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떠나는 여행

꼰대보다 학인이 되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4. 10:48

꼰대보다 학인이 되고자

 


지금 시각 4시 36분, 적당한 시간이다. 3시대면 너무 빠르고 5시대면 너무 늦다. 한가하고 여유 있는 새벽시간이다. 이렇게 엄지치기 하는 것도 행복이다.

새벽이 되면 이것저것 생각이 일어난다. 어제 있었던 일이 큰 것 같다. 일종의 저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반론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려러니 하려 한다. 주류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라 생각한다.

불교인들은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당연히 경전이다. 지금 부처님이 계시다면 물어 봐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이때 의지할 것은 경전밖에 없다. 마치 헌법 같은 것이다. 경전에 실려 있는 말씀이 판단 기준이 된다.

경전에 있는 말씀은 정견이다. 정견이 있으면 사견이 있기 마련이다. 경전 밖의 얘기를 한다면 사견이 된다. 그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지위가 있어도 경전 밖의 얘기를 하면 빗나간 견해가 된다.

 


새벽에 눈을 뜨면 몇 시인지 모른다. 일부로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다. 외부 대상에 접촉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스마트폰을 보는 순간 마음이 일어난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마음의 문만 열어 놓어야 한다. 눈과 귀 등 다섯 가지 감각의 문은 차단할 수 있어도 마음의 문은 닫을 수 없다.

일어나서 행선을 했다. 암송도 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잘 집중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어제 사건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애써 무시하려 하지만 마음이 거기에 가 있는 것을 보면 충격 받았음에 틀림없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완전한 존재라면 이 세상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온에 집착 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 이 세상에 다시 오지 않으려면 오온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번 집착된 것은 떼어지지 않는다. 업의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집착은 갈애가 더욱 강화된 것이다. 집착은 갈애를 조건으로 발생한다.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느낌은 접촉을 조건으로 한다. 지금 마음에 파란이 일어난 것은 집착 때문이다. 원인을 추적해 가다 보면 접촉이다. 그 글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에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접촉이 없으면 느낌도 없다. 접촉함으로 인하여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생겨난다. 느낌 단계에서 끝나야 한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가 된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탐욕이 되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분노가 된다. 물론 무덤덤한 중간느낌도 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십시오."라는 말이다. 느낌이 갈애로 전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가 되는데 엎질러진 물과 같다.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과 같고, 위하도 회군 하는 것과 같다. 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다.

갈애의 강을 건넜을 때 멈추어지지 않는다. 계속 그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다. 끝장을 보는 것이다. 갈애가 집착이 되어 연기가 회전하게 된다. 업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흔히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십이연기 관점에서 봤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집착은 들러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상태인데 어떻게 떼어낼 수 있단 말인가? 갈애 단계도 힘들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연기가 회전하는 것이다.

십이연기는 순환적이다. 열두 고리가 계속 회전하는 것이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연쇄반응이 일어났을 때 최종단계는 괴로움이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는 정형구로도 확인된다.

진리는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가르침을 벗어난 이야기를 하면 설령 그것이 사회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견해가 된다. 불교인이라면 경전에 근거해서 말해야 한다. 그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지식이 많아도 가르침을 모른다면 지혜가 없는 것과 같다.

한번도 남 앞에 서본적이 없다. 교단에도 강단에도 서본적이 없다. 남 앞에 서면 교만이 생길 것 같다. "내가 누군데!"라는 우월적 자만이다. 이럴경우 꼰대소리 듣기 쉽다.

절에 산다고 하여 자동으로 깨닫는 것은 아니다. 가르친다고 하여 모두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하고 훈계하려고만 하면 꼰대가 되기 쉽다. 다행스럽게 교단에 서본적이 없다. 남을 가르쳐 본적도 없다. 늘 배우는 자세를 가지고자 한다. 꼰대가 되기보다는 학인이 되고 싶다.

2022-11-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