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신통의 기적이란?
신통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에는 수많은 신통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신통이나 초월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무조건 기피한다.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신화적인 이야기도 기피한다. 그러다 보니 수용하는 경은 얼마 되지 않는다. 염처경과 같은 수행에 대한 경이 고작일 것이다.
신통을 비난하는 자는 신통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까야를 읽지 않는 자가 니까야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 신통을 비난하는 자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해 주어야 할까?
신통을 믿지 않는 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네 번째 선정에 들어서 신통을 체험해 보십시오.”라고 말하면 된다. 신통은 네 번째 선정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고 한다.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돋보기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과 같다. 햇볕이 있을 때 돋보기를 나무판에 포커스를 맞추면 연기가 나며 타기 시작한다. 어느 것이든지 집중하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신통은 마음을 집중했을 때 일어난다. 흔히 말하는 신통이 있다. 경에서는 “마음이 삼매에 들었을 때 다양한 신통을 체험합니다.”(D28)라고 했다. 어떤 신통을 말하는 것일까?
신통의 정형구가 있다. 이는 경에서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되고,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자유로운 공간처럼 장애 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벽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하고, 물속처럼 땅속을 드나들고, 땅 위에서처럼 물 위에서도 빠지지 않고 걷고, 날개 달린 새처럼 공중에서 앉은 채 날아다니고, 그는 손으로 이처럼 큰 신비를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고,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력을 미칩니다.”(D28)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마치 손오공의 신통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경에서는 이런 신통에 대하여 범부의 신통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신통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고귀하지 못한 신통과 고귀한 신통을 말한다. 고귀하지 못한 신통은 범부의 신통을 말한다. 이는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되고,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라는는 신통을 말한다.
범부의 신통은 오래 가지 못한다. 욕심을 일으키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신기가 있어서 개업을 한 무당이 시간이 지날수록 예지력 등 신통이 사라지는 것은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길거리에서 무당에 대한 간판을 보면 이제 갓 신기를 얻었음을 강조하는 문구를 볼 수 있다.
데바닷따는 부처님을 살해하여 스스로 부처가 되고자 했다. 먼저 데바닷따는 아자따쌋뚜를 교사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신통으로 마음을 얻었다. 율장에 따르면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왕자의 모습을 나투어 뱀허리띠를 착용하고 왕자 아자따쌋뚜의 무릎에 나타났다.”(Vin.II.185)라고 했다.
악인의 대명사 데바닷따의 신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는 데바닷따가 ‘내가 수행승들의 참모임을 이끌겠다.’라고 이러한 마음이 생겨남과 동시에 신통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범부의 신통은 사라지기 쉽다.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바라는 마음이 생겨남과 동사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범부의 신통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간난아기처럼 다루기 어렵고 사소한 것에 따라 부서진다.”(Vism.3.56)라고 했다. 또한 신통은 통찰에 방해가 된다고 했다.
신통은 삼매에서 일어난다. 이는 청정도론 제12장 신통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앞서 언급된 범부신통의 정형구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되고,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자유로운 공간처럼 장애 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벽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하고, 물속처럼 땅속을 드나들고, 땅 위에서처럼 물 위에서도 빠지지 않고 걷고,..”등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귀한 신통은 무엇일까?
부처님은 고귀한 신통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말했다. 그 중에 첫번째 것을 보면“만약에 혐오스런 것에서 혐오스럽지 않은 것을 지각하길 원한다면, 그때에 혐오스럽지 않은 것을 지각합니다.”(D28)라고 말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혐오스러운 것에서 혐오스럽지 않은 것을 지각한다면 이런 것도 신통이라고 했다. 하늘을 날아 다니는 것만이 신통이 아님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어떻게 혐오스럽지 않은 것을 지각하는가? 혐오스러운 뭇삶에 대하여 자애를 가득 채우고, 제행에 대하여 여러 요소로 구성되어있다는 지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어떻게 혐오스런 것에서 혐오스럽지 않은 것을 지각하는가?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자애를 가득 채우거나 혹은 요소의 세계로 관찰하는 것이다.”(Smv.895)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냈을 때 이를 신통이라고 했다. 신통이라 하여 반드시 하나가 둘이 되는 등의 신통이 아님을 말한다. 싫어하는 자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냈을 때 세상에 어떤 신통보다 더 극적인 변화를 보일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미워하는 자나 증오하는 자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원수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낸다는 것은 자애수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 자애의 마음을 냈을 때 자심해탈, 즉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룰 것이다. 이를 부처님은 고귀한 신통이라고 했다.
고귀한 신통 두번째 것은 부정관에 대한 것이다. 이는 “만약에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서 혐오스러운 것을 지각하길 원한다면, 그때에 혐오스러운 것을 지각합니다.”(D28)라는 가르침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혐오스럽지 않은 뭇삶에 대하여 부정하다는 지각을 가득 채우고, 제행에 대하여 무상하다는 지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어떻게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서 혐오스러운 것을 지각하는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하여 부정을 가득 채우거나 혹은 무상하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Smv.895)
좋아하는 대상에 부정관과 무상관을 닦으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대상에 대하여 부정관과 무상관 수행을 하면 해탈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해탈에 이르게 되었을 때 바로 이런 것을 신통이라고 했다. 하나가 둘이 되는 등의 범부의 신통과는 다른 부처님 제자의 고귀한 신통을 말한다.
고귀하지 못한 신통과 고귀한 신통이 있다. 똑같이 마음을 집중하여 삼매의 상태가 되어 신통을 경험한다. 두 신통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변화가 일어났다면 고귀한 신통이 된다. 범부에서 성자가 되었을 때 이를 신통의 기적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2023-03-2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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