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삶은 사건의 연속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12. 09:51

삶은 사건의 연속


어제 저녁에 짜게 먹었다. 그리고 과하게 먹었다. 먹고 나서 후회했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다. 음식절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다시한번 한계를 절감한다.

새벽이다. 몇 시인지 모른다. 속이 불편하다. 짠맛이 남아 있다. 반전을 꾀해야 한다. 일어나서 행선하는 것이 좋다. 일어나는 것 자체가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다. 여기에다 발에 마음을 두면 짠맛 등에 대한 것들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마음을 돌려야 한다. 한마음에 집착되어 있으면 불편하다. 행선을 하는 것도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더욱더 확실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암송하는 것이다.

암송을 하면 딴 마음이 되어 버린다. 마음은 한순간에 한마음만 있게 된다. 한순간에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암송한다는 것은 마음 상태를 다르게 할 수 있다. 암송하는 순간에 다른 마음이 될 수 없다.

암송을 하고 나면 집중이 된다. 암송을 하고 나면 집중된 마음이 된다. 이 집중을 행선으로 활용할 수 있다. 발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이다.

행선을 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발을 들어서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행위를 관찰함에 따라 위빠사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2단계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겨난다. 더 나아가 생멸의 지혜(4단계)와 무너짐의 지혜(5단계)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내가 있다'라는 관념을 부수는 것이다. 그것이 위빠사나 수행 1단계와 2단계 지혜가 성숙되면 알 수 있다. 이 몸과 마음이 오로지 정신-물질적 현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또한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에 대해서 조건발생으로 설명할 수 있다.

행선은 발을 이동하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발의 움직임 한동작 한동작이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정신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발을 들 때 먼저 들려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 발은 의도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는 경우는 없다. 의도가 있어서 움직인다. 그럼에도 몸은 순간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움직임이다. 이런 움직임은 우리 몸안에서 격렬하게 일어난다.

몸안에서는 신진대사가 일어난다. 음식을 영양소로 해서 피와 살과 뼈가 되는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영양소는 열 번의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이는 열 번의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런 일은 나의 통제 밖에 있다. 그럼에도 이 몸을 내몸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 마음은 어떤가? 생각은 통제 되지 않는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생각은 일어난다. 더구나 과거 경험했던 것과 결합되면 망상이 된다. 생각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을 내것이라 할 수 있을까?

몸과 마음은 내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내것이라고 말한다. 얼굴에 뾰로지 하나 나면 어쩔 줄 모른다. 얼굴 하나 바라 보고 사는 사람은 내얼굴이라 하여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긴다. 몸만 그럴까? 즐거운 느낌이 생겨났을 때는 '내가 느낀다'라고 말한다. 슬플 때는 '나의 슬픔'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은 정말 내것일까?

부처님은 몸과 마음이 내것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해서 오온, 즉 다섯 가지 다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온은 끊임없이 생멸한다는 사실이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다. 이 말은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았을 때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따라서 몸도 나의 것이 아니고 마음도 나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몸과 마음은 누구 것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서 위빠사나 스승들은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해서 단지 정신-물질의 상호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무리 찾아 봐도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수행을 해서 몸과 마음이 내것이 아님을 아는 것은 큰 수확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내것으로 여긴다. 말을 할 때도 ''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부처님도 그랬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에게 있어서 나라는 표현은 관습적이다. 부처님도 대중이 쓰는 용어를 사용해서 설법했기 때문이다.

행선을 하면 생각이 샘솟는다. 이때 일어난 생각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왜 그런가? 집중이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보석같은 것이다. 반면 집중이 안된 상태, 즉 사띠확립이 되어있지 않은 생각은 망상이기 쉽다.

행선하면서 어제 유튜브에서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어느 천체물리학자가 말한 것이다. 그는 정년퇴임 후에 불교를 공부했다. 그래서일까 불교를 과학적으로 해석한다. 그렇다고 유물론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큰스님은 윤회가 없다고 말한다. 부처님은 윤회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말한다. 힌두교적 윤회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윤회가 있다면 생활속에서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과학적으로 탐구하면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는 것이다.

큰스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부처님 말씀보다 큰스님 말씀을 더 믿는 것 같다. 큰스님이 윤회관을 말하면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 같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대입해 보면 큰스님의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큰스님은 너무 과학적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다 보니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윤회도 없다. 이는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업과 업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오로지 현세에 대해서만 자신의 이론을 적용하려 한다면 과학적 유물론자와 다름 없을 것이다.

