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의 창조자이자 파괴자
지금이 몇 시인지 모른다. 잠에서 깼을 때 시계를 보지 않는다. 당연히 스마트폰도 보지 않는다. 마음에 흙탕물이 일 것을 염려해서 그렇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마음은 대상이 있으면 거기에 가 있다. 대상을 접하면 좋거나 싫거나 덤덤한 마음 중에 하나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잠에서 깼을 때는 마음이 평안하다. 이 기분 그대로 언제까지나 유지하고 싶어진다.
몸과 마음에는 여섯 개의 문이 있다. 새벽에는 오로지 한개의 문만 열어 둔다. 마음의 문을 말한다. 눈의 문, 귀의 문 등 오감의 문은 닫아 두었기 때문에 마음의 문만 열려 있다.
마음의 문으로 생각이 밀려 들어 온다. 나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몸 안에서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마음의 문에서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을 대상으로한 마음이 일어난다. 마치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면 눈의 의식이 생겨나 마음이 일어나듯이, 마음의 문이 있어서 일어난 생각을 대상으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새벽은 성찰의 시간이다. 오로지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놓았을 때 일어난 생각을 대상으로 사유하게 된다. 사유에 따라 망상이 될수도 있고 성찰이 될수도 있다. 대개 망상이 되기 쉽다.
망상은 어떻게 일어날까? 놀랍게도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18번 경에서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해 놓았다. 그것은 삼사화합촉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때 느낌에서 갈애로 진행되면 12연기가 회전된다. 느낌에서 지각으로 진행되면 망상이 된다. 지각된 것을 사유하는 과정에서 망상이 되는 것이다.
마음의 문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삼사화합촉에 해당된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과 감각의식, 이렇게 세 가지가 접촉하는 것을 삼사화합촉이라고 한다. 삼사화합촉은 여섯 가지 감역에서 발생된다. 부처님은 이를 세상의 발생이라고 했다.
두 가지 세상이 있다. 하나는 세상이 있어서 내가 사는 세상이고, 또 하나는 내가 있어서 세상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하는 세상은 후자이다. 세상은 여섯 가지 감각의 영역이 만들어 내는 세상임을 말한다.
내가 있는 한 나는 세상의 창조자가 된다. 그런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나만의 세상이다. 내가 만든 세상이다. 어떻게 만든 세상인가? 갈애로 만든 세상이다. 이는 삼사화합촉에서 느낌이 발생되어서 연기가 회전함으로써 나만의 세상이 만들어진다.
니까야를 읽으면 놀라운 것으로 가득하다. 이제까지 가졌던 생각을 깨뜨리는 것 같다. 한번도 듣도 보도 못한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의 발생에 대한 것도 그렇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세계의 발생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난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계의 발생이다."(S12.44)
부처님은 세상이 발생하는 원리에 대해서 설했다. 이는 청각과 소리를 조건으로, 후각과 냄새를 조건으로, 미각과 맛을 조건으로, 촉각과 감촉을 조건으로, 정신과 사실을 조건으로 세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세상은 조건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삼사화합촉으로 세상이 발생된다. 자신이 창조한 세상이다. 그런데 자신이 창조한 세상은 반드시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절망적 괴로움이다. 그래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라고 했다.
세상의 발생은 왜 절망적일까? 그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조건발생하는 것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마치 두 손바닥을 부딪치게 하여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자신이 만든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한마디로 갈애의 세상이다. 자신이 원했기 때문에, 자신이 열열히 갈망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삼사화합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발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대상과 접촉하면 느낌이 발생된다. 이 때 느낌은 세 가지 느낌 중의 하나이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중립적인 느낌, 이렇게 세 가지 느낌을 대상으로 갈애가 일어난다. 그래서 좋으면 거머쥐려 한다. 이것이 탐욕이다. 싫으면 밀쳐내려 한다. 이것이 성냄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적인 느낌은 언제 어떻게 탐욕으로 될지 성냄으로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어리석음이다.
이 세상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 갈애로 인해 만들어진 세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갈애로 만든 세상에서 갇혀 지낸다. 자신이 만든 세상이 전부인줄 안다. 견해가 충돌한다면 세상과 세상이 충돌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만든 세상은 견고하다. 누구도 깨뜨릴 수 없다. 그런데 세상은 연기가 회전해서 구축된 세상도 있지만 생각으로만 만들어진 세상도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것은 망상이다. 부처님은 망상이 일어나는 원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M18)
세상이 일어나는 원리와 망상이 일어나는 원리는 다르다. 그것은 느낌 다음 일어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느낌에서 갈애로 연기가 회전하면 세상이 발생된다. 그러나 느낌에서 지각으로 전개되면 망상이 일어난다.
느낌이 중요하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세상이 발생된다. 자신이 구축한 자신만의 세상이다. 그런 세상은 항상 괴로움으로 끝난다. 그것도 절망적 괴로움이다. 사람들은 매일 매순간 절망의 세상에서 살아간다. 망상 역시 절망적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새벽에는 정신이 맑다. 마치 흙탕물이 가라앉은 듯이 마음이 평온하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오래 가지 못한다. 대상을 접하면 깨진다. 대상이라 하여 반드시 눈이나 귀의 대상은 아니다. 마음의 대상도 대상이다. 마음의 문으로 들어 오는 생각도 대상인 것이다.
대상을 접했을 때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난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세상이 발생되고 망상이 일어난다. 그 종착지는 항상 괴로움이고 또한 절망이다.
나는 세상의 창조자이다. 내가 창조한 이 세상은 괴로움으로 가득하다. 탐욕과 성냄, 슬픔과 기쁨, 미움과 사랑 등 온갖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시시각각 세상은 창조되었다가 파괴된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갈애가 생겨나는 한 이 세상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매순간 끊임없이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세상을 창조하지 않는 것이다. 늘 부처님 가르침을 새겨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가르침을 주셨다. 나는 세상을 창조하기도 하지만 파괴하기도 한다.
2022-12-0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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