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수행하느냐고 묻거든
고요한 새벽이다. 지금 시각 3시 39분, 가벼운 행선을 끝내고 스탠드 불을 켰다. 그리고 스마트폰 메모앱을 열었다. 어제 질문 받은 것에 대하여 답을 쓰기 위한 것이다.
어제 사띠에 대해서 썼다. 사띠가 왜 새김인지, 왜 새김이 사띠의 최상의 번역어인지에 대해서 써 본 것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견해일 수 있다. 그러나 니까야에서 본 것과 실행을 해 본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느낀 것을 쓴 것이다.
글을 보고서 어떤 이가 질문을 했다. 암송을 하고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하다는 것이다. 경전 문구를 이용하여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좋으나 왜 수행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빠졌다는 것이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그것도 장문의 글이다. 상황 설명을 하려 하다 보니 글이 길어진다. 또한 경전 문구를 인용할 때 설명을 하려 하다 보니 길어 진다. 체험에 대한 설명 역시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글에 본질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왜 수행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왜 수행을 하는 것일까? 더구나 수행기까지 올리고 있다. 이런 것도 어쩌면 자랑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불리한 것도 올린다. 수행 실패담 같은 것이다. 앉아 있었는데 5분도 견디지 못했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이처럼 불리한 것이나 단점을 쓰면 이것이 약점이 될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를 빌미로 공격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수행기를 쓰지 말라고도 충고한다. 개인적인 체험을 올려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 경험하고 난 다음 올려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견해를 달리한다. 그 사람이 성장하려면 성찰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찰이 있어야 어제와 다른 오늘이 있다. 반성이 없다면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다. 매일매일 새로워지려면 지난 일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수행기를 작성하는 것은 어제보다 더나은 오늘이 되기 위해서이다.
나는 왜 수행을 하는 것일까? 다시 묻는다. 그 사람도 궁금했던 것 같다. 왜 매일 암송을 하고, 왜 매일 행선을 하고, 왜 매일 좌선을 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이뿐만이 아니다. 매일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게송을 외우는 등의 일도 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수행이다. 수행이라 하여 마음을 닦는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러워진 거울을 닦아 본 모습이 드러나는 것도 수행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른 상태가 되는 것이다.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사향사과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 할 것이다.
어제 질문을 받고 생각해 보았다. 수행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답을 얻자고 물어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인이 아니라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인이라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것은 한마디로 “지혜를 얻기 위해 수행을 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있다. 구원의 종교도 있고 사랑의 종교도 있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도 지혜 나름이다. 어떤 지혜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위빠사나 지혜일 것이다.
불교에 여러 수행법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다른 상태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난 뒤”(S45.8)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먼저 감각적 욕망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다른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지혜를 얻어야 한다. 이를 위빠사나지혜(위빠사나빤냐)라고 한다.
위빠사나지혜를 얻기 위해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 그런 지혜는 한마디로 생멸의 지혜이다. 생멸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잘 관찰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관찰하는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른바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누군가 “왜 수행 합니까?”라고 물어 보았을 때 난감하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한 것이다. 범위가 너무 광범위한 것이다. 좁혀서 말하면 답도 쉬워질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차나 한잔 하시게.”라고 말했을 것이다.
누군가 수행이 뭐냐고 물었을 때 한마디로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다. 이런 때는 “대념처경을 보십시오.”라고 말한다. 대념처경을 보면 신, 수, 심, 법이라 하여 사념처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청정도론을 보십시오.”라고도 말한다. 청정도론은 니까야의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골방에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은 폼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보여주기 식의 수행이 있을 수 없다. 외부와 차단하여 내면을 들여다 보는 수행에서 나홀로 수행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새벽에 깨면 정신이 맑다. 외부 자극에 노출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이 된다. 그렇다고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자는 것은 아니다.
물이 맑으면 바닥을 볼 수 있다. 바닥에 물고기나 자갈, 수초 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이 맑을 때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단지 지켜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어떤 수행이든지 집중을 필요로 한다. 어떤 다른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집중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여기서 어떤 다른 상태에 들어가려면 조건을 필요로 한다. 이는 대념처경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새김을 확립하여”(D22.2)라는 말라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매일 30분 이상 앉아 있고자 한다. 좌선을 생활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앉아 있는다고 해서 다른 상태로 될 수 있을까? 예비동작이 필요하다. 마치 수영할 때 준비운동하는 것과 같다. 이를 행선으로 본다.
