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내가 수행을 하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30. 08:16

내가 수행을 하는 것은


오늘 새벽 행선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행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로 되는 것이 아니냐고.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수행일 뜻하는 빠알리어 바와나(bhāvanā)가 문자적으로 존재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신능력일 계발하여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수행을 한다고 말하면 좌선을 떠올리게 한다. 가부좌를 하고 눈 감고 앉아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세상에 가장 거룩한 모습이다. 수행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상태로 된 것이다. 평소 자신과 다른 상태가 된 것이다. 이렇게 자신과 다른 상태가 되었을 때 '수행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과 다른 상태가 되는 경우는 많다. 반드시 좌선으로만 다른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암송으로도 다른 상태가 될 수 있고 행선으로도 다른 상태가 될 수 있다. 암송과 행선과 좌선으로 다른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들어가려면 문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다른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들어가는 문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암송, 행선, 좌선이라고 본다. 공통적으로 집중을 요한다.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암송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행선은 발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이다. 좌선은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는 마음을 대상에 묶어 두는 것과 같다. 이처럼 마음을 대상이라는 기둥에 묶어 두었을 때 이를 사띠한다고 말한다.

마음을 대상이라는 기둥에 묶어 두려면 끈이 있어야 할 것이다. 끈이 짧으면 짧을수록 집중은 강화될 것이다. 사띠가 강력한 것이다. 끈이 느슨하면 어떻게 될까? 사띠의 힘이 약해서 잡념이 치고 들어 올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사띠가 확립되면 잡념은 발을 붙이지 못한다. 잡념이 망상으로 전개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사띠가 확립되면 다른 상태가 된다. 이는 다른 존재가 됨을 말한다. 이전의 내가 아니다.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는 악하고 불건전한 일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망이 일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사람들은 감각으로 살아간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를 감각적 욕망이라고 말한다. 눈으로는 매혹적인 형상을 즐기고, 귀로는 매혹적인 소리를 즐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오감으로 즐기는 것이다. 이렇게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산다면 다른 상태로 들어갈 수 없다.

감각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수행이 있을 수 없다. 정신능력을 계발하여 다른 상태로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한다. 감각을 즐김으로 오는 쾌감이 강렬해서 그 어떤 것도 시시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겹살에 소주 마시는 것에 대해서 인생 최대의 행복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여러 종류의 행복이 있다. 행복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삼겹살에 소주 마시는 것도 행복이지만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가길에 느끼는 충만감도 있다. 전자는 거친 행복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잔잔한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느낌에 대한 것이다. 거친 행복보다는 잔잔한 행복이 더 오래간다.

거친 행복감은 일시적이다. 삼겹살에 소주를 마실 때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끝이다. 절정에 이르러서 허무하게 스러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다시 행복을 맛보고자 다시 시도한다. 이는 다름 아닌 욕망이다. 그래서 감각을 추구하는 삶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라고 말한다.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같은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로 살아간다. 감각을 즐기는 삶이고 감각에 의존하는 삶이다. 니까야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최상의 감각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 '현법열반'이라고 말한다. 이는 외도의 견해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만을 주장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M131)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감각을 즐기라고 하지 않았다. 지금 이순간에 해야 할 것은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그때그때 관찰하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면 정신이 그쪽에 빠져 있어서 악마의 영역에 있는 것과 같지만, 그때그때 알아차리면 악마에 정복당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는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가 지금 여기에서 감각을 즐길 때 "이것이야말로 행복이고 이것이야말로 열반이다."라고 말한다. 삼겹살에 소주를 마실 때 소주는 열반주가 된다.

무엇이든지 절정에 이르고 나면 허무하게 스러진다.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여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남는 것은 허와 무 밖에 없다. 삼겹살을 목구멍에 넘기는 순간 끝이고, 소주를 목구멍에 넘기는 순간 끝이다.

감각적 욕망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은 일시적이고 거친 것이어서 충족되고 나면 허무하게 스러진다. 허무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다시 감각을 추구한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로 살아가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은 허무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 같다. 죽으면 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노인의 성문제를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에서처럼, “죽어도 좋아!”라며 감각을 즐기는 것인지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을 즐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악덕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삶이 왜 악덕인가? 이는 탐욕으로 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탐욕은 십악중의 하나이다. 천수경 참회게에서는 중죄라고 했다. 니까야에서도 십악은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감각을 즐기는 사람들은 허무주의자이기 쉽다. 이는 단멸론을 말한다. 감각을 즐기는 자가 왜 단멸론자가 되기 쉬운가? 감각을 즐기는 것이 그다지 떳떳하지 않은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감각을 즐기는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죽으면 끝이다라는 견해에 동조하는지 모른다. 감각을 즐기다 보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허무주의자가 되는지 모른다.

행복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거친 행복도 있고 잔잔한 행복도 있다. 선정의 행복도 있고 열반의 행복도 있다. 이때 행복이라는 말을 공통적으로 사용하는데 니까야에서는 수카(sukha)라고 한다.

열반도 행복이라고 했다. 어떻게 열반이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열반은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열반의 행복은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그럼에도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Dhp.204)라고 했다. 이는 무슨 말인가? 놀랍게도 지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에 최상의 행복이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그래서 법의 장군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벗이여, 또한 수행승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은 것도 아닌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듭니다. 지혜로 보아, 그에게 모든 번뇌는 부서집니다. 벗이여, 이러한 이유로 실로 열반은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습니다.”(A9.34)

외도들도 행복을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감각을 즐기는 것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이런 행복을 열반이라고 말한다. 이런 열반에 대하여 현법열반이라 하는데 이는 유사열반, 가짜열반이다.

열반은 지각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역설적으로 지각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어서 최상의 행복이 된다. 불교인들은 이와 같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열반을 빠라마수카라 하여 최상의 행복, 궁극적 행복이라고 말한다.

수행을 왜 하는가? 다른 상태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최상의 행복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궁극적으로는 열반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수행을 하면 다른 상태가 된다. 몸과 마음에 변화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전과는 다른 상태가 되었을 때 느끼는 행복이 있다. 약간의 선정상태가 되어도 잔잔한 행복을 느낀다. 이런 행복은 감각을 즐기는 행복과 비할 바가 아니다. 삼겹살에 소주마시는 것보다 더 낫다. 이런 맛에 다른 상태가 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른다.


2022-12-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