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통증의 파도와 생각의 파도가 밀려 왔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1. 20:01

통증의 파도와 생각의 파도가 밀려 왔을 때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산다는 것은 발전적이다. 좌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한시간 앉아 있었다. 여러 차례 시도하여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오전에 이십분 앉아 있었다. 모처럼 일감이 있어서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다음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오후에 오늘 해야 할 일이 완료되었다. 네 시부터 자유시간이 되었다.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집에 일찍 들어가서 맛있는 것을 먹어도 될 것이다. 술을 마실 수 있다.

요즘 술은 마시지 않는다. 다만 반주로 식사하기 전에 담금주 한잔 정도는 마신다. 일종의 음식개념으로 마시는 것이다. 빈속에 알코올이 들어가면 식욕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술은 자제해야 한다. 그러나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제가 되지 않는다. 취하도록 마시기 때문이다. 술이 몸에 들어가면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시간을 빼앗아 간다. 과음하면 다음날 생산성은 절반으로 뚝 떨어진다.

명상과 술은 어떤 관계일까? 한마디로 상극의 관계이다. 왜 그런가? 음주는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오계에서 불음주계는 만악의 근원이라 하여 금하고 있지만 수행자에게 있어서 술은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에 마시지 않는다.

오후 네 시, 퇴근 시간을 앞두고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삼십분이라도 앉아 있고자 했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눈 감고 앉아 있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앉아 있으면 고질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른쪽 무릎부위가 저리는 것이다. 그래서 평좌할 때 오른쪽 다리를 바깥으로 한다. 이렇게 하면 좀더 오래 버틸 수 있다.

오후 네 시 반부터 좌선에 들었다. 그러나 삼십분쯤 되었을 때 오른쪽 다리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공포가 밀려왔다. 이대로 두면 다리가 못쓰게 될 것 같았다. 할 수없이 다리를 풀고 피를 통하게 했다.

오늘 하루 일과를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오후 다섯 시 반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한시간 앉아 있겠다고 마음 먹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오른쪽 다리 저림 현상이다. 나는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앉은지 삼십분가량 되었을 때 다시 다리 저림 현상이 시작되었다. 순간적으로 공포가 엄습했다. 다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 것이다. 당장이라도 다리를 풀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대로 두고 보기로 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가능한 자세를 바꾸지 말라고 한다. 다리가 저려도 견디어 내라고 말한다. 느낌을 관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통증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도 법을 보는 것이다.

다리가 굳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공포심 때문에 다리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세하면 풀게 된다. 그러나 좀더 참아 보자는 마음이 우세하면 그대로 있게 된다. 그런데 가만 있다 보면 저절로 다리가 풀리는 것을 알게 된다.

통증이 발생할 때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통증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마치 파도와 같다. 일파가 오고 난 다음 이파가 밀려 오는 것과 같다. 통증도 파도처럼 밀려 온다. 이를 지켜 보고 있으면 통증에 끄달려 가지 않는다.

오른쪽 다리 통증은 다 풀렸다. 당장 풀지 않으면 다리가 불구가 될 것처럼 공포에 휩싸였지만 지켜 보는 것만으로도 해결된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생각의 파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앉아 있다 보면 끊임없이 생각의 파도가 밀려 온다. 어떤 때는 빨리 끝내라고 유혹하는 듯 하다. 그러나 지켜 보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감각의 노예가 되기 쉽다. 아름다운 형상에 마음을 빼앗겨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도 감각의 노예가 되는 것으로 본다. 아름다운 음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장 강한 대상은 직접적인 접촉이다. 코와 혀와 신체로 접촉하는 것이 그렇다. 이는 다름아닌 식욕과 성욕이다.

사람들은 고기 굽는 냄새를 맡으면 고기가 먹고 싶어진다. 고기를 사가거나 고기집에 들어가서 먹는다. 고기는 술을 부른다.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음주에 빠지면 정신을 잃는 것과 같다.

