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맛의 갈애로 인한 불평등의 기원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16. 09:52

맛의 갈애로 인한 불평등의 기원



또다시 새벽이다. 새벽에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이런 생각을 놓칠 수 없다. 달아나기 전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 글로 써서 꽁꽁 붙들어 매어 두어야 한다.

사람은 발전이 있어야 한다.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이 되어야 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을 것이라면 변화가 없다. 아니 퇴보하고 말 것이다. 머리가 흰 사람이라면 나이만 먹은 늙은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제 보다 나은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찰이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사유가 있는 삶이다. 새벽에 사유하면 성찰 있는 삶이 된다. 사유한 것을 글로 옮기면 최상이다.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제 보다 다른 삶이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똑같은 글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경전에 바탕을 둔 글을 쓴다면 어제와 다른 오늘이 된다.

지금 시각은 5 5분이다. 4 50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잠에서 깼을 때 좋은 생각이 일어 났는데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경전에서 본 것과 유튜브에서 본 것을 합하면 좋은 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암송과 좌선과 행선을 생략하고 곧바로 엄지치기에 돌입했다.

요즘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다. 머리맡에 놓고 읽는다. 진도는 많이 나가지 않는다. 새기면서 읽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많다. 영화 대사에서 간혹 기억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과 같다.

디가니까야를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말을 발견 했다. 나중에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분홍색 형광메모리칠을 해 놓았다. 그 말은 그 당시에 비법이었던 것이 지금은 정법이 되었다.”(D27.13)라는 말이다. 디가니까야 '세계에 대한 기원의 경'(D27)에서 성접교섭과 생활단락에 있는 말이다.

불교에도 창세기에 해당되는 경이 있다. 대표적으로 디가니까야 세계에 대한 기원의 경’(D27)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전륜왕 사자후의 경’(D26)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유일신교의 창세기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창조의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업력에 의해서 성주괴공하는 것이다.

불교의 창세기라 볼 수 있는 아간냐경(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D27)을 보면 인간의 역사는 타락의 역사이다. 왜 그런가? 신의 위치에서 인간으로 강등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제도는 신의 타락에 타락을 거쳐서 형성된 것이다. 사성계급이 대표적이다.

아간냐경을 보면 세상의 탄생뿐만 아니라 남녀의 탄생도 묘사되어 있다. 분명한 사실은 여기에 창조주는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는 것과 다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 설명으로 되어 있다.

남녀의 탄생에 대한 것을 보면 쌀과 관련이 있다. 근본적으로는 맛과 관련되어 있다. 신적 존재였던 중생이 어느 때 새로 형성된 세상에 화생하게 되었는데   마치 쿠키처럼 생긴 땅조각을 맛보자 맛에 대한 갈애가 생겨난 것이다. 마치 바이블에서 사과를 따 먹은 것과 같다.

중생이 땅조각을 맛보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 뭇삶들의 스스로 빛나던 광명은 사라졌다.”(D27.8)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신적 존재에서 동물적 존재로 강등되었음을 말한다.

경에서 신적존재는 특징이 있다. 이는 경에서 그들은 거기서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며,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랜세월을 산다.”(D27.5)라고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신적 존재는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선정과 관련이 있다. 색계와 무색계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아울러서 범천(梵天)이라고 한다. 브라흐마(Brahma)를 말한다. 한국빠일리성전협회에서는 브라흐마를 하느님으로 번역했다.

불교에 색계천상이 있다. 선정수행을 하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색계천상은 감각적 욕망이 없는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것이다. 미세한 물질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빛일 것이다. 이는 경에서 스스로 빛을 낸다라고 묘사된 것에서 알 수 있다.

경에서 언급된 천상의 존재가 있다. 이를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라고 했다. 이는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색계 2선천에 해당되는 극광천이다. 빠알리어로 아밧사라(abhassara)라고 하는데 수명은 8겁이다.

극광천 천신들은 기쁨을 먹고 산다고 했다. 이는 색계 2선천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명상을 해서 2선정에 들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경전에서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와 숙고를 여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S45.8)라는 정형구로 나타난다.

