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반야심경과 입법계품의 모티브가 되는 께밧다의 경(D11)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23. 10:12

반야심경과 입법계품의 모티브가 되는 께밧다의 경(D11)


사람들에게 15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어떻게 할까? 대부분 에스엔에스를 할 것이다. 페이스북을 열어 보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15분이라는 시간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어정쩡한 시간이다. 가볍게 볼 수 있는 페이스북이 최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 아침 에어프라이어로 수제 소세지를 구웠다. 설정조건을 190도 15분으로 해 놓았다. 15분 후에는 노릇노릇 익은 달콤하고 바싹한 맛의 소시지를 맛 볼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페이스북에 마음이 갔다. 페이스북을 열어 보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별로 남는 것이 없다. 경전에 손을 댔다.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를 말한다.

디가니까야를 머리맡에 놓고 읽고 있다. 잠시 시간을 내서 짬짬이 읽고 있다. 하루에 한페이지도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점심 때이건 잠자기 전이건 어느 때이든 잠시라도 틈이 나면 경전을 펼쳐 든다.

오늘 아침에 읽은 것은 디가니까야 11번 경인 ‘께밧따의 경’이다. 경을 읽다가 주석에서 아주 인상적인 문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깨끗하거나 더럽거나”라는 문구에 대한 주석을 말한다.

경에서 “깨끗하거나 더럽거나”라는 문구를 보았을 때 반야심경이 생각났다. 반야심경에는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에서 불구부정은 어떤 의미일까? 단순하게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이라는 뜻일까? 이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검색창에 ‘불구부정’과 ‘무비스님’을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다. 무비스님은 불구부정에 대하여 “거기에 ‘더럽다, 깨끗하다’, 이것인들 어떻게 존재할 까닭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한문 원문을 우리말로 풀이해서 말한 것이다.

무비스님은 제법공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불구부정에 대하여 단지 더럽거나 깨끗한 것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더럽다느니 깨끗하다느니, 이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가지고 괴로워하고 시시비비하고 그런가?”라고 말했다.

한정되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

반야심경에서 불구부정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검색한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 한자어 풀이로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니까야에서는 다르다. 먼저 께밧따의 경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봐야 한다.


어디서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이 기반을 잃어버립니까?
어디서 길거나 짧고 미세하거나 거칠고
깨끗하거나 더러운 것이
어디서 정신과 물질이 남김없이 소멸합니까?”(D11)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질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바른 질문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한정해서 질문하기 때문이다.

잘된 질문이 있는가 하면 잘못된 질문도 있다. 한정하지 않는 질문을 말한다. 이는 “세존시여, 도대체 어디서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 곧,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가 남김없이 소멸합니까?”(D11)라는 질문도 이에 해당된다.

한정적이지 않은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다. 누군가 “도란 무엇입니까?”라든가,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어떻게 답해야 할까? 막연한 마음이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차나 한잔 마시게.”라며 말할 것이다. 어떤 이는 주장자로 머리통을 때려 줄 것이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하면 답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누가 이 괴로움을 만듭니까?”라고 물으면 답을 할 수 없다.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서 괴로움이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누가’가 아니라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물었을 때 부처님은 연기법적으로 답해 주었다.

질문같지 않은 질문은 한정적이지 않은 질문이다. 질문의 범위가 너무 넓었을 때 무엇을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할지 알 수 없다. 경에서 “어디서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 곧,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가 남김없이 소멸합니까?”(D11)라고 물었을 때 막연한 것이다. 마치 도가 무엇인지, 깨달음이 무엇인지 묻는 것과 같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Smv.392에 따르면, 그 질문은 한정적으로 질문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파악되지 않는 것(Dat.I.511: 감관과 결부되지 않은 것)을 포착하여 한정없이 질문하였기 때문에 거절된 것이다.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의 결점을 보여 준다.”(디가니까야 KPTS본, 647번 각주)


질문은 한정적이어야 한다. 너무 범위가 넓으면 어떻게 답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경에서는 모두가 모르겠다며 다른 존재에게 물어 보라고 한다.

하느님에게 물어 보았으나

경에 따르면 광대한 존재의 행방을 구하는 수행승이 있었다. 그의 관심사는 지, 수, 화, 풍 사대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도 같은 것이다. 이에 사대왕천에게 물어 보았다. 사대왕천은 난색을 표하며 바로 위의 천상인 삽심삼천의 제석천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그러나 재석천도 알 수 없었다. 차례로 위로 올라가다가 하느님세계(梵天)에 까지 이르렀다.

수행승은 하느님에게 예를 갖추어 물어 보았다. 수행승은 먼저 “당신은 위대한 하느님으로 정복자이며, 정복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지배자이며, 주재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주이며, 최상자이며, 조물주이며, 전능자이며,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아버지인 하느님입니까?”(D11)라며 묻는다. 이에 하느님은 수행자에게 그렇다고 말한다.

수행자는 하느님에게 궁금한 것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는 위대한 하느님으로 정복자이며”로 시작되는 ‘하느님 찬가’만을 말할 뿐이었다. 자화자찬한 것이다. 수행승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님을 말하며 질문한 것에 대하여 알려 달라고 했다.

