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만 하는 사람과 받기만 하는 사람
만안구청 앞에 구두 수선 부스가 있다. 오래 되었다. 아마 내가 이 지역에 있기도 전에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15년도 더 전에 있었을 것이다.
구두 수선 부스는 한평도 되지 않는다. 매우 작은 철제 박스이다. 아마도 시에서 생계 유지를 위해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딱 두 번 가 보았다. 한번은 구두 뒷굽을 교체할 때 가 보았고 한번은 구두를 닦을 때 가 보았다.
구두수선 하는 남자는 발에 장애가 있다. 오른쪽 발에 장애가 있어서 뒷뚱뒷뚱 걷는다. 그럼에도 구두수선도 하고 구두도 닦고 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래 그 자리에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종종 찾는다.
오늘 아침 구두수선 부스를 지나가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구두수선을 하는 자는 주기만 하는 사람 같다고. 왜 그런가? 돈 거래를 빼버렸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거래하는데 있어서 돈을 빼버리면 어떻게 될까? 오로지 주는 자만 있고 오로지 받는 자만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구두수선하는 자는 오로지 주기만 하는 자가 되고 구두수선을 맡기는 자는 오로지 받는 자가 된다.
주기만하는 자는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식당에서 식당주인은 주기만 한다. 식사하는 자는 먹기만 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오로지 받기만 하는 자가 된다. 돈을 빼 버렸을 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노점상이 있다. 불쌍해 보이는 할머니는 야채나 과일 등 먹거리를 사람들에게 준다. 가장 가난해 보이는 사람이 막 퍼주는 것 같다. 돈 거래 장면을 제거했을 때 노점상은 주는 자에 해당된다.
주는 자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길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이 있다. 청소하는 사람에게 월급이라는 개념을 제거한다면 어떻게 보일까? 청소부는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 된다.
여기 공장 직원이 있다. 공장 노동자는 물건을 만들면서 근면하게 일을 한다. 돈거래 장면을 제거한다면 노동자는 타인들을 위해서 주기만 하는 자, 봉사만 하는 자에 해당된다.
여기 물건을 파는 가게가 있다. 가게 주인은 손님에게 물건을 건네 준다. 돈 거래를 제거하고 바라보면 가게 주인은 주기만 하는 사람이다.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누가 받는 사람인가? 구두수선을 맡긴 자는 받는 사람이다. 비록 돈을 건네긴 했지만 대가를 지불한다는 개념을 제거한다면 받기만 하는 사람에 해당된다.
길거리 좌판 노점에서 야채를 산다. 사는 자는 야채를 산 대가로 돈을 지불한다. 돈 거래를 빼 버리면 나는 야채를 가져 가는 자가 된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밥값을 지불한다. 돈 거래 장면을 제외하면 나는 밥을 먹기만 하는 자가 된다.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있다. 거래에 있어서 돈을 주고 받는 장면을 제외하면 주는 자만 있고 받는 자만 있게 된다. 주는 자는 공덕을 짓는 자가 되고 받기만 하는 자는 공덕을 까먹는 자가 된다.
자타카에 “내가 빚을 갚고 내가 빚을 준다.”(Jat.484)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떤 뜻일까? 보살이 앵무새 왕으로 살았을 때의 일이다. 이는 ‘논에 얽힌 본생이야기(Sālikedāra Jātaka)’(Jat.484)에 실려 있다.
앵무새들은 벼가 익었을 때 벼를 먹었다. 앵무새 왕은 한 움큼 입에 물고 날아 갔다. 매일 이런 일이 반복되자 바라문 논지기는 참을 수 없었다. 논지기는 앵무새 왕에게 “어디에 그대는 벼를 쌓아 두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앵무새 왕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꼬씨야여, 아직 날개가 나지 않은
어린 새끼들이 나에게 있다.
그들은 나를 먹여 부양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빚을 주어야 한다.”(Jak.1940)
“내게 늙은 부모가 있으니,
연로하여 젊음을 잃었다.
그들에게 부리로 날라서
전에 진 빚을 갚아야 하리.”(Jak.1941)
“거기에는 다른 새들이 있는데,
힘이 약해 더 이상 날 수 없다.
공덕을 짓기 위해 그들에게 준다.
현자들은 그것을 보물이라 부른다.”(Jak.1942)
“이것은 내가 진 빚이고,
이것은 내가 갚는 빚이다.
내가 모우는 보물이라고 나는 말한다.
꼬씨야여, 이와 같이 알아라.”(Jak.1943)
여기서 꼬씨야는 바라문 논지기를 말한다. 앵무새 왕이 벼를 더 가져 간 것은 어린 새끼에게 주기 위한 것이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지는 빚과 갚는 빚이라고 했다.
자식은 부모가 주는 것으로 성장하게 된다. 자식은 부모에게는 빚진 것이 있게 된다. 언젠가 갚아야 할 것이다. 빚진 자는 빚을 갚아야 한다. 그래서 앵무새 왕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 벼를 가져다 준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주기만 한다. 자식은 부모에게 받기만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관계가 계속 될 수 없다. 부모가 늙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자식이 봉양해야 한다.
앵무새 왕은 자식을 부양하고 부모를 봉양했다.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축생도 한 것이다. 이는 보살이 앵무새 왕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앵무새 왕은 자식의 부양과 부모봉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는 “거기에는 다른 새들이 있는데, 힘이 약해 더 이상 날 수 없다. 공덕을 짓기 위해 그들에게 준다.”(Jak.1942)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가족을 넘어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공덕행이라고 했다.