불교에서 하느님 세계, 즉 범천은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색계 초선천을 마하브라흐마라고 하는데 한역으로는 대범천이라 번역된다. 이를 한국빠일리성전협회에서는 하느님으로 번역했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수많은 하느님이 있다. 색계와 무색계 존재는 모두 하느님이 된다. 그런데 하느님도 등급이 있다는 것이다. 주로 수명에 의해 구분된다. 84천겁을 사는 비상비비상처천에서 부터 고작 1겁을 사는 대범천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세계는 주기적으로 파괴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생겨난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세계도 그렇다. 한번 형성되었다고 해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때가 되면 소멸하게 되어 있다. 이 세계도 다르지 않다.

괴겁기가 되면 색계 초선천까지 파괴된다. 앙굿따라니까야 일곱 개의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A7.66)을 보면 수명이 1겁인 대범천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마치 기름이 타면 검댕이를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처럼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은 왜 주기적으로 파괴되는 것일까? 유일신교에서는 창조주의 심판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업의 작용으로 본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탐욕이 치성할 때 색계 초선천까지 불에 의해 파괴되고, 성냄이 치성할 때 2선천까지 물에 의해 파괴되고, 어리석음이 치성할 때 3선천까지 바람에 의해서 파괴된다고 했다.

천상중에서도 안전한 천상이 있다. 색계 4선천과 무색계천상을 말한다. 이 중에서 최상은 어떤 천상일까? 수명이 84천겁인 비상비비상처천일까? 그렇지 않다. 최상의 천상은 정거천이다.

정거천은 색계 4선천에 있는 천상으로 불환자, 즉 아나함만 갈 수 있는 곳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불환자가 되었을 때 정거천에 태어나는데, 그곳에서 수명대로 살다가 완전한 열반에 든다.

색계 4선천은 괴겁기에도 파괴되지 않는다. 색계 3선천까지 파괴 되기 때문에 4선천은 안전한 곳이다. 더구나 정거천 존재들은 완전한 열반이 보장되어 있다. 정거천에 태어나면 다시는 태어날 일이 없는 것이다. 아나함과의 성자들만 갈 수 있는 최상의 천상이다.

정거천을 제외한 천상의 존재는 윤회할 수밖에 없다. “빛나던 범천도 돼지 우리에서는 꿀꿀거린다.”라는 미얀마 속담이 있다. 선정수행을 해서 그 선정단계에 적합한 천상에 태아났다고 할지라도 수명이 다하면 어떤 세계에 태어날지 모른다.

아간냐경에서는 색계2선천의 존재가 한단계 아래에 색계 초선천에 태어난 것을 묘사하고 있다. 성겁기가 되었을 때 세계가 생겨난 것이다.

복과 수명이 다한 하느님(梵天)이 세상이 시작될 때 텅 빈 곳으로 강등되어 내려 왔다. 화생해서 보니 오로지 자신 밖에 없었다. 이후 강등되어 화생한 자가 생겨나자 가장 먼저 온 자가 창조주가 되었다. 나중에 온 자는 피조물이라 여기게 되었다.

빛나던 하느님들은 맛을 알게 되자 타락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를 엄습했다.”(D27.7)라고 묘사되어 있다.

한번 맛을 보면 잊을 수 없다. 식도락가들은 맛을 못 잊어 여러 시간 걸려도 차를 타고 간다. 성겁기에 신적 존재가 맛을 알게 되었을 때 변화가 일어 났다. 빛나던 몸이 사라졌다. 빛으로 이루어진 몸이었을 때는 날아 다녔다. 그런데 땅조각 쿠키를 맛 보았을 때 더 이상 날아다니지 못하게 된 것이다. 왜 그럴까? 먹이를 소화시킬 수 있는 내장기관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색계존재는 내장기관이 없다. 장기가 없다는 것은 음식을 먹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먹고 살까? 경에 따르면 기쁨을 먹고 지내며”(D27.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선정수행에서 2선정 상태를 말한다. 이는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S45.8)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빛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쁨을 먹고 살던 천상의 존재가 맛을 알게 되자 타락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것을 먹거리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아 오랜 세월을 보낼수록, 바쎗타여, 그렇게 해서 더욱더 그들의 몸은 거칠게 되어 아름답고 추한 것을 드러냈고, 어떤 뭇삶들은 잘 생기고 어떤 뭇삶들은 못생기게 되었다.”(D27.10)


맛에 대한 갈애가 생겨나면 날수록 몸은 점점 무거워져 갔다. 그리고 몸은 점점 거칠어져 갔다. 용모 또한 점차 추해져 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미추(美醜)의 구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맛의 갈애로 인해 불평등이 초래된 것이다. 이는 세상의 생겨남과 관련이 있다.

