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를 부정한 부처님의 설법을 보면
하루 30분이상 앉아 있기로 했다. 자신과의 약속이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사실 30분 앉아 있기가 힘들다. 선원에 들어가서 집중수행한다면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는 것은 습관들이기 위해서이다.
흔히 수행한다고 말한다. 무언가 닦는 것을 연상케 한다. 더러워진 거울을 닦으면 본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본래 수행의 의미는 이와 다르다.
빠알리어로 수행을 뜻하는 말은 바와나(bhāvanā)이다. 이는 문자적으로 ‘존재 (existence)’를 뜻하는 것이긴 하지만 ‘mental development’의 뜻이다. 정신을 계발하는 것이다. 정신을 계발하여 또 다른 상태로 되는 것이다.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사향사과가 좋은 예이다,
수행을 하는 것은 현재와 다른 상태가 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신상태를 계발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계발하는가?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똑 같은 행위를 매일 매번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수습(修習)이라고도 말한다.
하루 30분 이상 앉아 있기로 했으니
하루 30분 이상 앉아 있기로 했으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앉아 있어야 한다. 매일 하다 보니 대개 비슷한 시간에 앉는다. 오후 5시가 되면 앉는다. 이 시간이 가장 적당한 것 같다. 볼 일을 다 보고 난 다음 잠시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앉아 있을 시간이 되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말한다. 감이 온 것이다. 잘 집중될 것 같았다. 수행은 집중이다. 집중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집중이 되지 않으면 단 5분도 앉아 있기 힘들다.
어제 오전에 앉아 있고자 했다. 감이 왔다. 안될 것이라고. 그럼에도 앉아 보았다. 그러나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온갖 망상에 휩싸였다. 망상을 깨보니 마치 꿈을 꾼 것 같다. 그 짧은 시간에 만리장성을 쌓은 것 같다.
항상 좌선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시간대 별로도 다르다. 대체로 감이 온다. 느낌이 좋지 않으면 그만 두어야 한다. 느낌이 오면 그때는 해야 할 때이다. 오늘 오후에 그랬다.
사띠가 확린된 상태에서 일어난 생각은
오후 5시 반이 되자 느낌이 왔다.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어느 정도 집중이 된 상태였다. 그것은 유튜브로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가기 전에 앉아 있고 가고자 했다.
먼저 행선을 했다. 느낌이 좋았기 때문에 발에 집중이 잘 되었다. 마음이 발의 움직임을 잘 따라 갔다. 이렇게 마음이 발의 움직임에 묶여 있다 보니 의도 또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행선을 할 때 멈출 때가 있다. 그때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감각을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이를 어떤 이는 ‘스캔한다’라고 말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스캔한다는 것이다.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는 가능한 것 같다. 심지어 손을 드는 행위까지 스캔이 되기 때문이다.
행선은 잘 되었다. 행선할 때 집중이 되지 않으면 단 5분도 버티기 힘들다. 그럼에도 30분 가량 했다는 것은 집중이 잘 되었음을 말한다. 이런 상태라면 한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을 것 같았다.
행선하면서 생각을 한다. 이때 일어나는 생각은 좋은 것이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보석 같은 생각이다. 망상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삼겹살에 소주 마시는 것과 비교했을 때
행선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삼겹살에 소주 마시는 것과 지금 이 상태와 어느 것이 더 좋은지 생각해 본 것이다.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나 마시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당연히 삼겹살에 소주 생각이 간절할 것이다. 그러나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행선을 하면 간절하지 않다. 지금 이대로가 더 좋은 것이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대부분 탐욕으로 먹는다. 또한 음식을 갈애로 먹는다. 어떤 이는 분노로 먹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음식이 음식을 먹는 것처럼 된다. 마치 술이 술을 마시는 것과 같다.
음식을 먹을 때 클라이막스는 목구멍에서 넘기는 것이다. 음식을 삼켰을 때 강한 쾌감을 느낀다. 술도 마찬가지이다. 소주가 목구멍에 감겨 들어갈 때 술 맛이 난다고 말한다.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 재미로 살고 술을 마시는 재미로 산다. 이런 삶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먹는 재미가 없으면 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말한다.
