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고 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0. 29. 13:31

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고 했을까?

어느 스님의 에스엔에스에 전도선언문이 올라 왔다. 설명문도 있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전도선언문에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S4.5)라는 문구에 대한 것이다.

스님에게 "왜 둘이서 가지 말라고 했을까요?"라고 물어 보았다. 어떤 이가 댓글을 달았다. 혼자 가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유일신교 전도사들은 둘이서 함께 다니는데 이렇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왜 둘이서 가지 말라고 했을까요?"라며 역질문 했다. 이에 "일당백"이라고 했다. 그러자 스님은 "일기당천"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고 했을까? 이에 대해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강연을 듣고 올린 글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말라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부처님 당시에는 종교간 폭력이 없었기 때문에 홀로 다녀도 안심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사상의 대결에서 싸워 이기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아라한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본다. 마지막으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전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둘이 가면 낭비로 본 것이다."(2022-05-17)

고미숙 선생이 정확하게 핵심을 짚었다. 특히 두 번째 항이다. 그때 당시 부처님의 60명 제자들은 모두 아라한이었다. 사상대결에서 자신 있었을 것이다. 둘이서 같은 길로 가는 것은 낭비였을 것이다. 그러나 첫번째 항에서 "종교간 폭력이 없었기 때문에 홀로 다녀도 안심했다."라고 말한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본다.

부처님의 제자 뿐나가 있다. 한역에서는 부루나 존자로 알려져 있다. 뿐나는 안거가 끝나자 고향에 가서 포교하고자 했다. 부처님 가르침이 좋은 줄 알기 때문에 한사람에게라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뿐나의 고향이 있는 서부지방은 이교도가 득세하는 지역이었다. 잘못하면 맞아 죽을 수 있다. 이에 뿐나는 부처님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저에게 날카로운 칼로 목숨을 빼앗으면, 그때 저는 이와 같이 '세존의 제자는 육체적 관점이나 생명적 관점에서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을 들길 원한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을 든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세상에 존경받는 분이시여, 그때는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바른 길로 잘 가신 분이시여, 그때는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S35.88)

뿐나는 아라한이었다. 자아가 없는 무아의 성자에게 두려움이 있을까? 목숨이 두려워서 포교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죽여 주면 고마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처님인 60명의 아라한이 생겨나자 전도선언을 했다. 그리고 전도할 것을 명령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S4.5)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아라한들에게 가르침을 설하라고 했고 청정한 삶을 보여 주라고 했다. 언행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차제설법식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보시,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얘기부터 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감각적 욕망의 재난과 이욕에 대한 얘기를 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가르침을 받아들일만한 여건이 성숙되었다면 사성제를 설했을 것이다.

청정한 삶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궁극적인 삶에 대한 것이다.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무소유에 기반한 청정한 삶을 말한다. 이런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믿고 따를 것이다.

종교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청정에 있다. 청정한 삶을 사는 수행자가 있을 때 마음이 끌릴 것이다. 더구나 청정한 삶을 살아 행복하게 보인다면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할 것이다.

종교의 경쟁력은 신도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거대한 성전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삼의일발에 탁발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만 해도 감동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S4.5)라고 말했을 것이다.

부처님은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S4.5)라고 했다. 이 말은 일당백이자 일기당천임을 말한다. 둘이서 또는 셋이서 집단으로 몰려 다니지 않음을 말한다. 혼자서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거친 이교도가 있어도 문제 없다. 왜 그런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라한에게는 삶도 죽음도 없다. 아라한은 삶도 바라지 않고 죽음도 바라지 않는다. 때가 되면 열반에 들 것이다. 이교도 칼로 살해 한다면 일찍 죽어서 더 좋은 것이다. 아라한은 일당백이자 일기당천이다.

2022-10-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