맛의 갈애로 인하여 세상이 생겨났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바쎗타여, 그 뭇삶들이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한덩어리씩 깨어서 먹자, 바쎗타여, 그 뭇삶들의 스스로 빛나던 광명은 사라졌다. 스스로 빛나던 광명이 사라지자 달과 태양이 나타났다. 달과 태양이 나타나자 별자리와 별빛이 나타났다. 별자리와 별빛이 나타나자 밤과 낮이 나타났다. 밤과 낮이 나타나자 한 달과 보름이 나타났다. 한 달과 보름이 나타나자 계절과 일 년이 나타났다. 바쎗타여, 이와 같이 세상은 다시 생성된다.”(D27.8)


이것이 불교의 창세기이다. 조물주가 있어서 세상과 만물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맛의 갈애로 인하여 세상이 생겨난 것이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고와 고의 소멸이었다. 세상이 유한한지 무한한지에 대해서 의문하는 것에 대해서는 희론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세계의 기원에 대해서 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의 불평등에 대해서 알리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은 차라리 세계의 불평등에 대한 기원의 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은 이분법이 지배하고 있다. 진선미(眞善美)가 있다면 위악추(僞惡醜)가 있는 것이다. 진선미와 위악추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신이 만든 것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갈애가 만든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맛에 대한 갈애로 진선미와 위악추가 생겨난 것이다. 이는 최초 땅조각 쿠키를 맛 본 사건에서 비롯된다.

천상의 존재는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또한 천상의 존재는 기쁨을 먹고 살기 때문에 내장 기관이 없다. 아주 미세한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서 하늘을 날아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맛을 알게 되자 이것저것 먹게 되었다. 그에 따라 먹이를 소화시킬 수 있는 장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여기 날지도 못하는 새가 있다. 오세아니아에서 천적이 없는 화식조는 먹이가 풍부한 땅에서 살다 보니 날아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몸이 비대해져서 날개가 있어도 날지도 못하는 새가 된 것이다. 맛에 대한 갈애 때문이다. 천상의 존재도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 났을 때 날아 다니지 못했다.

몸에 소화기관이 있으면 몸이 무거워진다. 몸이 무거우면 날아 다닐 수 없다. 천상의 존재가 그랬다. 천상의 존재는 맛에 대한 갈애가 생기자 땅에서만 살아야 했다. 마치 화식조와 같은 운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맛의 갈애에 대한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몸이 무거워지고 거칠어 진 것이다. 용모도 추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미추의 분별이 생겨났다.

맛에 대한 갈애는 마침내 남녀 구분이 생겨나게 했다. 경에서는 남녀의 특징이 나타나게 된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바쎗타여, 그 뭇삶둘은 경작하지 않고도 여무는 쌀을 먹으면서 그것을 먹거리로 삼고 오랜 세월을 보낼수록, 바쎗타여, 그럴수록 더욱 더 그들의 몸은 거칠게 되어 아름답고 추한 것을 드러냈고, 여자에게는 여자의 특징이 나타나고 남자에게는 남자의 특징이 나타났다.”(D27.12)


유일신교 바이블에서는 창조주가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경전에는 일체 그런 말이 없다. 맛에 대한 갈애 때문에 미추가 생겨나고 남녀가 구분 되었다고 말한다.

아간냐경, 즉 세계에 대한 기원의 경을 읽어 보면 천상의 존재가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신적 존재가 사람이 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 맛에 대한 갈애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상은 갈애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맛에 대한 갈애는 욕망에 대한 갈애와 같다. 그런데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점점 타락된다는 것이다. 마치 엔트로피 법칙을 보는 것 같다.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자식도 내버려 두면 불량학생이 된다. 회사를 관리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도산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맛의 갈애로 인하여 욕망의 세월을 살았을 때 타락할 것이다. 사람의 역사가 그렇다.

