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뒷짐 지고 스케이트 타는 기분으로 행선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5. 19:04

뒷짐 지고 스케이트 타는 기분으로 행선을


마음이 편안하다. 이런 기분이 좋다. 방금 행선과 좌선을 마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후기를 작성하기 위해서 자판을 두드린다.

오후 4시가 되자 행선을 시작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한번 하기로 했으면 해야 한다. 지금 편안하고 좋다고 하여 의자에 앉아만 있으면 안된다.

나무꾼의 행복이 있는데

오늘 오후에 잠깐 졸았다. 잠깐 동안 졸음이 오자 아늑함을 느꼈다. 이런 맛에 낮잠을 자는지 모른다. 나무꾼이 나무 한짐을 하고 난 다음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한숨 자는 것과 같다.

나무꾼은 낮잠 잔 것에 대해서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나라의 왕도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꾼은 왕에게 이런 맛을 알려주고 싶었다. 나무꾼이 누리는 행복이다.

낮에 잠깐 졸고 나면 마음이 개운해진다. 마치 마음을 세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번뇌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것이다. 이런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진다.

의자에 편하게 앉았다. 발 앞에는 전기히터가 있다. 사무실 보일러에서는 난방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른한 오후이다. 그저 이런 상태로 있고 싶어진다. 이런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없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행선과 좌선을 하는 것이다. 일어나 명상공간으로 이동했다. 바로 옆에 있다. 칸막이로 된 곳이다.

카페트 길이만큼만 행선을

오후 4시부터 행선을 했다. 행선을 하고 난 다음 좌선을 할 생각이다. 처음부터 다짜고짜 좌선부터 하지 않는다. 단계를 밟아야 한다. 나의 경우는 먼저 행선부터 한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좌선에까지 가져가고자 하는 것이다.

행선 공간은 넓지 않다. 카페트 길이만큼만 행선을 한다. 몇 미터나 될까? 30센티 자로 재 보았다. 일곱 개 하고도 10센티이다. 대략 220센티가량 된다. 이정도 이면 여섯 보 정도 된다. 이 정도 거리이어도 행선하는데 충분하다.


이미 마음이 정화된 상태이다. 잠깐 졸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 거저먹기나 다름 없다. 마치 새벽에 일어났을 때 행선이나 좌선을 하는 것과 같다.

작업을 하다가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 어떻게 될까?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마음이 이미 흥분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마치 물에 오색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고, 뜨거운 물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고, 물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고, 수초가 잔뜩 낀 것 같고, 흙탕물이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상태에서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 5분도 버티기 힘들다.

행선이나 좌선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일을 하다가 급작스럽게 할 수 없다.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 된 늦은 오후가 좋다. 가장 좋은 것은 잠깐 졸았을 때이다. 거저 먹기나 다름 없는 것이다.

행선할 때 몸이 자꾸 기우뚱하는데

행선을 20여분 했다. 평소보다 행선이 잘 되었다. 이는 이미 사띠가 확립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정도 상태라면 한시간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행선하다 보니 자꾸 몸이 기우뚱거리는 것이었다.

행선을 할 때 주로 뒷짐을 지고 한다. 발은 천천히 옮긴다. 이른바 6단계 행선을 하는 것이다. 발을 들어서 올리고 밀어서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동작을 말한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데 자꾸 뒤뚱거리는 것이었다.

몸이 뒤뚱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는 다리에 힘이 없는 것이다. 천천히 옮길 때 한쪽 다리로 강하게 지탱해야 하는데 기우뚱한다는 것은 다리에 힘이 없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세가 좋지 않은 것이다. 천천히 하다 보면 자세를 잘 잡아야 하는데 자세가 나오지 않을 때 뒤뚱거리게 된다.

뒷짐 지고 스케이트 타는 기분으로 행선을

뒤뚱거리지 않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하는 것은 뒷짐을 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앞으로 손을 모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시도해 본 것은 팔짱을 기는 것이었다. 물론 두 팔을 아래로 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뒤뚱거림이 발생했다.