우리 몸은 항상 건강한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듦에 따라 노화된다. 소화기관 역시 노화된다. 언젠가 고장 날 것이다. 소회기관에 문제가 생기면 음식을 먹을 수도 술을 마실 수도 없다. 그럴 때는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할까?
행선하면서 먹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목구멍을 넘어 갈 때까지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과식했을 때 괴로울 것이다. 술을 너무 취하도록 마셨을 때 괴로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또다시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소화기관이 망가져서 더 이상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을 때까지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행선을 하면 발걸음이 가볍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행선을 하면 몸이 날아 갈듯이 사뿐하다. 마음도 편안하고 안정되어서 지금 이 상태에 계속 머물고 싶어 한다. 삼겹살에 소주 마시는 것보다 더 낫다고 보는 것이다.
한번 사띠가 깨지면
행선을 30분 이상 했다. 이제 좌선을 해야 한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좌선으로 가져 가면 된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도중에 일을 했다. 화분을 옮기는 일이다. 화분을 명상공간으로 옮긴 것이다. 이런 행위로 인하여 사띠가 약화되었다.
한번 사띠가 깨지면 복원되기 힘든 것 같다. 그래서 명상하는 사람에게 말 시키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언어적 행위를 하는 순간 이전의 상태가 깨지기 때문이다.
다시 행선을 했다. 그러나 좀처럼 강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전과 상태가 확연하게 다름을 알았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를 기둥에 묶어 두는 것처럼, 마음을 발의 움직임에 묶어 두고자 했으나 끈이 너무 길다.
십여분 행선을 하다가 자리에 앉았다. 좌선을 할 때는 불을 끈다. 형광등을 끄자 마치 동굴처럼 어두웠다. 어둠 속에 나홀로 눈감고 앉아 있을 때 약간은 두려움이 일어났다. 산중에서 나홀로 수행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마음을 호흡에 묶어 두고자 했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묶어 두는 것이 사띠이다. 사띠의 끈이 짧으면 짧을수록 집중이 잘된 상태이다. 사띠의 줄이 느슨하면 망상이 치고 올 수 있다. 사띠의 줄을 놓쳐 버리면 온갖 망상 속에 있게 된다.
좌선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사띠가 어느 정도 확립된 상태에서 생각하는 것은 망상과 다르다.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생각이다. 가르침, 담마에 대한 것도 많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떠 오른 생각은 보석 같은 것이다.
타종교인도 명상을 말하는 세상에서
타종교인도 명상을 말한다. 불교에서만 명상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타종교인은 자아를 찾자고 말한다. 어떤 자아를 말하는 것일까?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아마 ‘참나’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언젠가 종교다원주의자의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참나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또는 하나님은 같은 의미라고 했다. 존재의 근원(Reality)은 모두 같다는 것이다. 타종교인이 말하는 자아는 이런 것일까?
불교에서는 자아를 부정한다. 불교에서는 무아를 말한다. 오온을 관찰하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말한다. 불교에서 자아를 말한다면 그는 불교인이 아니라고 보면 틀림 없다. 그럼에도 참나, 진아, 본래면목 등 존재의 근원이 있다고 말한다. 명상에서 사띠가 확립되면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혹시 이 아는 마음을 자아 또는 참나라고 하는 것일까?
자아를 주장하는 자와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 자
요즘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다. 머리맡에서 있어서 읽는 것이다. 어제 15번경 인연의 큰 경에서 ‘자아를 주장하는 자’,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 자’, ‘자아를 인식하는 자’에 대해서 읽었다.
자아를 주장하는 자는 어떤 자를 말하는가? 이는 물질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몸이라는 물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것이라고 자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자는 물질을 여의어도 자아를 지닌 자라고 말한다. 몸이 있으나 없으나 자아는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견해에 묶여 있다.”(D15.27)라고 했다.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 자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물질을 가졌든 물질을 여의었든 자아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견해에 묶여 있지 않다.”(D15.32)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아를 시설하지 않는다.”(D15.32)라고 했다.