부모가 자식을 부양하는 것과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에 해당된다. 그렇다고 이렇게 하는 것이 공덕행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맛난 음식을 해 주고 난 다음 일기에다가 “나는 오늘 착한 일을 했다.”라고 써 놓지 않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자타카 게송에서는 지는 빚과 갚는 빚으로 설명했다.
공덕행은 타인에게 하는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고 봉양하는 것은 공덕행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가족 관계는 빚진 자와 빚 갚는 자의 관계에 해당된다. 자립할 수 없는 사람에게 보시를 하고 베풀고 나누는 삶이 진정한 공덕행에 해당됨을 말한다. 그래서 타인에게 보시하고 베푸는 삶에 대하여 ‘보물’이라고 했다. 이는 보시의 재물로서 정신적 재물에 해당된다.
흔히 보시를 말한다. 이를 베풂이라고 하며 나눔이라도 한다. 기부라는 말도 있다. 공통적으로 준다는 말이다. 그런데 주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공덕행이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보시, 지계, 생천의 가르침이 있다. 이를 시계생천(施戒生天)이라고 한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이다. 무엇보다 주어야 한다. 주어야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시계생천의 가르침은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바이블에서는 가난한 자가 천국에 태어난다고 한다. 부자가 천국에 태어나기는 무척 어렵다고 한다. 왜 가난한 자가 천상에 태어난다고 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베푸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보시하는 삶, 베푸는 삶은 공덕행이다. 천상이나 천국에 태어날 수 있는 제일의 조건이 된다. 그런데 열심히 주는 자들이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자보다도 더 높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가난한 자들은 열심히 주는 자이고, 부자들은 열심히 즐기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 즐기는 자가 있다. 아무 하는 일없이 먹기만 하는 자는 먹는 것을 즐기는 자에 해당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먹기만 한다면 받기만 하는 자에 해당된다.
받기만 하는 자가 있다. 부자나 고위직에 있는 자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돈을 건네는 대가로 맛집에서 맛있는 것을 낙으로 살아 가는 식도락가도 이에 해당된다. 이런 사람은 받기만 하는 사람이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이 있다. 철마다 해외여행을 나가는 사람이다. 사성급 호텔에서 잠을 자고 황제식을 하며 최상의 볼거리를 즐긴다. 여행자는 가는 곳마다 돈을 쓴다. 돈을 쓰는 대가로 최상의 서비스를 받는다. 돈 거래를 빼버리면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된다.
주는 사람은 공덕을 쌓는 자이고 받는 자는 공덕을 까먹는 자에 해당된다. 지금 가난한 자라도 주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 다음 생에 공덕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다. 지금 부자라도 받기만 하고 즐기는 삶을 산다면 이제까지 지은 공덕에 대한 과보를 까먹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덕을 짓지 않는 것이 된다.
종종 안양로 건너 편에 있는 명학공원에 간다. 일을 하다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면 머리도 식힐 겸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공원에는 노인들로 넘쳐 나는 것 같다. 근처에 요양원이 있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공원에는 운동하는 노인들이 많다. 비틀비틀 공원 산책 길을 걷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인다. 어떤 노인들은 의자에 앉아서 가만 있다.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들 같다. 받기만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노인들도 한때 자식을 부양하고 부모를 공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들어 홀로 되었을 때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그저 의자에 멍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아마도 식사대사(食事大事)일 것이다.
출가수행자는 탁발에 의존한다. 출가자가 받기만 하고 수행에 대한 결과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빚진 자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빚진 것을 즐김(iṇaparibhoga)’(Pps.III.343)이라고 했다.
먹는 것이 일과 중에 가장 큰 일인 사람들이 있다. 오로지 먹기만 하는 사람, 오로지 즐기기만 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받기만 하는 사람들과 같다.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했을 때 공덕을 까먹는 삶이 된다. 더 이상 공덕을 짓지 않았을 때 그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나는 공덕행을 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주는 행위를 하고 있는가? 일을 하고 있다면 주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글은 어떠할까? 누군가 공감했다면 역시 주는 행위가 된다.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주는 행위는 모두 공덕행이 된다. 거래에서 돈을 빼 버리면 주는 자는 공덕행이 된다. 받기만 하는 자는 과거에 지은 공덕을 까먹는 행위가 된다. 먹는 것을 즐기거나 여행을 즐기는 등 즐기기만 하는 자, 받기만 하는 자가 이에 해당된다.
우리 사회에 고액연봉자, 고액임대소득자, 고액연금수령자가 있다. 이들은 즐기는 삶을 살기 쉽다. 돈 거래를 빼버린다면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된다.
투기 등으로 불로소득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는 삶을 산다면 새로운 공덕을 짓지 않는 것이 된다. 은퇴하여 고액연금으로 아무 하는 일 없이 살아 가는 사람이 있다. 단지 먹는 것이 대사가 되어 살아 간다면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서 공덕을 까먹는 행위가 된다.
모든 거래에서 돈을 빼 놓으면 주는 자와 받는 자 두 부류만 있게 된다. 가난한 자나 힘 없는 자는 주로 주기만 한다. 반대로 부자나 힘 있는 자는 주로 받기만 한다. 주는 자가 공덕을 짓는다. 가난한 자나 힘 없는 자가 공덕 짓기 쉽다.
2022-09-28
담다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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