좌선에 임하기 전에 먼저 행선을 해야 한다. 가볍게 걷는 경행과는 다른 것이다. 행선은 몸풀기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 수행이다.
행선이 왜 수행인가? 그것은 위빠사나 지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두 가지를 볼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말한다. 각각 위빠사나 수행 1단계와 2단계 지혜에 해당된다.
행선의 꽃은 6단계에 있다. 발을 떼서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6단계 행위를 말한다. 각 단계를 알아차리려면 천천히 할 수밖에 없다. 마치 학이 춤을 추듯이 천천히 하는 것이다. 절수행하는 사람이 본다면 양이 차지 않을 것이다.
발을 움직일 때 의도가 있다. 의도가 있어서 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때 의도도 알아차려야 하고 움직임도 알아차려야 한다. 의도는 정신에 대한 것이고 발의 움직임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해서 정신-물질 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아가 있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도가 있어서 움직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파격이다.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영혼과 같은 고정된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행선을 하면 우리 몸과 마음이 단지 정신-물질적 현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자아라든가 창조주와 같은 것은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실제와 실재를 보라고 말한다. 이는 언어화된 개념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자아, 영혼, 창조주와 같은 말은 개념이다. 언어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생각으로만 있는 것이다.
행선을 해서 발을 들려는 의도가 일어 난다. 이것은 정신적 현상으로 실제이고 실재하는 것이다. 발이 바닥에 닿았을 때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느낌도 실제이고 실재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런 실제와 실재를 보자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수행점검 시간이 있다. 누군가 스승에게 수행결과를 보고 한다. 그때 스승이 하는 말이 있다.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말하세요."라고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신-물질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선을 하다보면 집중이 된다. 발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집중이 되는데 이는 순간 집중에 대한 것이다. 움직이는 대상에 집중하려면 좀 더 세밀하게 봐야 한다. 그래서 발의 움직임을 빨리 할 수 없다. 천천히 하는 것이다. 의도도 알아차리고 움직임도 알아차려야 한다. 전과정을 알아차려야 한다.
행선에서 집중된 힘을 좌선에 가져갈 수 있다. 좌선을 힘들지 않게 할 수 있다. 행선의 집중을 그대러 좌선에 가져 오면 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행선에 대해서 예비수행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좌선에서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대념처경에 있는 것처럼 신, 수, 심, 법을 보는 것이다. 이는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을 말한다. 이를 사념처라고 한다.
몸관찰 할 때는 주로 호흡을 본다. 호흡의 생멸을 보는 것이다. 느낌관찰할 때는 주로 통증을 본다. 통증의 생멸을 본다. 마음관찰할 때는 탐욕이나 성냄 등과 같은 마음상태를 본다. 마음의 생멸을 본다. 법관찰할 때는 가르침을 본다. 가르침을 새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찰을 하기 위해서는 사띠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사띠는 대상에 마음을 묶어 놓는 것을 말한다. 대상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줄로 마음을 꽁꽁 묶어 놓는 것이다. 몸관찰이라면 호흡이라는 기둥에 마음을 묶어 놓는 것이다. 느낌관찰이라면 통증이라는 기둥에 묶어 두면 된다. 이때 마음은 기둥에 묶여 있는 줄의 길이 범위 안에서 움직일 것이다. 이를 고짜라(gocara)라고 하는데 행경(行徑)이라고 말한다.
사띠는 행경의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 행경이 너무 넓으면 잡념이 망상이 될 수 있다. 행경이 좁을수록 잡념은 금방 사라진다. 어느 정도 행경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 즉 생멸을 관찰할 수 있다.
수행을 왜 하는가? 또 묻는다. 암송을 하고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인이라면 지혜라고 말해야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해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서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적 지혜이다.
수행은 폼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생멸현상이다.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그것을 자아라고 여겼을 때 괴로움이 발생한다.
수행을 왜 하는가? 또 묻는다. 괴로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오온에서 일어난 현상이 내것이 아님을 알면 집착하지 않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는 지혜에 달려 있다.
지금 시각은 5시 48분이다. 엄지로 치다 보니 2시간 10분이 흘렀다. 어떤 이의 질문에 답변하다 보니 길어 졌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더 많이 있다. 그래서 니까야를 본다. 또 묻는다. 나는 왜 수행을 하는가? 위빠사나 생멸의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서라고.
2023-01-0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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