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스님의 권위와 학자의 권위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10. 07:15

스님의 권위와 학자의 권위

 


어제 장문의 글을 썼다. 새벽 5시 반부터 쓰기 시작한 글이 오전 10시에 끝났다. 무려 4시간 반 쓴 것이다. 대체로 만족했다. 경전과 논서, 법문집을 근거로 찰나삼매에 대해서 썼다.

글을 여기저기 옮겼다. 블로그와 페이스북, 카톡에 올렸다. 카톡에서 어떤 이가 위빠사나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가 있는 칼럼을 링크시켰다. 어느 교수가 교계신문에 미얀마 위빠사나 문제점에 대해서 쓴 것이다.

요지는 이렇다. 위빠사나는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미얀마 군부가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왜 이런 글을 링크시켰을까? 이유는 알고 있다. 사마타 선정없이 위빠사나만으로 도와 과에 이르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는 사마타 선정에 대한 얘기는 많지만 미얀마 불교에서 말하는 위빠사나에 대한 것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유가 된다.

사람들은 학자의 견해를 경전보다 더 믿는 경향이 있다. 반론을 제기할 때 학자의 논문을 인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위빠사나에 대한 것도 그렇고 더 나아가 윤회에 대한 것도 그렇다.

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비판의식이 있는 사람들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결과물은 논문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경전은 허구가 되어 버린다.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경전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다.

스님의 권위에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 큰스님이 말한 것을 금과옥조로 삼는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가르침보다 우선한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비판하면 발끈하는 것 같다. 스승의 권위에 도전했다고 보는 것이다.

학자의 권위도 스님의 권위도 부처님 권위에 우선할 수 없다. 학자의 논문이나 스님의 법문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우선할 수 없다. 나라에서 헌법이 최상위의 법이듯이, 어떤 논문이나 법문도 경전을 넘어설 수 없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A3.65)

 


부처님은 소문, 전승, 여론에 끄달리지 말라고 했다. 또한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스승의 권위에 의지하지 말라고 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깔라마경을 이해하려면 부처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갖가지 사상이 난무했었다. 외도 스승은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Ud.66, MN.I.484)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했을까?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이익 본사람이 범인이라고 한다. 위빠사나가 문제 있다고 말한 교수가 이익을 보았다면 그의 주장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종단 권승들에게 잘 보이고 대학에서 중책을 맡았다면 그의 주장은 신뢰가 떨어진다.

자신의 견해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학자나 스님이 자신의 이론에 대하여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위해서 펼쳤을 때 사견이 될 수 있다. 그런 학자나 스님의 권위를 이용해서 초기경전을 문제삼는다면 사견에 지나지 않는다.

정견과 사견이 있다. 가르침에 근거하면 정견이 된다. 가르침보다는 학자나 스님의 권위에 의존하여 근거를 찾으려 한다면 사견이 된다.

글을 쓸 때 경전을 근거로 한다. 경전문구를 인용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권위를 이용해서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전을 근거로 해서 글을 쓰면 정견이 된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경전을 잘 보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초기경전을 보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율장도 보지 않고 논장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학자의 논문이나 스님의 법문을 중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깔라마의 경에서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A3.65)라고 말 했을 것이다.

부처님은 스승의 말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어떤 이는 한발 더 나아가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도 믿어서는 안된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는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45년 동안 수많은 법문을 했다. 이는 경, 응송, 게송 등 구분교의 가르침으로 알수 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가르침에 대해서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It.121)라고 했다.

누군가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해서 믿지 말라고 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실없는 사람으로 볼 것이다. 부처님이 설법한 다음에 내 말도 믿지 말라고 했다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부처님은 깔라마경에서 "성전의 권위"에 끄달리지 말라고 했다. 이를 초기경전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도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바라문교의 베다성전을 말한다.

학자의 권위나 스님의 권위에 크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학자들이나 스님들은 경전을 다 읽어 보았을까? 가르침에 대해서 의심하는 자들은 다 읽어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 필요한 부분만 보았을 것이다.

학자나 스님의 권위를 빌어 말하는 자가 있다. 누군가 "부처님 말씀도 의심해 보아야 한다."라든가,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다 부처님 말씀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사견을 말하는 자가 된다. 사견에 또 사견이 되는 것이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해서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A4.180)

어떤 학자나 스님이 얘기했을 때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이 정견을 말하는 것인지 사견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법과 율에 맞으면 수용하고 맞지 않으면 배척하라고 했다.

블로그에 매일 글을 쓰는 블로거이다. 페이스북에도 동시에 올려 놓는다. 글을 쓰다 보면 종종 비난 받는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로도 공격하기도 하지만 학자의 논문이나 스님의 법문을 들기도 한다. 그러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많이 배우고 수행했어도 사견이 되어 버린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핱까? 부처님 의 최후 말씀대로 니까야(경장)와 비나야(율장)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자기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 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법구경에서는 자신을 수호자로 하라고 했다. 이는 자신을 의지처로 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은 법구경 게송은 자귀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요즘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다. 오늘 새벽에 읽은 것은 16번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 자귀의와 법귀의에 대한 것이다. 이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말라"(D16.54)라는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법귀의에서는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으라고 했다.

어떻게 자신을 피난처로 삼을 수 있을까?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으라는 말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신도 피난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가능한 일이다. 열반을 성취하여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법회할 때 삼귀의 한다. 삼귀의에서 법귀의가 있다. 이는 가르침을 의지처로 하고 피난처로 함을 말한다.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는 '아홉 가지 출세간의 가르침(구출세간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부처님은 자귀의와 법귀의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말라고 했다. 피난처로 삼아야 할 것은 자신과 가르침 뿐이다. 그런데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반을 증득해서 성자의 흐름에 든다면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윤회의 바다에서 살고 있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이다. 그래서 열반은 종종 섬으로 비유된다. 부처님이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윤회에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열반을 실현하라는 말과 같다.

성자의 흐름에 들려면 궁극적 경지를 맛보아야 한다.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열반을 실현해야 사향사과의 성자가 된다. 그런데 성자가 되면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열반은 윤회의 바다에서 섬과 같은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수호할 수 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Dhp.160)이라고 했다.

불자들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설령 그 학자가 많이 배웠다고 하더라도 가르침에 근거해서 말하지 않으면 물리쳐야 한다. 설령 그 스님이 수행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으면 역시 물리쳐야 한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 윤회의 바다에서 믿을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자신 밖에 없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궁극의 경지, 열반을 맛본다면 섬에 있는 것과 같다.

섬은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열반을 증득해서 사향사과의 성자가 되었을 때 섬에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이때 자신은 자신의 수호자가 된다.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피난처로 하는 것이다.

2023-01-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