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찰나삼매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9. 10:43

찰나삼매에 대하여



양곤에 마하시 센터가 있다. 위빠사나 수행처로 유명한 곳이다. 요즘은 관광코스로도 된 것 같다. 미얀마 패키지 여행 할 때 순례코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하시 센터에 마하시 사야도 방이 있다. 세 개 가량 된다. 가장 안쪽에, 가장 깊숙한 곳에 경행대가 있다. 붉은 빛이 나는 티크목재로 보이는 경행대이다. 길이는 10미터 이상된다.


마하시 사야도 방에서 경행대를 발견한 것은 놀라웠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매일 경행 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경행대는 사야도 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동으로 쓰는 것이긴 하지만 일반 수행자의 방에도 경행대가 있었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경행을 중시한다. 그런데 단순히 몸을 푸는 정도의 경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워킹메디테이션이라하여 걷는 수행, 보수행, 행선이라 한다. 그래서 행선을 좌선하는 것 못지 않게 중시한다. 어느 정도인가? 좌선을 한시간 하면 행선도 한시간 해야 하는 것이다.

마하시 계열의 선원이 많다. 마하시 사야도 직제자들이 연 선원을 말한다. 세월이 흘러서 직제자들은 대부분 입적했다. 직제자의 제자, 즉 마하시 사야도의 손자 뻘 되는 사야도들이 이제 큰스님이 되어 지도하고 있다. 담마마마까 선원의 에인다까 사야도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선원에서 배운대로 해 보고자 한다. 행선을 중시하는 것이다. 좌선과 동등하게 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좌선 중시는 빤냐완따 스님에게서도 볼 수 있다. 스님 글을 읽어 보면 행선으로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고 밝혔다.

새벽에 잠이 깨면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행선하는 것이다. 좁은 방을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배운대로 한다. 6단계 행선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발의 움직임에 마음이 따라가다 보면 집중이 된다. 이런 것도 집중이라 할 수 있을까?

행선은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불과 서너보 밖에 되지 않지만 발을 들어서 딛는 행위를 반복한다. 그런데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집중이 생긴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그렇다.

흔히 삼매라고 말한다. 어떤 삼매가 있을까? 독서삼매도 있을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집중이 되는데 흔히 독서삼매라고 하는 것이다. 바느질 하는 것도 삼매이고 뜨개질하는 것도 삼매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매 아닌 것이 없다. 당연히 걷는 것도 삼매가 될 수 있다.

삼매에는 선정삼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것만 삼매가 아님을 말한다. 마음을 대상에 집중하면 무엇이든지 삼매가 될 수 있다. 도둑질 하는 것도 삼매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욕망이 개입된 것이기 때문에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 현명한 주의기울임이 될 때 삼매라고 하는 것이다.

주석서에서는 세 가지 삼매를 말한다. 근접삼매, 본삼매, 찰나삼매이다. 여기서 근접삼매와 본삼매는 사마타수행에 해당된다. 찰나삼매는 위빠사나 수행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수행할 때는 찰나삼매가 된다. 왜 그런가? 대상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면 선정삼매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위빠사나 수행의 가장 큰 특징은 관찰이다.

며칠전 EBS 2채널에서 인문학 강좌를 봤다. “철학은 관조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와 닿았다. 철학에서는 “없지 않고 있는 것이 경이이다.”라고 말을 하는데, 있는 것에 대해서 관조했을 때 지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철학하는 것이 위빠사나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왜 그런가? 위빠사나는 대상을 관찰하여 지혜를 계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틈나면 열어 본다. 마하시 사야도가 지은 것이다. 일창스님이 번역했다. 미얀마어로 된 것을 직접 번역한 것이다. 마치 청정도론을 읽는 것처럼 논리가 탄탄하다. 한구절 한마디가 금과옥조같다. 이 시대 최고의 위빠사나 수행지침서라고 본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찰나삼매에 대한 것을 보았다. 1권 2장 심청정에서 무려 26페이지가 할당되었다. 그동안 찰나삼매에 대해서 궁금했는데 한번에 해결해 준 것 같다.

찰나삼매는 위빠사나 수행에서 요하는 것이다. 대상을 관찰할 때 순간적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지혜가 일어날 수 없다. 이를 빠알리어로는 카니까사마디(khaṇikasamādhi)라고 한다. 찰나삼매 또는 순간삼매라고 한다.

찰나적으로 순간적으로 삼매가 있을 수 있을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행위에 집중하면 찰나삼매가 됨을 말한다. 바느질이나 뜨개질, 독서를 연상하면 된다.

