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여인 대처법 네 가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18. 07:26

여인 대처법 네 가지


인터넷에 글 쓰는 것도 허물이 되는 것 같다. 글이 어떤 이에게는 불편한 것 같다. 글이 길다고 멘트를 달았을 때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며칠전 글이 너무 길다고 불평한 사람이 있었다. 이에 "글이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라고 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글이 길어서 불편하게 했다면 그 마음을 헤아려 누그러뜨려 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글이 길어서 충고받는 경우도 있다. 글이 길다는 것은 글 쓰는 시간도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A4로 폰트 사이즈 12로 하여 4페이지가량 자판을 치면 두세 시간 가량 걸린다. 두세 시간 동안 집중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글쓰기 삼매에 빠지는 것이다. 이럴때 어떻게 해야 할까?

글이 길다고 충고했을 때 수용해야 할까? 수용하기 힘들것 같다. 왜 그런가? 상황을 설명하다 보면 글이 자연스럽게 길어진다. 경전을 인용하면 더 길어진다. 법수에 대해서 설명하다 보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글이 길다는 지적과 함께 지적 받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너무 경전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렇다고 경전 보기를 중단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믿고 의지할 데가 경전밖에 없다. 그럼에도 경전을 보지 말라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깨진 놋쇠그릇이 되는 수밖에 없다.

글을 써도 한소리 듣고 경전을 봐도 역시 한소리 듣는다. 그들은 나의 글쓰기가 불편한 것이다. 그들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린다면 글쓰기를 중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힘들다. 이미 습관이 되서 멈출 수 없다.

글이 긴 것을 오히려 칭찬해 주어야 한다. 글이 길어서 읽는데 불편한 것은 그 사람 사정이다. 글이 유익하다면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볼 것이 없다면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유익하지 않은 글, 시간을 빼앗는 글은 쓰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 하나라도 건질만한 글을 쓴다.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새기고 싶은 경전 문구는 남도 좋아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길게 쓰는 것보다는 경전에 있는 문구를 근거로 하여 간결하게 쓰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나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았을 때 건질 것이 없다면 시간낭비 하는 것이 된다.

경전을 읽고 새기고 싶은 문구가 있으면 글로 남긴다. 오늘 새벽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본 문구도 그렇다. 그것은 아난다의 질문에 대한 것이다. 이를 '여인 대처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난다가 부처님에 물었다. 아난다는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여인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D16.112)라며 짧게 말했다.

부처님은 왜 쳐다 보지 말라고 했을까? 이는 탁발과 관련이 있다. 탁발할 때는 눈을 멍에의 길이만큼 아래로 떠서 걷는 것이다. 그럼에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인을 보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부처님은 "아난다여, 말하지 않는 것이다."(D16.112)라며 짧게 말했다. 왜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이럴 때는 주석을 봐야 한다. 주석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여성과 대화하면, 친교가 생겨나고 친교가 생기면, 정이 깊어지고, 번민하고, 계행을 파괴하고, 괴로운 곳을 채우는 자가 된다.”(Smv.582-583)


대화하면 친교가 생겨난다고 했다. 사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녀 관계는 애정의 관계로 변질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 둘이 만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재가자에게도 해당 된다. 친한 도반이라도 세 명 이상 있을 때 만나는 것이다.

사람은 말하지 않고 살 수 없다. 어떨 때 말을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주석에서는 "여인이 날자를 묻거나, 계행을 구하거나, 진리를 듣고자 하거나, 질문을 하고자 하거나, 이처럼 출가자로서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경우"(Smv.583)라고 했다.

재가자는 재보시하고 출가자는 법보시한다. 이럴 때 보지 않을 수 없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상담요청 했을 때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말을 꼭 해야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D16.112)라며 짤막하게 말했다.

여인과 어쩔수없이 말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사띠하라고 했다. 어떻게 사띠하는가? 주석에서는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S35.127)라는 경전문구를 인용해서 설명했다.

여인과 이야기할 때는 사띠하며 이야기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띠는 수행용어가 아니라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새겨서 활용하는 것이다. 어머니뻘이 되면 어머니처럼 대하고, 누이뻘이 되면 누나처럼 대하고, 딸뻘이 되면 딸처럼 대하는 것이다. 여인을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다.

