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조련사가 되어야
인생은 깨달음의 연속이다. 나이가 듦에 따라 지혜도 생겨나는 것 같다. 아둔한 자라도 삶에서 산전수전을 겪고 나면 지혜가 생겨난다.
인생을 시기별로 구분할 수 있다. 유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가 될 것이다. 생물학적 구분이다. 중국에서는 약관, 불혹, 지천명, 이순 등으로 구분했다.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열 단계로 구분했다.
1) 유아적 십년(0-10세)
여리고 불안정한 아이
2) 유희적 십년(11-20세)
그는 많은 유희를 즐긴다.
3) 미모적 십년(21-30세)
그에게 미모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4) 체력적 십년(31-40세)
힘과 기력이 크게 생겨난다.
5) 지혜적 십년(41-50세)
그에게 지혜가 잘 확립되는데,
선천적으로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도 이 시기에 지혜가 조금이나마 생긴다.
6) 퇴행적 십년(51-60세)
그에게 유희, 미모, 체력, 지혜가 퇴행한다.
7) 경사적 십년(61-70세)
그에게 신체가 앞으로 기울어진다.
8) 타배(駝背)적 십년(71-80세)
그에게 신체가 쟁기처럼 굽어버린다.
9) 노망적 십년(81-90세)
그는 몽매하게 되어 하는 것마다 망각한다.
10) 와상적 십년(91-100세)
백세를 먹은 자는 대부분 누워서 지낸다. (Vism.20.51)
여기서 주목하는 단계가 있다. 5단계인 '지혜적 십년(41-50세)'을 말한다. 이 단계가 되면 "선천적으로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도 이 시기에 지혜가 조금이나마 생긴다."라고 했다. 이런 지혜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가 집필했던 때는 5세기였다. 5세기 스리랑카에서 사람들의 삶을 자세히 관찰했을 것이다.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둔한 자도 나이가 40대가 되면 조금이나마 지혜가 생겨난다고 했는데 이는 생활의 지혜, 생존의 지혜에 해당될 것이다. 파종시기를 아는 것과 수확의 시기를 아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청정도론은 고주석을 바탕으로 저술된 것이다. 인도 대륙에서 주석가들이 경전을 주석해 놓은 것을 기반으로 해서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은 경전의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이다.
청정도론에서는 단계적 지혜가 소개되어 있다. 계, 정, 혜 삼학에 따른 것이다. 특히 혜학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칠정정에서 혜학에 대한 것은 다섯 청정이나 된다.
청정도론에서 혜학은 단계적으로 계발된다. 어느 한순간에 꿰뚫음은 없다.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물질과 정신이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견해청정, 의심청정, 도비도청정, 행도지견청정, 지견청정 단계로 진행된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지혜의 단계가 있다.
청정도론은 니까야를 근거로 하고 있다. 칠청정은 맛지마니까야 ‘파발수레의 경(M24)’을 근거로 한다. 파발마를 역참마다 갈아타는 비유로 설명되어 있다. 마치 릴레이하듯이 지혜가 성숙되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의 지혜와 생활의 지혜는 다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자의 삶의 지혜 또는 생존의 지혜와 다른 것임을 말한다. 혜학은 근원적인 지혜에 대한 것이다. 본질에 대한 것이다. 궁극의 지혜에 대한 것이다. 칠청정은 궁극적으로 열반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그것은 물질과 정신의 소멸이다.
어떤 이는 열반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표출한다. 죽어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불교인이 아닐 것이다. 설령 불교인이라 할지라도 무늬만 불교인일 가능성이 크다. 열반을 죽음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열반이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정의를 내릴 수 있다.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정신과 물질이 소멸하는 상수멸의 상태, 탐진치의 소멸의 상태, 그리고 죽음과 함께하는 완전한 열반을 말한다. 이 중에서 탐진치의 소멸에 주목한다. 이는 지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탐, 진, 치가 죄악인줄 모른다. 그러나 천수경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신심있는 불자가 조석으로 독송하는 천수경 참회게를 보면 알 수 있다.
천수경 참회게는 열 가지 중죄를 다루고 있다. 신, 구, 의 삼업에 대한 것이다. 몸으로 지은 것은 살생 등으로 세 가지이다. 말로 지은 것은 거짓말 등 네 가지이다. 마음으로 지은 것은 탐욕 등 세 가지이다. 그런데 천수경에서는 열 가지 죄업에 대해서 중죄라고 했다. 탐, 진, 치 삼업도 살생하는 것과 동등하게 여기는 중죄임을 말한다.
천수경에서 탐, 진, 치는 중죄이다. 악처에 떨어질만큼 중한 죄이다. 그런데 니까야에서도 십악행이라 해서 똑같이 중죄로 보고 있다. 다만 열 번째 항목이 다르다. 천수경에서는 치암중죄라 하여 어리석음이라고 했으나 니까야에서는 견해라고 했다. 사견을 갖는 것을 중죄로 보는 것이다. 외도의 견해를 말한다. 어느 정도인가? 육무간업 중의 하나로 설명된다.