찰나삼매를 뜻하는 카니까사마디는 경전에 나오지 않는다. 주석서에서 볼 수 있다. 경전에서는 수없이 삼매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는데 이를 주석서에는 크게 근접삼매, 본삼매, 찰나삼매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빠사나 수행에서 요하는 찰나삼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가 신심, 정진, 새김, 삼매, 통찰지의 힘이 좋고 균형을 잘 이루게 되면 관찰하고 새기는 것만 계속 이어져 마음이 깨끗하게 된다. 이런저런 대상들을 생각하는 장애들도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와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게 일정 기간 동안 관찰할 때마다 물질과 정신이라는 대상에만 고요히 집중되는 삼매가 아주 분명하게 생겨난다. 이러한 삼매를 찰나삼매라고 한다. 관찰하고 새기는 마음 그 한순간 머물러 집중하는 삼매라는 뜻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55쪽)



카니까사마디, 찰나삼매에 대한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까지 수많은 위빠사나 수행지침서를 봤지만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도 26페이지나 된다. 이런 책을 접한 것은 행운이다. 작년 붓다데이 때 한국마하시선원을 방문했었는데 그때 일창스님이 선물로 주었다. 이렇게 귀중한 책을 준 일창스님에게 감사드린다.

찰나삼매는 오온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를 "물질과 정신이라는 대상에만 고요히 집중되는 삼매"라고 했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고요히 지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생멸한다는 사실이다. 의도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흔히 우리 몸과 마음을 나의 몸과 마음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을 때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는 것이다. 배고플 때 나는 소리이다. 몸 속에서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것은 나의 의지와 관련 없다. 그럼에도 나의 몸이라 할 수 있을까? 마음은 어떠한가? 끊임없이 생각이 날 때 나의 의지와 관련 없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몸, 나의 마음이 되려면 통제권이 있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나의 통제하에 있어야 진정한 내것이 된다. 그러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내것이 아니다. 그냥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배가 고프니 “꼬르륵”하며 소리가 나는 것이다. 밥을 먹으면 신진대사가 일어난다. 밥이 영양소가 되어서 열 번 가량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된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망상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몸과 마음은 내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내것이 아니라면 자아는 있을까? 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드러난다. 행선을 할 때 의도가 일어나는데 이것을 나의 자아라고 할 수 있을까? 자아는 변치 않는 것이다.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을 관찰하다 보면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도도 생멸하고 이를 아는 마음도 생멸한다.

자아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오온을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망상이 된다. 왜 그런가? 오온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변하는 것을 어떻게 자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자아는 없다. 다만 생각속에서는 있을 것이다. 자아는 개념적으로만 있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유신견(有身見)을 깨는 것이다. 이는“몸과 마음이 내것이다.’라는 생각을 부수는 것이다. 이것은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로 알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이렇게 말한다.



“ ‘정신과 물질만 존재한다’라고 아는 지혜로 ‘개인, 중생’이라고 잘못 아는 무명을 제거한다. ‘원인과 결과만 존재한다’라고 아는 지혜로 ‘중생들은 저절로 생겨난다. 혹은 하느님, 범천, 제석천왕 등이 창조해서 생겨난다’라는 등으로 잘못 아는 무명을 제거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32쪽)



마하시 사야도의 이와같은 가르침은 청정도론에 근거한다. 청정도론에 있는 내용을 기반으로 해서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로 설명한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개념타파에 대한 것이다.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언어적 개념은 부수어진다. 실제를 보면 개념은 무너지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정신-물질 현상을 관찰 했을 때, 오온이라는 것은 단지 정신-물질의 현상에 지나지 않고 또한 조건에 따라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몸과 마음이 내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유신견이 타파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여러단계가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16단계로 나눈다. 그런데 위빠사나 지혜가 깊어짐에 따라 지혜도 계발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마하시 사야도는 높은 단계, 중간단계, 낮은 단계의 위빠사나 삼매로 구분한다.

높은 단계의 위빠사나 삼매는 ‘무너짐의 지혜’(5단계)를 시작으로 있게 된다. 중간단계는 ‘생멸의 지혜’(4단계)로부터, 그리고 낮은 단계는 ‘정신-물질을 구분하는 지혜’(1단계)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2단계)이다. 이렇게 위빠사나 찰나삼매는 단계적으로 계발된다.

오늘 새벽에 행선을 했다. 새벽에는 정신이 맑기 때문에 집중이 잘 된다. 마음이 혼란된 상태에서는 집중을 할 수 없다. 마음이 들떠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 술 마신 상태에서도 당연히 집중되지 않는다. 말을 해도 집중되지 않는다. 집중을 잘 하려면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을 해야 한다.

행선은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똑같은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바느질이나 뜨개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일지 모른다. 그런데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방에서 행선을 하면 서너보 걷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단순반복하다 보면 재미가 붙는다. 기쁨도 있고 행복도 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뜨개질하는 것도 그럴 것이다.

