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의도와 결합된 행위 알아차리기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3. 12:36

의도와 결합된 행위 알아차리기


오늘 한시간 행선을 했다. 이른 오전에 해야 할 일을 하고 난 다음 시간이 남아서 행선과 좌선하기로 했다. 아니 시간을 만들어서 한 것이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나면 보상심리가 발동되는데 이런 때 유튜브를 보게 된다. 그러나 유익한 것 딱 하나만 보고 명상공간으로 향했다.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많다. 글도 의무적으로 쓴다. 매일 하나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요즘 쓰다 보니 매일 세 개 올리고 있다. 생각날 때마다 좋은 생각이 떠 오를 때마다 놓치지 싶지 않아 글로 꽁꽁 묶어 두고자 하는 것이다.

가볍게 몸을 풀듯이 경행을 했다. 무엇이든지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경행대를 걷는다고 하여 곧바로 집중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물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운동하는 것과 같다.

가볍게 걷는다고 집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집중이 없을 때 경행하면 지루하다. 오분도 버티기 힘들다. 경행이 행선이 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 암송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경행하면서 암송했다. 빠다나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내지 않고 속으로 암송했다. 경행하면서 암송할 때는 눈을 감는다. 외부 자극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함이다.

암송을 하고 나면 확실히 효과를 본다. 흐트러진 몸과 마음이 정리된 것 같다. 마치 자석을 댔을 때 쇳가루가 일어나는 것 같다. 또한 시야가 좁아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집중이 없을 때는 시각, 청각 등이 개방되어 있다. 그래서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경행하면서 암송을 하고 나면 시야가 좁혀진 듯 하다. 더구나 눈을 감고 걸었기 때문에 시각도 좁혀진 듯 하다.


시야가 좁혀진 듯 했을 때 행선을 하면 집중이 잘된다. 발의 움직임에 마음이 잘 따라 가는 것이다. 이럴 때 행선을 하면 지루하지 않다. 오분이 아니라 오십분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행선을 할 때 동시에 세 가지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의도와 행위와 느낌에 대한 것이다. 이 세 가지에는 모두 아는 마음이 있다. 의도를 했을 때 아는 마음이 있고, 행위를 했을 때 아는 마음이 있고, 느낌을 받았을 때 아는 마음이 있다.

아는 마음은 지각하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언어적 형성에 따른 지각도 지각도 있지만 언어적 형성을 떠난 지각도 있다. 발을 옮기려고 할 때 이를 아는 마음은 언어적 개념이기도 하지만 언어적 개념을 떠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발을 옮기려고 하는 것을 그냥 아는 것이다.

행선 초보자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볼 수 없다. 이번 행선에서는 세 가지로 나누어 보기로 했다. 먼저 의도를 보는 것과 다음으로 행위를 보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낌을 보는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지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경우는 없다. 행선에서 의도는 멈추어 있다가 발을 이동을 하려 할 때 일어난다. 왼쪽 발을 들것인가 오른쪽 발을 들 것인가? 의도한대로 발이 들려진다.

몸은 의도한대로 움직인다. 몸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없다. 다만 신진대사하는 것은 예외이다. 그 외 어떤 행위도 의도에 따른다. 이렇게 본다면 의도가 개입되지 않는 몸은 마치 나무토막과도 같다.

오른쪽 발을 들고자 의도가 일어났을 때 오른쪽 발은 나아간다. 이 때 앎이 이루어진다. 발을 떼는 것을 알고, 발을 올리는 것을 알고, 발을 미는 것을 알고, 발을 내리는 것을 알고, 발을 딛는 것을 알고, 발을 누르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른바 육단계 행선을 하는 것이다.

의도 알아차리기 행선을 여러 번 했다. 명상공간 카페트 위를 몇 차례 왕복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는 것 같다. 이때 의도와 알아차림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된다.

어떤 행위이든지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게 된다. 행선에서 의도 알아차리기 연습을 할 때 의도는 원인이고 알아차림하는 것은 결과에 해당된다. 그러나 행선 육단계를 모두 의도와 알아차림으로 하기 힘들다.

행선에도 집중의 깊이가 있다. 집중이 깊지 않을 때는 육단계 행선 전단계를 모두 알아차리기 힘들다. 처음 발을 들려고 의도할 때 알아차림이 있을 뿐이다. 이후 육단계는 행위를 알아차림하는 것이 된다.

찬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 28일’(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보면 육단계 행선 모두를 알아차림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발을 떼기 전에 의도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발을 들기 전에 의도를 알아차리고, 발을 밀기 전에 의도를 알아차리는 등 육단계 모두에서 의도를 아는 것을 말한다.