유튜브에서 본 천체물리학자는 과학적 유물론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과학적 유물론을 비판했다. 그렇다면 과학적 유물론자들은 윤회에 대해서 어떤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은 세 가지를 근거로 들어서 말한다. 첫번째는 마음은 뇌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두번째는 무아윤회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세번째는 윤회가 참이라 하더라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과학적 유물론자들도 윤회를 말한다. 그들은 윤회에 대하여 유전자윤회(디엔에이)와 문화윤회()로 설명한다. 윤회가 있다면 생물학적 윤회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또한 문화는 전승되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도 윤회한다고 말한다.

과학적 유물론은 자연과학하는 사람들만의 생각일까? 그렇지 않다. 철학하는 학자도 과학적 유물론자가 될 수 있다. 어느 재미철학자는 자신의 책에서모였던 조건이 흩어져 다른 곳에서 다른 조건과 다시 모이고 또 흩어짐을 반복하는 과정이 윤회라고 설명했다. 이는 윤회에 대해서 유물론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학자들도 유물론적 윤회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학자가 윤회를 부정하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실제로 그런 불교학자를 보았다. 참으로 놀라웠다. 그 불교학자는 불교인들이 알고 있는 윤회는 힌두교식 윤회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부처님 당시에 힌두교는 없었다. 힌두교는 부처님 입멸 후에 생겼다. 바라문교가 환골탈태한 것이 힌두교이다. 그럼에도 불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처님은 바라문교의 윤회관을 비판했다. 그리고 새로운 윤회관을 정립했다. 이는 연기법에 따른 윤회를 말한다. 업과 업보에 따른 윤회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윤회를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은 과학의 시대이다. 그러다 보니 과학적 사고를 한다. 윤회관도 그렇다. 생물학적 윤회와 문화윤회로 보는 것이 그렇다. 이처럼 과학적 유물론이 득세하다 보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과학적 유물론자들이 늘 말하는 것이 있다. 마음은 뇌에서 나오고, 무아윤회는 있을 수 없고, 설령 윤회가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주장은 철저히 물질에 기반한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 유물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학적 유물론자들은 업과 업의 과보에 말하지 않는다. 이는 연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이는 유물론자들이 연기법적 사유를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천체물리학자는 과학적 유물론자들을 비판했다. 뇌과학 등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윤회를 부정한 것에 대해서 유물론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세 가지에 대해서 물질이 아닌 사건으로 설명하면 달라진다. 이른바 연기법적 사유를 하면 세 가지는 부정된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발견했다. 연기법을 발견해서 부처가 된 것이다. 그런데 부처가 출현하기 전에도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빠쩻까붓다라하여 연각승이라고 한다.

연기법을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그런 연기법은 어떤 것인가? 사건과 사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사건과 사건이 조건발생하여 고리를 이루고 있다. 십이연기가 대표적이다.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깨달아 부처가 된 것이다.

윤회를 사건의 연속으로 보면 과학적 유물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다 무너진다. 삶에 대해서 존재가 아닌 사건의 연속으로 본다면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이 된다. 조건발생하는 사건에서 조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연기의 고리는 끊어진다. 이것이 열반이다. 윤회의 주체에 대해서 연기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과학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행선하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주로 담마에 대한 것이다. 경전에 봤던 것이나 누군가에게 들었던 것이 떠오른다. 그리고 정리가 된다. 오늘 행선할 때 "윤회는 존재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것이다."라는 말에 사무쳤다.

행선을 하다 보면 사건의 연속임을 알게 된다.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래서 무아인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열반이 있다.

"
생겨나는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 말은 초전법륜경에서 꼰당냐가 말한 것이다. 부처님의 사성제 설법을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를 수다원오도송이라고 말한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흔히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한다. 생멸의 원리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연기법이다. 연기법을 깨달으면 지금 죽어도 좋은 것이다. 왜 그럴까? 무아의 성자가 되면 죽음이 시설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사가 된다.

부처님 가르침에 정답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인생의 해법이 있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알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론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라고 사유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사건이 일어나는가?"라고 사유하는 것이다.

깨달은 자인지 쉽게 알아 보는 방법이 있다. 그의 행위에서 탐, , 치가 발견되지 않으면 그는 깨달은 자라고 볼 수 있다. 하나 더 있다. 연기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가 존재론적으로 말하지 않고 연기법적으로 말한다면 그는 깨달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새벽 3 29분부터 치기 시작한 글이 이제 끝났다. 지금 시각은 아침 6 5분이다. 엄지로 2시간 반동안 줄기차게 쳤다. 행선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라 친 것이다. 이렇게 쓴 글은 버리지 않는다. 블로그 수행기 카테고리에 보관한다. 오늘 한 건 건졌다. 삶은 사건의 연속이라고.


2023-01-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