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음식에 적당량을 안다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13. 20:13

음식에 적당량을 안다는 것은


초기불교를 접하고 놀란 것이 있다. 그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음식에 대한 것이다. 음식에 있어서 적당량을 알라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반복되면 중요한 것이다. 이 니까야 저 니까야에 언급된 것일수록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가르침이 대표적이다. 이는 오온 무아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음식절제에 대한 가르침도 많다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원리를 갖춘 수행승은 바로 현세에서 즐겁고 기쁘게 지낸다. 모든 번뇌의 소멸에 근본이 되는 것도 그것에서 시작한다. 세 가지 원리란 무엇인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 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S35.239)


부처님은 음식절제하는 것에 대해서 깨달음의 근본이 되는 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감관수호와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과 함께 동급으로 취급했다.

아직까지 대승경전에서 음식절제에 대한 것을 보지 못했다. 아마 다른 종교전통에서도 음식절제가 그다지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토록 음식절제를 강조했을까? 이는 탐욕과 관련 있다.

그 사람에게 탐심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아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사람이 밥먹는 것을 지켜 보는 것이다. 밥을 허겁지겁 먹는다든가 젖가락 놀리는 것이 급하다면 탐욕스러운 것이다.

밥 먹을 때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개도 먹이를 먹을 때 건드리면 으르렁거린다. 사람도 밥 먹을 때 이러쿵저러쿵 잔소리하면 으르렁거릴지 모른다. 지금 먹어두지 않으면 언제 먹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먹는 것 같다.

동물은 생존을 위해서 가능하면 많이 먹어둔다. 배가 터지도록 먹는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사람도 지나치게 많이 먹는 사람이 있다. 소화제를 먹어가면서까지 먹는다. 음식절제가 안되는 사람이다.

음식절제는 밥과 찌게와 반찬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술도 음식의 범주에 해당된다. 먹고 마시는 것은 모두 음식이다. 당연히 술도 음식이다. 음식절제가 안된다고 했을 때 알콜 절제가 안된다는 말도 해당된다.

매일 소주 한병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는 소주가 음식인 것이다. 그런데 적당량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소주 한병 이상은 안마시는 것이다. 이런 것도 어쩌면 음식절제에 해당되는 것인지 모른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다. 밥도 적당량을 먹어야 하고 술도 적당량을 마셔야 한다. 그럼에도 절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과식하게 된다. 탐욕으로 먹고 탐욕으로 마시게 되는 것이다.

불자들은 탐욕이 죄가 되는 것을 알고 있다. 천수경의 십악참회에 탐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 낸 것에 대해서 "탐애중죄금일참회"라 하여 참회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음식을 탐욕으로 먹었을 때 이는 중죄에 해당된다. 어느 정도인가? 십악에 있는 살생죄와 동등한 것이다.

두 명의 무사가 검으로 승부를 하고 있다. 날이 없는 칼이다. 베어도 죽지 않는다.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겨뤄 보는 것이다. 시합이 치열하게 전개 될 때 다칠 수 있다. 그때 심판관은 "여기까지"라고 말한다. 그러면 시합을 멈춘다. 음식도 이렇게 할 수는 없을까?

음식을 어떻게 대할까? 단지 즐기는 것으로 대한다면 절제가 이루어질 수 없다. 양껏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리고 취하도록 마실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라면 적당량을 알아야 한다. 먹고자 했던 것보다 90프로만 먹는 것이다. 부족하다고 해서 더 먹어서는 안된다. 약간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먹어야 한다. 여기까지만 먹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도 수행이다. 계율로 먹고 사마타로 먹고 위빠사나로 먹어야 한다. 몸에 기름칠할 정도로 먹는 다면 계율로 먹는 것이다. 음식을 제공한 사람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면서 먹는다면 사마타로 먹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 알아차리면서 먹는다면 위빠사나로 먹는 것이다.

수행자라면 때 아닌 때에 먹어서는 안된다. 선원에 있다면 오후에 먹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절제가 되어 있지 않은 일반사람이라면 수시로 먹을 것이다. 하루 세 끼에 간식과 야식을 먹을 것이다.

먹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식사시간이 행복이다. 맛을 찾아 맛집 순례를 할 것이다. 하루 세 끼 먹는 재미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선원에서 오후에 먹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해할까?

수행자는 하루 한끼 먹는다. 아침에는 죽을 먹고 점심 때 제대로 먹는다. 정오부터 다음날 해뜨기 전까지는 일체 먹지 않는다. 다만 꿀물이나 주스는 마실 수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탐욕을 줄이기 위해서 음식절제하는 것이다.

불교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 , 치를 소멸하기 위한 삶이다. 그런데 탐심을 자극하는데 음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음식에 있어서 적당량을 알라고 했다. 음식절제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근본이 되는 법이다.


2023-01-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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