자아를 주장하는 자와 주장하지 않는 자가 있다. 전자는 외도의 주장이고 후자는 부처님의 주장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잘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삼장을 배운 자, 이장을 배운 자, 일장을 배운 자, 또는 한 니까야라도 배운 자, 또는 통찰하여 노력하는 자는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다.”(Smv.505)라고 했다.
자아를 주장하는 자는 견해에 묶여 있다.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자아를 시설했을 때, 즉 자아를 설정했을 때 자아가 있게 됨을 말한다.
느낌을 자아를 인식하는 자가 있는데
나라고 부르는 것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을 나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견해라고 했다. 그런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언어로써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떨까? 느낌, 지각, 형성, 의식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사온에 대하여 부처님은 ‘자아를 인식하는 자’로 설명했다.
자아를 인식하는 자가 있다. 이는 수, 상, 행, 식을 자신의 자아로 여기는 것이다. 어떻게 인식하는가? 이는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이다.”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느낌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일까? 이는 상온과 행온과 식온은 느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다발에는 느낌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있고, 느낌은 세 가지 다발에서 분리되지 않는 본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느낌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일반사람들은 이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이런 견해는 무너진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고 부서지는 것이고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D15.35)라고 했기 때문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이를 나의 자아라고 할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즐거운 느낌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즐거운 느낌이 사라지면, ‘나의 자아는 사라졌다.’라고 생각해야 한다.”(D15.3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느낌을 자아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느낌을 자아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수행자가 자아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주장하는가? 이는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자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진다. 나의 자아는 느낌의 원리를 지녔기 때문이다.”(D15.37)라고 말하는 자도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에게는 느낌이 있다. 이런 느낌을 자아라고 여기기 쉽다. 심지어 수행자도 느낌을 자아로 착각하기 쉽다. 말로는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명상에 들었을 때 아는 마음을 보고서 “나의 자아는 느껴진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자아가 느껴진다는 것은 아마도 참나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참나를 부정한 부처님의 설법
부처님은 참나를 부정했다. 마음속에 고정된 실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타종교인은 명상을 말하면서 자아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 불교인은 참나를 말한다. 명상 중에 아는 마음을 참나라고 보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참나는 모두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러므로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자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진다. 나의 자아는 느낌의 원리를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D15.37)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아난다여, 참으로 수행승은 느낌을 나라고 인식하지 않으며, 또한 나를 느낌이라고 인식하지 않으며, ‘나의 자아는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낌의 원리를 지녔기 때문이다.’라고도 인식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인식하지 않아서 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동요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까닭에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들어,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D15.38)
부처님은 느낌을 나라고 인식하지 말라고 했다. 어떤 느낌이든지 조건발생적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느낌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적으로 발생되는 것이고 부서지는 것이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고 소멸되고야 마는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에 대하여 자아라고 여긴다면 불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글을 쓰다가 뜻밖에 소득을
매일 30분 이상 앉아 있기로 했다. 오늘도 실천을 했다. 비록 생업에 묶여 있어 짧은 시간을 할 수밖에 없지만 습관 들여 놓으면 언젠가는 생활화 될 것이다. 명상을 생활화 했을 때 집중수행 들어간다면 자연스럽게 잘 될 것 같다. 마치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으로 그대로 좌선으로 가져 오는 것과 같을 것이다.
오늘 행선과 좌선에 대한 글을 쓰다가 뜻밖에 소득을 올렸다. 그것은 명상중에 느낄 수 있는 자아 또는 참나에 대한 것이다. 타종교인은 명상을 말하면서 자아를 찾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부처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불교에서 명상을 좀 했다는 사람들은 참나를 말한다. 타종교인이 명상 중에 자아를 찾자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부처님은 참나를 말한 적이 없다. 참나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니까야 경전에 수도 없이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상 중이든 아니든 부처님은 자아나 참나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느낌에 불과하다고 했다. 부처님은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자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진다. 나의 자아는 느낌의 원리를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D15.37)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를 참나 부정으로 본다. 나만 그런 것일까?
2022-12-2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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