여인과 얘기할 때 사띠하는 것은 여인을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다. 이는 경전에 있는 말이다. 부처님 제자라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새겨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전을 읽어야할 것이다.

니까야경전에는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삶의 지혜가 되는 가르침이다. 더구나 주석까지 있어서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켜 준다. 어디서 여인대처법이라는 가르침을 접할 수 있을까? 어디서 여인을 가족처럼 대하라는 가르침을 접할 수 있을까?

요즘 미투가 문제되고 있다. 미투하게 만드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미투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사소한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했을 때 역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남성이 여성을 대했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면 남성책임이 크다. 그 반대일수도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기는 사람이라면 실수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여인을 가족처럼 대했을 때 미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 부처님의 여인에 대한 대처법은 사띠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런데 이어지는 가르침도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이어서 말한 것도 있다. 상윳따니까야를 보면 바라드와자가 우데나 왕에게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왕은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이런 왕에게 여인은 어떤 의미일까? 우데나 왕은 이렇게 말한다.


바라드와자여, 마음이 동요하면 때때로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탐욕을 일으키며, 자매 같은 여인에 대하여 탐욕을 일으키며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탐욕을 일으킵니다.”(S35.127)


왕은 탐욕에 불길에 휩싸였다. 왕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인을 가족처럼 여기는 것이 먹혀 들어가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제자는 많이 배운자들이다. 이는 많이 들은 자와 같다. 들어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 바라드와자는 부처님이 말씀한 것을 알려준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다.


그대들은 이 몸은 발바닥부터 머리 가운데 아래 피부 끝까지 여러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개별적으로 이 몸에는 머리카락, 몸털,…관절액, 오줌이 있다고 이와 같이 깊이 관찰해야 한다.”(S35.127)


이는 부정관 수행에 대한 것이다. 여인에 대하여 욕정이 일어났을 때 여인을 가족처럼 여겨도 소용이 없을 때 부정관을 하라는 가르침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부정물로 가득 찬 신체에 대한 관찰은 갈애에 수반되는 육체적 쾌락이나 성적 충동을 제어하고 소멸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정관은 몸을 감각적으로 매력적인 것이라 인식하는 지각의 토대를 무너뜨림으로써 육체적 쾌락의 욕구를 소멸시킬 수 있다.”(수타니파타, 1313번 각주)

여인에 대한 최종적 대처는 부정관이다. 보지 않는 것, 말하지 않는 것, 사띠하는 것에 이어서 부정관하는 것이다. 여인 대처법 네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은 경전을 열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오늘 새벽에도 장문의 글을 엄지로 쳤다. 글이 길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유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한호흡에 읽어낼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갖가지 조언을 받는다. 조언이나 충고를 모두 수용한다면 글쓰기를 멈추어야 한다. 내가 글쓰기를 계속하는 것은 배우는 학인이기 때문이다. 배움을 추구하는 한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어떤 이는 경전에서 답을 찾지 말고 자신의 내면에서 찾으라고 한다. 경전의 말은 남의 이야기이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경전 보는 것을 나무라는 것 같다. 이런 말은 깨달은 자에게나 통용되는 말이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자신을 의지처로 해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의 자귀의법귀의 가르침이 잘 말해준다.

불자가 경전에 의지하지 않으면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그 사람의 말을 의지처로 하고 귀의처로 하고 피난처로 해야 할까? 부처님 제자로서 그렇게 할 수 없다. 부처님 제자가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승가공동체를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법회 때마다 삼귀의하는 것이다.

경전에 근거하여 쓰다 보니 글이 길어진다. 그럼에도 글이 길다고 불편해 하기도 한다. 경전 보는 것에 대해서 너무 의지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글이 길면 장황하다고 말하고 글이 짧으면 내용이 없다고 말한다. 침묵하면 말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까?

글이 길면 내용이 있는 것이다. 경전을 보면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 글이 긴 것을 칭찬하고 경전 보는 것을 칭찬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반대로 말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럴 때는 깨진 종이 되거나 깨진 놋쇠그릇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때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2023-01-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