어떻게 해야 몸을 뒤뚱거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스케이트 타는 자세를 취해 보는 것이다. 뒷짐을 진 상태에서 한쪽 발을 옮길 때 그 쪽 다리에 상체를 약간 기울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몸이 평형을 유지할 수 있다. 그 때 다른 쪽 발을 천천히 이동시킨다. 미끄러지듯이 발을 내미는 것이다.

행선할 때 스케이트 타는 자세를 취해 보았다. 몸에 균형이 잡혀 안정감이 있었다. 천천히 이동했을 때 마치 스케이트 타는 것 같았다. 한쪽 다리로는 중심을 잡고 한쪽 다리를 미끄러지듯이 이동했을 때 스케이트 타는 것처럼 경쾌했다.

발을 밀 때 비행기타는 기분이 드는데

행선을 하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6단계 행선에서 한쪽 발을 미끄러지듯이 이동했을 때 비행기 타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발을 들어서 밀어서 나아가는 동작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때 발을 밀 때 약 2-3초 정도 걸리는데 그 짧은 시간이 마치 비행기타는 것과 같고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감미롭다는 것이다.

잠깐 졸았을 때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는다. 불과 몇 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졸고 나면 개운하다. 하늘을 날아 갈 것 같은 경쾌한 기분이 든다. 꿈을 꿀 때는 시간이 더 짧다.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지만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다. 행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행선할 때 발을 들어서 미는 시간은 불과 2-3초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짧은 시간을 알아차리면 비행기 타는 것 같다. 미는 동작을 관찰하다 보면 여러 단계가 있는데 스무스하게 지나가는 것이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이런 맛에 행선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아무 의미 없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행선을 30분만 하고자 했다. 그러나 행선이 잘 되어서 한시간을 채워 보고자 했다. 스케이트 타는 동작으로 자세를 교정하자 기우뚱거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되었다. 한쪽 발을 들어서 밀 때는 얼음판 위를 스케이트 타는 것처럼 경쾌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풍대이다. 사대 중에서 바람의 세계 또는 바람의 요소를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 몸은 사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십이연기분석경에서 물질에 대한 설명에서도 나온다. 몸이 사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몸이 내몸이 아님을 말한다.

흔히 나의 몸이라고 말한다. 얼굴도 내 얼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몸이 내몸이 될 수 없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나의 마음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오온의 화합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행선을 왜 하는 것일까? 남이 보기에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을 하는 것 같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발을 들어서 천천히 걷는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행선을 하면 위빠사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일에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행선하면 최소한 두 가지 지혜를

행선을 하면 최소한 두 가지 지혜를 얻게 된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지혜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를 각각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지혜를 아는 것이 중요한가? 그것은 나라는 자아가 없음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있다면 오로지 정신-물질적 과정만 있는 것이다.

발을 들어서 옮길 때 의도와 행위가 있다. 발을 들려는 의도가 있을 때 어떤 고정 불변의 내가 있어서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정신적인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의도를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의도는 원인이 되고 알아차리는 마음은 결과가 된다. 위빠사나 2단계 지혜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성립되는 것이다.

의도가 있어서 행위를 하게 된다. 발을 들려는 의도가 있어서 발을 들게 된다. 의도는 정신에 해당되는 것이고 발은 물질에 해당되는 것이다. 발은 의도가 없으면 혼자서 들 수 없다. 반드시 의도가 있어야 든다. 이처럼 우리 몸은 정신과 물질로 구분되어 있다. 이는 위빠사나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

행선을 하는 것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정신-물질 과정을 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원인과 결과를 보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자아가 있을 수 없다. 자아가 있어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단지 조건에 따라 사건이 발생한다. 조건이 다하면 사건은 소멸한다.