불자들은 오무간업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하나가 더 있어서 육무간업이 있다. 이는 1) 어머니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2)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3) 아라한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4) 나쁜 의도를 가지고 여래의 피를 흘리게 한 경우, 5) 승가를 분열시키는 경우, 6) 견고한 사견을 지니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이와 같이 육무간업을 지으면 한우주기에서도 구제 받지 못하는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한다.
육무간업은 테라와다불교 삼경중의 하나인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서도 발견된다. 경에서는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Cha cābhiṭhānāni abhabbo kātuṃ)”(Stn.231)라고 했다. 육무간업이 중죄임을 말한다.
육무간업 중에서 여섯 번째 견고한 사견에 주목한다. 어떤 사견인가? 이는 부처님이 "그는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다른 스승을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분명히 안다.”(M115)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외도의 견해를 갖는 것이 중죄라는 것이다.
외도의 견해를 갖는 것이 왜 중죄일까? 한번 사견에 빠지면 구원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정견을 가져야만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견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임종직전이라도 사견을 버린다면 무간업에서 벗어날 것이기 때문에 무간지옥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탐, 진, 치 삼독을 멀리하라고 말한다. 탐, 진, 치 삼독을 멸하면 열반의 상태가 될 것이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도 열반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유여열반이라고 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무위상윳따에서는 “수행승들이여, 무위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무위라고 한다.”(S43.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탐, 진, 치가 중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욕심내고 성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듯이, 욕망으로 사는 것을 당연시 하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어쩌면 감정에 충실한 삶이라 볼 수 있다. 본능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동물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즘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다. 며칠전 본 것 중에 인상적인 게송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결박과 속박은
뛰어넘기 힘든 악마의 구속이었습니다.
마치 코끼리가 여러 겹의 밧줄을 끊듯 자르고
그들은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로 뛰어넘어 갔습니다."(D21.10)
여기서 코끼리는 본능을 상징한다.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식욕과 성욕과 같은 본능을 말한다. 마치 두뇌에서 간뇌같은 것이다. 원시적이고 동물적 뇌를 말한다. 마치 내 몸안에 코끼리가 한마리 사는 것과 같다.
코끼리는 덩치가 엄청나게 크다. 그런데 인간은 코끼리 위에 타고 있는 존재와 같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성과 코끼리라는 본능이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뇌구조에서도 파악된다. 인간은 동물적 본능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이 있다. 감성은 본능적이고 동물적이다. 그래서 코끼리 한마리를 키우고 있는 것과 같다. 한번 탐욕의 불이 붙으면 끄기 힘든 것도 내 몸안에는 코끼리처럼 거대한 동물이 있어서 이성의 힘으로는 제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은 닦는 것일까? 거울처럼 본래 깨끗한 마음이 있어서 닦으면 깨끗해지는 것일까? 인간은 코끼리 등 위에 탄 자이기 때문에 마음을 닦는다기 보다는 제어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래서 법구경 찟따박가(마음의 품)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을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잡는다.
마치 활제조공이 화살을 바로 잡듯.” (Dhp.33)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
악마의 영토는 벗어나야 하리.” (Dhp.34)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지만,
지극히 보기 어렵고 미묘한 마음을
현명한 님은 수호해야 하리.
마음이 수호되면, 안락을 가져온다.” (Dhp.36)
법구경 마음의 품에서 마음을 닦는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제어한다는 말은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들은 코끼리 등 위에 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니까야에서는 코끼리 조련사가 코끼리를 조련하듯이 마음을 다스려야한다고 했다.
탐, 진, 치는 본능이다. 우리 몸안에 있는 코끼리 같은 것이다.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 발정난 코끼리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의 쾌락에서 재난을 보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벗이여,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메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크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S1.20)
머리가 칠흑같이 젊은 나이에 출가한 새내기 수행승이 말한 것이다. 악마 빠삐만이 콜록거리며 늙은 바라문으로 변신해서 "수행승이여,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시오.”(S1.20)라고 말한 것에 대한 답신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재난을 아는 것은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보통사람들은 이런 지혜에 도달하지 못한다. 감각은 즐기라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타종교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신의 피조물은 욕망을 즐겨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을 봤다. 마치 눈이 있어 보듯이, 감각이 있어서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감각기관은 창조주가 준 선물이기 때문에 마음껏 즐겨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감각을 즐기면 재난이 초래된다고 했다. 감각은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려야 함을 말한다.
누구나 코끼리 한마리씩 키우고 있다. 코끼리 하자는 대로 하면 감각적이고, 감성적이고, 본능적인 삶을 살게 된다.
코끼리는 다스려야 한다. 그리고 제어해야 한다. 힘으로는 코끼리를 제압할 수 없기 때문에 알아차려야 한다. 사띠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는 것이다. 감각을 추구하면 재난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무리 아둔한 자라도 나이를 먹으면 지혜가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삶의 과정에서 획득된 생활의 지혜 또는 생존의 지혜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지혜는 무상, 고, 무아의 지혜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여 그것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통찰하는 것이다. 오온의 현상을 통찰하면 당연히 탐, 진, 치를 뿌리로 하는 번뇌는 소멸될 것이다. 몸과 마음 속에 있는 코끼리를 제압하는 자가 된다. 코끼리 조련사가 되는 것이다.
2023-02-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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