하느님은 수행승의 사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하느님은 “수행승이여, 가서 세존을 찾아 뵙고 질문을 여쭈어보십시오. 그리고 세존께서 답변하시는 것을 새기십시오.”(D11)라고 말했다.

해안을 찾는 새의 비유

경에서 수행승의 구도행각을 보면 마치 화엄경의 입법계품을 보는 것 같다. 선재동자가 진리를 찾기 위해서 선지식을 찾아 나서는 것과 유사하다. 다만 경에서는 욕계천상과 범천에 대한 것이 다르다.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최종 종착지에 대한 것이다.

화엄경에서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에서 시작하여 문수보살로 돌아온다. 그러나 께밧다의 경에서 수행승은 부처님에게 최종적으로 묻는다. 하느님도 모르는 것을 부처님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해안을 찾는 새의 비유’를 들었다.

옛날에 바다의 상인들은 대양을 항행할 때 해안을 찾는 새를 날려 보냈다. 새가 해안을 찾으면 해안으로 가버리지만, 새가 해안을 찾지 못하면 다시 배로 되돌아 온다. 수행승이 하느님의 세계에까지 가서 궁금한 것을 물었지만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해안을 찾는 새가 배로 되돌아 오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사대의 소멸에 대해서 묻는 수행승에 대하여 질문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해 주었다.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막연하게 물어 보았을 때 누구도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열반의 세계에 대하여

부처님은 한정적이지 않은 질문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디서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 곧,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가 남김없이 소멸합니까?”(D11)라며 막연하게 질문하지 말고, “어디서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이 기반을 잃어버립니까? 어디서 길거나 짧고 미세하거나 거칠고 깨끗하거나 더러운 것이 어디서 정신과 물질이 남김없이 소멸합니까?”(D11)라며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질문에 대한 답을 게송으로 말했다.


의식은 불가견이고 무한이고 모든 곳에서 빛난다.
여기서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이 기반을 잃어 버린다.
여기서 길거나 짧고 미세하거나 거칠고
깨끗하거나 더러운 것이
여기서 정신과 물질이 남김없이 소멸한다.
의식이 소멸함으로써 여기서 그것이 소멸합니다.”(D11)


사대의 소멸에 대한 심오한 가르침이다. 주석을 읽어 보지 않으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는 열반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열반을 한번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말로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열반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언어로써 궁극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이 좋은 예이다.

의식은 불가견(不可見: anidassna)이라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여기서 말하는 의식(viññāa)은 열반으로서의 의식이다. 이러한 열반으로서의 의식은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열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반으로서의 의식은 무한(ananta)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열반은 생겨나거나 사라지거나 유지되거나 달라지는 한계 또는 극단이 없음을 말한다. 또한 열반으로서의 의식은 모든 곳에서 빛난다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열반으로 들어가는 문을 의미한다. 38가지 명상주제가 열반으로 들어가는 문에 해당된다.

열반의 세계에서는 지, 수, 화, 풍 사대가 소멸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대에서 파생된 것들도 소멸된다. 이에 대하여 “길거나 짧고 미세하거나 거칠고 깨끗하거나 더러운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길거나 짧은 것은 사대에서 파생된 물질을 말하고, 미세하거나 거친 것은 파생적 물질의 형태를 말한다. 그리고 깨끗하거나 더러운 것은 좋아하고 싫어함을 말한다.

반야심경에서도 열반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는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으로 표현된다. 께밧다의 경에서 열반을 설명한 것과 유사하다. 특히 불구부정(不垢不淨)에 대한 것이 그렇다.

불구부정에 대하여 단지 한자해석으로 그친다면 더럽거나 깨끗한 것이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께밧다의 경을 보면 똑 같은 내용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열반의 세계에서는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아직까지 반야심경 해설서에서 불구부정에 대하여 호불호나 쾌불쾌로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수행승이 궁금했었던 것은 열반이었다. 사대로 이루어진 몸이 소멸되었을 때 어디로 갈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게송의 마지막 구절에서 “정신과 물질이 남김없이 소멸한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최후의 의식의 소멸을 뜻한다. 최후의 의식이 소멸에 따라 정신과 물질도 소멸되기 때문이다.

의식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면 불생의 상태가 된다. 이는 유위법적 조작으로 의식이 생겨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꺼진 불로 묘사되어 있다. 수타니파타 라따나경에서는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 열반에 드시나니”(Stn.235)라고 설명되어 있다.

반야심경과 입법계품의 모티브가 되는께밧다의 경’(D11)

오늘 아침 에어프라이어로 소시지를 굽다가 막간을 이용해서 경전을 보았다. 불구부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어서 반야심경의 그것과 비교하여 글을 써 보았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제법공상은 열반의 상태를 표현한 것인데 불구부정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 단지 한자풀이식으로 된 설명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은 니까야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구입해서 읽을 수 있다. 부처님 그 분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다. 대승경전을 읽는 것도 좋지만 니까야와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대승경전은 니까야를 바탕으로 해서 구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의 구도행각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께밧다의 경에서 수행승의 구도행각을 보는 것 같다. 어쩌면 입법계품 찬술자가 께밧다의 경에서 모티브를 얻었는지 모른다. 또한 반야심경에서 제법공상에 대한 것도 어쩌면 께밧다의 경의 게송에서 모티브를 얻었는지 모른다.


2022-11-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