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잘 하겠다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29. 19:42

잘 하겠다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어떻게 해야 좌선을 잘 할 수 있을까? 이는 집중에 달려 있다. 앉아 있어도 집중이 되지 않으면 5분 앉아 있기도 괴롭다. 그러나 집중이 이루어져서 계속 그 페이스대로 나아가면 한시간이 아니라 그 이상도 가능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앉기에 도전했다. 오전에도 앉아 보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 있는 것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몸의 상태에 따라 집중이 잘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

이른 오후에 앉아 있어 보았다. 역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귀가하기 전에 한번 더 앉아 있어 보기로 했다. 먼저 사무실 불을 껐다. 창이 북동향이라서 형광등을 끄면 굴속 같다.

오후 5시 반에 자리에 앉았다. 먼저 20여분 경행을 했다. 오늘 두 번 시도 해서 모두 실패했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퇴근 하기 전에 한번 앉아나 있어 보자는 심정으로 임했다.

평좌를 했다.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렇게 했을 때 이삼십분이 지나면 무릎 저림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왼쪽 다리를 안으로 넣고자 한다.

호흡을 따라 가고자 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가장 강한 대상에 집중한다. 강한 대상에 마음이 따라 가는 것이다. 가만 앉아 있을 때 호흡만큼 강한 대상이 없다. 마하시 방식대로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고자 했다.

호흡은 기둥과도 같은 것이다. 호흡을 따라 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전면에서 호흡이 느껴지기도 한다.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몸 전체로 호흡을 관찰하고자 했다. 그런데 두 손을 모은 상태에서 오른쪽 검지 부분에서 불이 나는 듯 쓰라렸다.

집에 손님이 찾아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중히 손님을 맞이 해야 할 것이다. 손님을 쫓아버리면 예의가 아니다. 화끈거리는 손에 마음을 두었다. 화끈거리는 것이 호흡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강한 대상으로 마음을 둔 것이다.

손의 화끈거림을 관찰했다. 화끈거림은 점차 심해졌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나 과거 경험으로 보아서 시간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지켜만 보았다.

호흡도 관찰하고 화끈거림도 관찰했다. 번갈아 가며 관찰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중이 되었다. 오전과 양상이 완전히 달랐다. 마치 고속도로를 탄 것 같았다.

좌선하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위빠사나 명상하는 것은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것 같은 것 아닐까?”라고. 왜 그런가?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하는 것이나 몸에서 가장 강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나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운전을 하면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백미로 후방도 주시해야 한다. 온통 마음이 운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할 것은 다한다. 라디오도 듣고 대화도 한다. 그러나 눈은 항상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위빠사나 명상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호흡을 관찰하여 집중이 되면 잡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띠가 강하면 잡념이 망상으로 되지 않는다. 잡념이 들어 와도 거기에 끄달려 가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가?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단단히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그 가운데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할 뿐만 아니라, 삼매에서 행경에 능숙한 선정을 닦는 자는 선정을 닦는 자들 가운데 가장 존경스러운 자이고 가장 훌륭한 자이고 가장 뛰어난 자이고 가장 높은 자이고 가장 탁월한 자이다.”(S34.6)


경에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한 것은 사마타를 말하고, 삼매에서 행경에 능숙한 것은 위빠사나를 말한다. 여기서 행경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고짜라(gocara)를 번역한 말이다.

고짜라는 소가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는 범위를 말한다. 위빠사나는 대상에 집중하는 사마타와 달리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찰할 수 있는 범위가 있다. 그래서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이라는 네 가지 영역이 있다. 이를 사념처(四念處)라고 한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은 몸관찰에 들어간다. 손에서 화끈거림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은 느낌관찰에 해당된다. 그런데 잡념도 관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잡념도 법이 됨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상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현상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법을 관찰함으로 알 수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82법으로 분류해 놓았다. 이와 같은 82법을 구경법(paramattha dhamma)이라고 한다. 가장 근본이 되는 법을 말한다.


구경법은 크게 물질(28법), 마음부수(52법), 열반(1법), 마음(1법)으로 구별된다. 구경법은 몸과 마음에서 관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구경법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구경법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한 것이다. 눈으로 형상을 보아서 눈의 의식이 생겨나는 것도 구경법으로 본다. 여기서 눈도 구경법이고, 형상도 구경법이고, 안식도 구경법이다. 이런 구경법은 고유한 특징과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구경법 중에는 탐욕이나 성냄도 있다. 욕망도 구경법이고 성냄도 구경법인 것이다. 구경법에는 각자 고유한 특징과 전체적인 특징이 있다고 했다. 욕망을 예로 든다면 이는 거머쥐려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성냄은 밀쳐내려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그런데 어떤 구경법이든지 공통적인 특징은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구경법의 고유한 특징과 공통적인 특징을 아는 것이다. 손이 가려움으로 화끈거렸을 때 느낌이라는 구경법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이런 구경법의 고유한 특징과 공통적인 특징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법 아닌 것이 없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은 구경법 아닌 것이 없다는 말과 같다. 이는 우리 몸과 마음에서 관찰된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구경법인 것이다.

앉아 있은 지 이삼십분이 되었을 때 오른쪽 무릎이 저리기 시작했다. 고질적 현상이다. 그래서 평좌할 때 바깥으로 한다. 그러나 오늘은 안으로 넣었기 때문에 다리 저림 현상이 발생했다.

다리저림 현상이 발생하면 겁이 난다. 다리가 마비된 듯 피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공포가 엄습한다. 이때 공포도 법이다. 사라지고 말 법인 것이다. 그래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무엇이든지 지켜 보면 사라진다. 손의 화끈거림도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지만 잠잠해졌다. 더 큰 대상이 나타난 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큰 사건이 터지면 자잘한 이슈를 덮어 버리듯이, 무릎 저림 현상이 나타났을 때 다른 모든 통증을 제압해 버렸다.

오늘은 대체로 집중이 잘 되었다. 한시간은 물론 더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고속도로를 쾌속으로 주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잡념이 들어와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방 사라졌다. 마음이 호흡이라는 기둥에 꽁꽁 묶여 있었기 때문에 그 밧줄의 길이만큼 마음이 움직일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을 사띠라고 한다.

마음을 호흡이란은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꽁꽁 묶어 놓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그 기둥은 느낌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이라는 영역이 있다.

오른쪽 무릎 통증은 고질적이다. 사오십분이 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다리를 풀고 피가 통하게 했다. 오늘 마지막 좌선은 생각지도 못하게 잘 되었다. 기대하지 않았을 때 잘 되는 것 같다.

아난다는 결집을 앞두고 밤새도록 행선했다. 다음날 아침까지는 아라한이 되어야 결집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난다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난다는 “이번 생에서는 안되는 것 같다.”라며 자리에 누었다. 그런데 머리가 베개에 닿자 마자 깨달아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포기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무엇이든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잘되지 않는다. 잠을 자려고 할 때 잠을 청하는 것과 같다. 잠은 잠이 와야 자는 것이다. 그래서 “잠이 오면 자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잠을 자야 한다. 좌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좌선을 잘 하려면 잘 하겠다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욕망으로 집중 상태가 될 수 없다. 욕망을 내려 놓아야 선정에 들 수 있다. 아무 기대도 없고 아무 바라는 것 없이 좌선에 임한다면 성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시간과 몸의 상태도 무시할 수 없다. 집중이 잘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오늘 모처럼 밥 값 한 것 같다.


2022-11-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