경에 따르면 사람의 역사는 퇴보의 역사이다. 마침내 남녀가 생겨났을 때 그들은 성적교섭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짐승같은 놈아, 꺼져라! 어찌 뭇삶이 뭇삶에게 그럴 수가 있는가?”(D27.12)라고 말했다. 성적교섭은 짐승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성적교섭이 일반화 되었을 때 이에 대하여 그 당시에 비법이었던 것이 지금은 정법이 되었다.”(D27.13)라고 했다.

아간냐경은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이라기 보다는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경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경에서는 포커스를 사성계급에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도에서 사성계급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아간냐경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쌀과 관련이 있다. 더 근원적으로는 맛의 갈애와 관련 있다. 맛을 알게 됨에 따라 쌀이 생겨 났는데 쌀로 인하여 다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오계 중에 불투도(不偸盜)가 있다. 주지 않는 것을 가져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게으른 자들은 남의 쌀을 빼앗아 갔다. 그에 따라 오계를 어기는 자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계를 어기는 자들을 다스릴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힘 센 사람을 관리자로 정했다. 그에게 쌀을 주고서 치안을 담당해 달라고 했다. 이것이 무사계급의 출현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가 꾸짖어야 할 자를 바르게 꾸짖을 수 있고, 비난해야 할 자를 바르게 비난할 수 있고, 추방해야 할 자를 바르게 추방할 수 있는 한사람을 선정하면 어떨까?”(D27.16)


이른바 왕의 출현이다. 왕이 처음부터 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왕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추천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많은 사람에 의해 뽑힌 자이기 때문에 마하삼마따, 마하삼마따라는 첫번째 칭호가 생겨났다.”(D27.16)라고 했다.

왕권신수설이 있다. 왕조시대 때 통용되던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왕권은 위임된 것이다. 오늘날 투표로 통치자를 뽑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변질 되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고대인도에서 사성계급은 필요에 따라 발생되었다. 처음부터 사성계급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후대로 내려갈수록 고착되었을 때 그 당시에 저열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이 지금은 최상의 것이 되었다.”(D27.17)라고 말한 것이다.

흔히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디가니까야 세계에 대한 기원의 경을 읽어 보면 역사는 퇴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신적 존재에서 사람으로 타락한 것을 말한다. 그 근원은 맛에 대한 갈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현재 욕계에 살고 있다. 욕계는 감각적 욕망의 세계를 말한다. 감각적 욕망이 없는 세계도 있을 것이다. 색계와 무색계에는 감각적 욕망이 있을 수 없다. 초선정의 형성조건을 보면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난 뒤”(S45.8)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락하면 얼마나 망가질까? 놀랍게도 디가니까야 전륜왕 사자후의 경’(D26)에 내용이 실려 있다. 인간의 수명이 10세 이르렀을 때 ‘5살 소녀가 결혼 적령기가 된다라든가, ‘십선행은 완전히 사라지고 십악행만 남는다라는 것 등 10가지로 설명해 놓았다.

인간이 말세가 나타나면 증조가 있다. 그것은 점차 짐승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수명이 10세가 되었을 때 그들은 서로 짐승의 지각을 얻게 되어, 날카로운 무기들이 그들의 손마다 생겨날 것이다. 그들은 날카로운 무기로 이 놈은 짐승이다. 이 놈은 짐승이다.’라고 하면서 서로 목숨을 빼앗는다.”(D26.29)라고 했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 지금 후퇴해 보이는 것 같아도 일보후퇴이보전진으로 보아 진보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가만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역사에도 엔트로피법칙이 작동되는 것이다.

욕계세상은 내버려 두면 짐승의 세계가 된다. 이는 디가니까야 전륜왕 사자후의 경’(D26)에서 알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맛의 갈애로 불평등의 역사가 되었다. 이는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으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욕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외 다른 방법은 없다.

엄지치기 하다 보니 8 26분이 되었다. 4 50분부터 엄지치기 시작했으니 무려 3시간 36분을 쉬지 않고 쓴 것이다. 그러나 조금도 피곤하지 않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을 위하여.


2023-03-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