 마음만을 공부하는 것이라면 몸을 닦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삿짜까의 비난에 대하여 몸과 마음을 닦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기베싸나여, 어떠한 것이 몸을 닦는 수행이고 마음을 닦는 수행입니까? 이 세상에 가르침을 배운 고귀한 제자는 즐거운 느낌이 생겨나면, 그는 즐거운 느낌을 접촉하여 즐거운 느낌에 애착하지 않으며 즐거운 느낌이 지속되기를 애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그 즐거운 느낌이 소멸합니다.”(M36)
 
 
악기베싸나는 삿짜까의 또다른 이름이다. 먼저 부처님은 몸 닦는 수행에 대하여말했다. 몸을 닦는 수행을 하면 이미 생겨난 즐거운 느낌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몸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관찰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네 가지 관찰수행이 있다.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이 있다. 이 중에서 몸관찰은 느낌관찰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경에서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는 애착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애착하지 않는가? 몸관찰을 하여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즐거운 느낌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이것이 몸을 닦는 수행이다.
 
자이나교도들은 몸을 닦는 수행에 대하여 고행이라고 했다. 그런데 불교에도 몸을 닦는 수행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것이 몸을 닦는 수행인 것이다.
 
자이나교도들에게는 몸 닦는 수행만 있고 마음 닦는 수행은 없다. 그런데 불교에는 몸을 닦는 수행도 있고 마음을 닦는 수행도 있다. 여기서 마음 닦는 수행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즐거운 느낌의 소멸하면 괴로운 느낌이 생겨납니다. 그는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여도 슬퍼하지 않고, 번민하지 않고, 비탄해하지 않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으며,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습니다.”(M36)
 
 
즐거운 느낌은 몸과 관련된 것이고, 괴로운 것은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즐거운 느낌은 몸 수행을 해서 벗어나는 것이고, 괴로운 느낌은 마음 수행을 해서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마음 수행은 괴로운 느낌에 지배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괴로운 느낌은 성냄이나 분노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선정에 들면 사라진다.
 
자이나교도들에게는 몸을 학대하는 고행만 있다. 그러나 불교에는 몸 수행도 있고 마음 수행도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와 같이 쌍방으로, 즉 몸을 닦는 수행을 하는 까닭에 이미 생겨난 즐거운 느낌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며,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한 까닭에 이미 생겨난 괴로운 느낌이 그의 몸을 사로잡지 않는 것입니다.”(M36)라고 했다.
 
수행은 쌍으로 하는 것이다. 몸수행과 마음수행을 말한다. 마음공부한다고 하여 선정수행만 한다면 반쪽 수행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관수행을 해야 한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에 대하여 마음공부라고 말한다면 반쪽짜리 불교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고행으로 수반되는 번뇌를 보면
 
부처님은 쾌락도 무익하고 고행도 무익하다고 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무익한 것은 즐거운 느낌이 오래 가지 않아 무익하다고 볼 수 있다. 고행을 추구하는 삶이 무익한 것은 고행 자체가 괴로운 것이고 또한 고행이 청정한 삶으로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행은 자신의 몸을 학대하여 업을 씻어 내기 위한 것이다. 죄업을 지은 자가 참회하는 의미에서 길을 걷는 것도 일종의 고행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고행자를 보았을 때 사람들은 어쩌면 존경의 눈으로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해탈과 열반이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싫어하여 떠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니까야 도처에서는 염오, 이욕, 해탈의 가르침이 도처에 있다. 한마디로 이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고행하는 것도 싫어하여 떠난다고 말한다.
 