의도도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이런 의도를 아는 마음도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발을 드는 행위도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그런데 조건적으로 발생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조건발생했다가 소멸한다. 여기에 어떤 고정된 실체, 예를 들어 영혼이나 자아, 참나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행선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행선에서 사대관찰을

행선을 하면서 보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사대이다. 행선은 기본적으로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행선을 하면 사대를 보기 쉽다. 어떻게 사대를 보는가?

발을 들어서 밀 때 비행기타는 기분이라고 했다. 이때 경쾌함이 바람의 세계, 풍대에 대한 것이다. 풍대는 움직이는 것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발을 디딜 때 바닥이 딱딱하거나 부드러울 수 있다. 송판이라면 딱딱할 것이다. 이렇게 딱딱하거나 부드러움을 느낀다면 이는 지대에 대한 것이다. 우리 몸 안에는 지대의 요소가 있는 것이다.

화대는 어떤 것일까? 이는 뜨겁고나 차가운 것을 느낄 때 알 수 있다. 열이나 온도도 이에 해당된다. 우리 몸 안에는 화대와 관련된 장기도 있다. 수대는 어떤 것일까? 행선할 때 수대를 보기 힘들다. 이는 물처럼 응집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연꽃 잎에 있는 물방울처럼 우리 몸을 지탱하게 해 주는 것은 수대의 역할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수대에 해당되는 장기도 있다.

행선을 한시간 동안 했다. 이렇게 오래 한 것은 최근에 드문 일이다. 이는 오후에 잠깐 졸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욕락으로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일시에 정화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때가 행선도 하고 좌선하기에 좋은 기회가 된다. 사띠 확립이 쉽게 되기 때문이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행선을 했으면 좌선을 해야 한다. 행선에서 한시간 동안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좌선으로 가져 가고자 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A5.29)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말은 주석에서 “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라고 설명해 놓았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은 그대로 좌선으로 가져 갈 수 있다. 한시간 동안 행선했었던 집중, 즉 사띠가 확립된 것을 그대로 좌선으로 가져 갔다. 그저 앉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띠를 확립하기 위해서 호흡을 관찰하는 등 애쓸 필요가 없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도 생각은 일어난다. 이는 잡념이 아니다. 사띠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잡념이 치고 들어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망상이 된다. 그러나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보석 같은 것이다.

사념처에서 법념처가 있다. 대념처경을 보면 법념처를 설명할 때 오장애, 오온, 육처, 칠각지, 사성제가 설명되어 있다. 법념처에 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소개 되어 있을까? 이번에 좌선을 하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 생각이 일어난다. 이때 일어나는 생각은 보석 같은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사띠자체가 선법이기 때문이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대부분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그것은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기 쉽다.

집중된 상태, 즉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생각이 샘솟는다. 나의 경우는 대부분 경전에서 본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기억 역시 사띠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오력과 칠각지에서 사띠에 대한 정의를 보면 알 수 있다.

오력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A5.14)라고 정의했다. 칠각지에서는 “그는 그와 같이 멀리 떠나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된다.”(S46.3)라고 정의해 놓았다.

행선이나 좌선 중에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주로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이는 사념처 중에서도 법념처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오력에서는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A5.14)라고 했고, 칠각지에서는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S46.3)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행선이나 좌선 중에 가르침에 대한 것이 떠오른다면 이는 법념처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행선에서 수확은

오늘 한시간 행선을 하고 20 분 좌선을 했다. 좌선은 사띠가 확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한시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일정이 있고 또한 후기를 써야 하기에 도중에 그만 두었다. 무엇보다 오늘 행선에서 수확은 자세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뒷짐 진 상태에서 마치 스케이트 타듯이 행선했다. 바닥을 지탱하는 다리에 상체를 약간 기울인 상태에서 다른 다리의 발을 스무스하게 이동하는 것이다. 마치 얼음판 위를 미끄러져 가는 것 같다. 마치 비행기를 타는 것 같다. 그 짧은 2-3초 사이에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오늘 행선 자세를 개발한 것은 큰 수확이다.


2023-01-0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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