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절대시 했을 때
나는 스승이 없다. 믿고 따를 수 없는 스승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명확히 해법을 제시했다.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M60)
부처님은 스승이 없을 때 가르침이 스승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부처님이 안계신 오늘날 무엇이 스승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경전이다. 부처님 원음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니까야 경전이야말로 이 시대의 스승이 되고 있다.
두 가지 스타일의 법사가 있다. 한부류는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고, 또 한부류는 경전에 근거해서 말하는 사람이다. 어느 부류의 말일 믿어야 할까? 스승이 없다면 당연히 후자를 따라야 한다.
며칠전 행선에 대한 글을 썼다. 유튜브에서 당혹한 것을 보고 느낌을 쓴 것이다. 상식을 파괴하는 스님의 파격에 놀랐다. 그리고 분노가 일어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수행자모임 카톡방에 올렸다.
모두 침묵했다. 그 중에 한사람이 장문의 글을 올렸다. 이전에도 충격 먹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견해를 아래와 같이 모두에서 밝혔다.
"쉐우민 수행처의 창시자이신 우 꼬살라 사야도는 항상 이렇게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마하시 수행처이고 마하시 수행법으로 가르친다" 그래서 그 제자가 마하시 수행법을 비방한다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자신의 스승을 비방하는 일이고 스스로의 수행법을 비난하는 일이다, 라고 까지 말할수 있을듯합니다."
위빠사나에 마하시전통이 있다. 마하시사야도가 경전과 논장에 근거하여 새롭게 개발한 위빠사나 수행방법을 말한다. 현재 미얀마에서 가장 많은 수행센터가 있고 전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우 빤디따 사야도, 우 자나카 사야도, 우 쿤달라 사야도, 우 코살라 사야도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도 있다. 이들 직제자들은 각자 선원을 창시하여 전세계에 마하시방식 위빠사나 수행을 알리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른바 마음보는 수행으로 알려져 있는 심념처에 대한 것이다. 사념처 중에서 심념처를 말한다. 오로지 심념처 하나에만 몰입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이것만이 진실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독단이나 독선이라는 말은 절대와 같은 말이다. 누군가 "이것만이 진리이다."라든가, "오로지 이것만이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다른 것은 거짓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외도의 사견에 대해서 "이것만이 진실이다.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로지 심념처만 강조하면 사띠지상주의에 빠질 수 있다. 자나깨나 오로지 사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법문할 때나 질의응답할 때나 사띠만을 이야기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마음보는 수행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을 보는 수행도 있고, 느낌을 보는 수행도 있고, 법을 보는 수행도 있다. 그래서 마음보는 수행으로 유명한 우 코살라 사야도는 심념처뿐만 아니라 신념처 등을 골고루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리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우리 몸과 마음에 있다.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 진리를 볼 수 있다. 가장 보기 쉬운 곳은 호흡이다. 호흡은 신체적 형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몸관찰, 즉 신념처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가장 강한 대상을 관찰하는 수행이다. 좌선할 때 가장 강한 대상은 호흡이다. 그래서 주관찰대상은 호흡이 된다. 그러나 다리저림 등 통증이 심하면 관찰대상은 바뀐다. 통증을 대상으로 하는 느낌관찰, 즉 수념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위빠사나 대상은 수시로 바뀐다. 마음관찰도 그 중에 하나일 뿐이다.
마음관찰을 절대시 했을 때 다른 것을 무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번에 어느 스님이 행선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웃어버린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사념처는 동시적으로 관찰될 수 있다. 이는 좌선이나 행선으로도 확인된다. 호흡이라는 몸관찰, 통증이라는 느낌관찰, 아는 마음을 또 아는 마음관찰, 현상에 대한 법관찰은 동시에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한가지 것만 고집해서는 안된다.
마하시전통에서는 좌선과 행선을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다. 마음보는 수행에서 행선을 등한시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런데 행선은 좌선 못지 않게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등을 말한다.
행선은 발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또한 행선을 하면 집중력을 키울 수 있다. 행선에서 집중된 힘을 좌선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행선은 좌선의 예비수행이라고도 볼 수 있다.
행선과 관련해서 빤냐완따 스님에게 카톡을 보냈다. 스님은 장문의 글을 보내 왔다. 행선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명칭 또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하다보면 저절로 떨어져 나갑니다. 번거로워서 붙일 일이 없게 됩니다. 명칭을 붙이거나 감각에 대한 알아차림은 집중력을 빠르게 향상시켜 줍니다. 특히 움직이는 감각이나 느낌은 마음의 움직임과 직결되어 있어, 그것에 대한 분명한 앎은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빤냐완따 스님은 행선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스님이다. 좌선도 좋지만 행선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마음의 본성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행선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과 같다. 이는 행선을 무시하는 스님과 대조된다.
행선은 처음에는 명칭을 붙여서 한다. 이는 집중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는 암송하면 집중이 되는 것 같다. 암송의 힘으로 행선을 하고, 행선에서 집중된 힘을 좌선으로 옮겨 가게 하면 최상이 되는 것 같다.
생업에 바쁜 재가불자이다. 집중수행을 하고 싶어도 시간내기가 힘들다. 그래서 사무실 한켠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만든지 2년 되었다. 그동안 잘 활용하지 못했다. 요즘은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하루에 30분만이라도 앉아 있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 좌선을 한시간하고 행선도 한시간했다. 수행전문가가 본다면 웃어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첫걸음이 중요하다. 일단 시동을 걸어 놓으면 달리게 되어 있다.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이다. 그럼에도 집중이 와서 맛을 느꼈을 때 기다려 진다. 일을 빨리 끝내고 앉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로 부터 지도를 받아야 할 것이다. 아직 지도받을 정도로 무르익지 않았다. 좀더 습관화 된다면 호두마을 주말 수련회에 참가하여 점검받고 싶다.
2022-12-05
담마다사 이병욱
'수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나를 부정한 부처님의 설법을 보면 (0) | 2022.12.28 |
---|---|
축적의 효과를 알기에 (0) | 2022.12.07 |
의도와 결합된 행위 알아차리기 (0) | 2022.12.03 |
마하시방식 행선에 크게 웃어 버린 스님 (0) | 2022.12.02 |
통증의 파도와 생각의 파도가 밀려 왔을 때 (0) | 2022.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