고행을 하면 마음이 평안해질까? 고행으로 인한 번뇌가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행에 의한 싫어하여 떠남에는 여러 가지 오염이 있다.”(D25)라고 했다. 어떤 오염일까? 고행으로 수반되는 번뇌를 말한다.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 고행으로 의도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라고 만족한다.
2) 그 고행으로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폄하한다.
3) 그 고행으로 마취되고 미혹되고 방일에 빠진다.
4) 그 고행으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생겨나면, 그 이득과 명예와 칭송으로 의도하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만족한다.
5) 그 고행으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생겨나면, 고행으로 이득과 명예와 칭송으로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폄하한다.
6) 그 고행으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생겨나면, 고행으로 이득과 명예와 칭송으로 마취되고 미혹되고 방일에 빠진다.
7) 그 고행의 실천으로 음식에 대해서 맛의 분별에 빠진다.
8) 그 고행으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갈망한 나머지 ‘왕들과 왕의 대신들과 왕족들과 바라문들과 장자들과 이교도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9) 고행자가 다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풍요롭게 사는 것에 대하여 경멸한다.
10) 고행자가 다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공경받는 것에 대하여 질투와 시샘을 일으킨다.
11) 고행자가 사거리에 앉는다.
12) 고행자가 자신을 과시하면서 ‘나는 이러한 고행을 한다.’라며 여러 집들을 다닌다.
13) 고행자가 위선을 부리며 거짓말을 한다.
14) 고행자가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들의 법문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15) 고행자가 분노하고 원한을 품는다.
16) 고행자가 위선적이고 무자비하다.
17) 고행자가 질투하고 인색하다.
18) 고행자가 기만하고 속인다.
19) 고행자가 완고하고 교만하다.
20) 고행자가 사악한 것을 원하고 사악한 자가 원하는 대로 한다.
21) 고행자가 잘못된 견해를 갖추고 극단적인 견해를 지닌다.
22) 고행자가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여 완고하게 지키고 버리기 어렵다.
 
이상 22가지 고행의 오염을 보면 고행이 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고 무익한 것인 것 알 수 있다. 고행으로 인하여 수반되는 번뇌가 바로 고행의 오염인 것이다.
 
수행자에게 최상의 자만이 있는데
 
출가자는 고행자가 되기 쉽다. 남들이 하지 않는 극단적인 고행을 했을 때 부수적으로 얻는 것도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네 번째 항을 보면 “그 이득과 명예와 칭송으로 의도하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만족한다.”(D25)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고행자의 자만 또는 수행자의 자만에 해당된다.
 
수행자에게 자만이 있다. 그것은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우월적 자만이다. 그런데 우월적 자만 중에서도 우월적 자만이 있다. 이는 아홉 가지 자만 중에서 최상위에 해당되는 자만이다. 어떤 자만인가?
 
자만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우월적 자만, 동등적 자만, 열등적 자만을 말한다. 각 자만에는 또 다시 우월적 자만, 동등적 자만, 열등적 자만이 있는데 모두 합하면 아홉 가지 자만이 있다. 이 중에서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최상의 자만이 된다.
 
최상의 자만은 두 가지 케이스가 있다. 출가자의 경우 “계행-두타행 등을 통해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며 교만을 만든다. 재가자의 경우라면 “내가 오계를 지키고 팔계를 지키고 포살일을 준수하는데 나 같은 자 있으랴?”라는 자만을 만든다.
 
출가자의 자만은 고행자의 자만이 되기 쉽다. 출가자자 고행을 했을 때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자만하는 것이다. 이는 “나는 이러한 고행을 한다. 나는 이러한 고행을 한다.”(D25)라며 말하고 다니는 것과 같다. 이런 자만을 고행에 수반되는 번뇌, 즉 고행의 오염이라고 말한다.
 
고락중도가 팔정도인 이유는
 
부처님은 양극단을 버리라고 했다.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실천하라고 했다. 그런데 양극단에는 쾌락과 고행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쾌락과 고행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쾌락과 고행은 양극단이다. 양극단은 팔정도의 실천으로 극복될 수 있다. 그래서 팔정도를 중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팔정도의 실천은 다름 아닌 수행이라는 것이다. 어떤 수행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몸수행과 마음수행을 말한다.
 
어떤 이들은 불교를 마음공부라고 말한다. 유명스님도 이렇게 말한다. 불교가 단지 마음공부에 지나지 않다면 반쪽짜리 불교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는 마음공부뿐만 아니라 몸공부도 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몸공부는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른바 사념처 수행을 말한다. 팔정도에서 정념에 해당될 것이다. 불교에서 마음공부는 사마타수행에 대한 것이다. 팔정도에서 정정에 해당된다. 이렇게 본다면 고락중도가 팔정도임에 틀림없다.
 
 
악기베싸나여, 몸을 닦는 수행을 하는 까닭에 이미 생겨난 즐거운 느낌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며,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한 까닭에 이미 생겨난 괴로운 느낌이 그의 몸을 사로잡지 않는 것입니다. 악기베싸나여,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와 같이 쌍방으로, 즉 몸을 닦는 수행을 하는 까닭에 이미 생겨난 즐거운 느낌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며,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한 까닭에 이미 생겨난 괴로운 느낌이 그의 몸을 사로잡지 않는 것입니다. 악기베싸나여, 이와 같은 것이 몸을 닦는 수행이고 마음을 닦는 수행입니다.”(M36)
 
 
2023-03-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