행선 초보자에게 육단계의 의도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래서 발을 이동하기 전에 의도를 알아차림 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그대신 육단계 행선이 시작되면 행위를 알아차려야 한다.

발을 떼었을 때 알아차림하고, 발을 들었을 때 알아차림 하고, 발을 밀었을 때 알아차림해야 한다. 이는 의도를 알아차림 하는 것과 반대이다. 의도가 있어서 행위가 있게 되는데, 행위를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이때 행위는 원인이 되고 알아차림은 결과가 된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 행선에서도 원인과 결과를 볼 수 있다. 이는 의도, 행위, 알아차림이 된다. 발을 이동할 때 의도가 있게 되는데 이때 알아차림이 있게 된다. 이때 의도는 원인이 되고 알아차림은 결과가 된다.

발을 떼고 나서 육단계 행선을 할 때는 집중이 깊지 않으면 각 단계마다 의도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래서 육단계 행선을 할 때는 발을 들려는 의도-알아차림, 발을 떼기-알아차림, 발을 들기-알아차림, 발을 밀기-알아차림, 발을 내리기-알아차림, 발을 딛기-알아차림, 발을 누르기-알아차림이 된다. 앞에 것이 원인이고 뒤에 것은 결과가 된다.

행선을 할 때 의도 알아차리기, 행위 알아차리기, 느낌 알아차리기가 있다고 했다. 여기서 느낌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사대를 아는 것이다. 사대 중에서도 풍대와 지대를 아는 것이다. 어떻게 아는가?

발을 올릴 때는 경쾌하다. 발을 밀 때는 날아가는 것 같다. 이처럼 경쾌하고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풍대를 아는 것이다. 풍대는 사대 중에서도 움직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발을 디딜 때는 바닥에 발이 닿는다. 발이 바닥에 닿으면 누르게 된다. 이때 부드럽거나 딱딱한 느낌을 갖게 된다. 양탄자 위라면 부드러운 느낌이고, 송판 위라면 딱딱한 느낌일 것이다. 이외 같이 부드럽거나 딱딱한 느낌을 아는 것은 지대에 대한 것이다.

행선을 하면 사대 중에서 풍대와 지대를 알 수 있다. 나머지 화대와 수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행선으로 알 수는 없지만 몸이 덥다거나 춥다고 느낄 때 화대를 알 수 있다. 수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역시 행선으로 알 수 없지만 사대가 흩어지지 않게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대를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돈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수행하는 것은 돈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역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은 일반사람들이 보기에는 쓸데 없고 의미 없는 일로 보인다. 좌선한다고 앉아 있는 것 자체를 우습게 보는 것이다. 또한 행선하는 것 자체를 시시하게 보는 것이다.

수행하는 방법으로서는 좌선과 행선이 있다. 여기서 가장 가치가 없고 가장 의미없는 일로 보이는 것이 행선이다.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듯이 슬로모션으로 발을 움직이는 행위를 보면 무의미하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무의미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수행을 하면 수행을 맛을 알게 된다. 감각적 욕망에 길들여진 사람은 알 수 없다. 마음이 늘 감각대상에 가 있는 사람에게는 단 오분도 앉아 있기 힘들고, 단 오분도 행선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한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을 것이다.

오늘 행선을 한시간 했다. 이렇게 오래 제대로 한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의도 알아차리기, 행위 알아차리기, 느낌 알아차리기, 이렇게 세 분야로 나누어서 했기 때문이다.

세 분야로 나누어서 하다가 통합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다. 의도가 결합된 행위와 느낌을 알아차리는 행선을 말한다. 세 가지를 다 볼 수 없으면 두 가지만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은 의도와 행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의도가 있어서 발을 이동하고, 발을 옮기는 행위가 있어서 알아차림한다. 의도, 알아차림, 육단계 행위, 각 단계별 알아차림하는 것이다. 의도가 있어서 발을 옮기는 것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되고, 또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에도 해당된다.

발을 옮기는 행위가 있어서 이를 알아차림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되고, 또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에도 해당된다. 행선함으로 인하여 위빠사나 지혜 두 단계를 아는 것이다.

행선을 더 확장하면 생멸을 아는 지혜도 되고, 소멸을 아는 지혜도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행선으로 집중된 마음은 좌선의 집중으로 그대로 가져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행선을 하고 난 다음 좌선에 임하면 사띠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늘 모처럼 행선을 한시간 했다. 남들이 이런 행위를 본다면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볼 것 이다. 그러나 진리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보이는데 있다. 행선에서 실로 많은 것을 건질 수 있다.


2022-12-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