가장 제어하기 힘든 것은 성욕이다. 성적인 대상을 접했을 때 마음은 이미 거기에 가 있다. 그리고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인상과 연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여자를 보았을 때 마음이 끌린다면 이는 인상에 해당된다. 다음으로 여성의 신체적 부위를 살핀다. 이것이 연상이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


“시각으로 형상을 보지만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연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만약 시각능력을 다스리지 않으면, 탐욕과 근심, 그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자신을 침범하게 될 것이므로, 그는 절제의 길을 따르고,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합니다.”(D3.54)


감각능력에 대한 수호의 가르침이다.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정형구인데, 특히 디가니까야 제1품 계행다발의 품에서 강조되어 있다. 감각대상에 대하여 시각능력을 수호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상과 연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감각의 문을 수호하는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감각기관을 제어하지 못했을 때 마음은 감각대상에 가 있게 되는데, 이는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에 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이성을 보았을 때 그렇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에 대한 것이다. 식욕과 성욕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욕구는 존재와도 관련이 있다. 식욕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있고 성욕은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있다.

수행자는 욕망의 세계를 탈출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감각대상에 대하여 특별한 마음을 내야 한다. 예를 들어 매혹적인 여인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S35.127)


상윳따니까야 바라드와자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위 말은 바라드와자가 부처님의 말씀하신 것을 우데나 왕에게 말한 것이다. 여인들을 가족처럼 대하라는 것이다. 어머니 뻘 되는 여인은 어머니처럼 대하고, 누이 뻘이 되면 누이처럼 대하고, 딸 뻘이 되면 딸처럼 대하라는 것이다.

한번 탐욕의 불길에 휩싸이면 어떻게 될까?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될 것이다. 여인들을 가족처럼 대해야 함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우데나 왕은 “바라드와자여, 마음이 동요하면 때때로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탐욕을 일으키며, 자매 같은 여인에 대하여 탐욕을 일으키며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탐욕을 일으킵니다.”(S35.127)라고 말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니까야를 보면 도처에 사띠가 강조 되어 있다. 그래서 ‘새김을 확립하라’라는 말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띠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 각주를 보면 “이것은 단순히 마음챙김이나 알아차림만이 아니라 법에 대한 기억을 필수적인 것으로 한다.”(수타니파타, 1375번 각주)라고 했다.

사띠는 수행용어이기도 하고 일상용어이기도 하다. 수행에서나 일상에서는 늘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는 것도 사띠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초기경전, 니까야를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바라드와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우데나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이 몸은 발바닥부터 머리 가운데 아래 피부 끝까지 여러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개별적으로 이 몸에는 머리카락, 몸털,…관절액, 오줌이 있다고 이와 같이 깊이 관찰해야 한다.”(S35.127)


이는 부정관 수행에 대한 것이다. 여인에 대하여 욕정이 일어났을 때 여인을 가족처럼 여겨도 소용이 없을 때 부정관을 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부정물로 가득 찬 신체에 대한 관찰은 갈애에 수반되는 육체적 쾌락이나 성적 충동을 제어하고 소멸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정관은 몸을 감각적으로 매력적인 것이라 인식하는 지각의 토대를 무너뜨림으로써 육체적 쾌락의 욕구를 소멸시킬 수 있다.”(수타니파타, 1313번 각주)


아무리 매력적인 육체도 한꺼풀만 벗기면 혐오스러운 것으로 가득하다. 똥과 오줌과 고름으로 가득한 것이다. 마치 여인을 시체보듯이 한다면 욕정이 일어날 수 있을까?

좌선을 하다 보면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몸에서는 통증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과거에 있었던 일도 일어났다고 사라진다. 부끄럽고 창피한 일도 떠오른다. 움직이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지난 일을 되돌아 본다. 감각적 욕망으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각이 요구하는 대로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 삶을 살지 못한 것이다. 마치 정신을 빼앗긴 것이나 같다. 그러나 앉아 있으면 나의 삶을 사는 것 같다.

요즘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캄캄하다. 사무실 명상공간에서는 불을 꺼 놓는다. 마치 동굴처럼 캄캄하다. 시각적으로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한다. 그러나 청각의 대상은 막을 수 없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명상공간에 앉아 있다 보면 어느 순간 고요할 때가 있다. 차 지나가는 소리도 전철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때가 몇 초 있다. 이럴 때 고요를 맛본다. 이럴 때 동굴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해 본다.

요즘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앉아 있는다. 오늘은 마침내 한시간 앉아 있었다. 목표가 달성된 것이다. 더구나 다리 저림 현상을 극복하기도 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이다. 그런데 오늘 좌선하면서 일시적으로 고요를 맛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자동차 소음과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일시적으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음이 없는 산속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옛날 수행자들은 동굴에서 수행했다고 하는데 소음은 완벽하게 차단되었을 것이다. 조용한 수행처에서 앉아 있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난다.


2022-12-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