행선을 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최소한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를 계발할 수 있다. 이는 오온에 나라는 개념은 없고 오로지 정신과 물질의 과정만 있다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가 생겨남을 말한다. 또한 원인과 결과를 알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조건발생함을 알아서 창조주와 같은 배후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1단계와 2단계 지혜만 알아도 큰 수확이다. 이를 마하시 사야도는 낮은 단계의 위빠사나 찰나삼매로 가능하다고 했다. 좀더 집중이 되면 생멸의 지혜를 아는 찰나삼매가 될 것이다. 이를 중간단계의 위빠사나 찰나삼매라고 했다. 높은 단계의 위빠사나 찰나삼매는 무너짐의 지혜단계에 이르렀을 때 가능하다고 했다.

마하시 사야도는 찰나삼매만으로도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선정없이 순수 위빠사나 수행만으로도 가능함을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찰나삼매의 집중력은 본삼매에 못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단계적 집중에 대해서 “그때에는 마치 사마타 선정들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1권 172쪽)라고 했다.

아직 사마타 선정 체험을 해보지 않았다. 위빠사나 단계도 초보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의 찰나삼매에 대한 것을 보면 마음이 고무되기에 충분하다. 선정 삼매 없이 찰나삼매 만으로도 선정삼매와 동일한 삼매를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야도는 이렇게 말한다.



“[사마타 수행과] 다른 점은 사마타 선정의 대상은 바뀜없이 하나의 대상이다. 물질과 정신일뿐으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생겨남과 사라짐으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위빳사나 삼매의 대상들은 새로운 것이어서 계속 바뀐다. 물질과 정신일 뿐으로도 드러난다. 지혜가 성숙되었을 때는 생겨남과 사라짐도 드러난다. 이것만 차이가 난다. 집중되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72쪽)



마하시 사야도는 선정삼매와 찰나삼매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집중되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차이는 삼매의 대상에 있다. 사마타는 대상이 고정되어 있지만 위빠사나의 대상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찰나삼매는 변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의 몸과 마음, 즉 오온이 대상이 된다. 오온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잘 관찰하려면 집중을 해야 한다. 더구나 변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을 요한다. 이와 같은 찰나삼매는 사마타에서의 근접삼매와 본삼매와 같다는 것이다.

찰나삼매가 근접삼매와 같은 것은 낮은 단계의 위빠사나 찰나삼매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가 될 것이다. 찰나삼매가 본삼매와 같은 것일 때가 있다. 이는 중간단계인 생멸의 지혜와 높은 단계인 무너짐의 지혜에 해당되는 찰나삼매가 이에 해당된다. 이 두 단계의 찰나삼매는 선정단계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위빠사나 수행자는 근접삼매와 본삼매라는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이렇게 말한다.



“위빳사나 행자들은 마음청정을 생겨나게 하기 위해 사마타를 미리 수행할 필요가 없다. 처음부터 위빳사나 수행만 하면 된다. 위빳사나의 힘이 좋아졌을 때 생겨나는 찰나삼매가 바로 그 수행자의 마음청정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80쪽)



마하시 사야도는 근접삼매와 본삼매를 위해서 사마타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마타 수행을 해서 선정 경험을 해도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으면 도와 과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찰나삼매의 단계는 선정수행의 단계와 똑같다고 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선정삼매에 대해서 강조했다. 법구경에서도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무상, 고, 무아에 대해서 거듭 관찰해야 이루어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밖에 없다.

도와 과에 이르는 두 개의 길이 있다. 사마타 선정을 닦아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이르는 길이 있고, 또한 처음부터 위빠사나 찰나삼매로 이르는 길이 있다. 이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선정삼매의 근기가 되지 않는다면 곧바로 위빠사나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꼭 기억할 것이 있다고 했다. 위빠사나 행자는 근접삼매와 본삼매 없이 처음부터 위빠사나를 하는 것에 대해서 “위빳사나가 구족되었을 때 삼매가 생겨난다.”(1권 175쪽)라고 했다. 이는 무슨 말인가?

위빠사나 행자는 처음에 찰나삼매로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 한다. 이때 찰나삼매는 근접삼매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위빠사나 지혜가 구족되었을 때, 위빠사나 지혜가 높아졌을 때, 즉 생멸의 지혜나 무너짐의 지혜와 같은 중간단계와 높은 단계의 지혜가 생겨났을 때, 사마타의 본삼매와 같은 선정의 단계의 상태와 같은 찰나삼매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처음부터 위빳사나만 수행하면 된다.”(1권 187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마타 지상주의자가 있다. 반드시 사마타를 닦어서 선정에 이르러야 지혜가 나옴을 말한다. 이는 법구경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는 가르침이 이를 증명할 것이다. 그런데 법구경 같은 게송을 보면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다.”라고 했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의 당위성을 말하는 것 같다. 마치 마하시 사야도가 ‘위빠사나 지혜수행을 하다 보면 선정이 생겨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선정과 지혜가 있으면,
참으로 그에게 열반이 현전한다.”(Dhp.372)


부처님은 지혜와 선정을 함께 닦을 것을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위빠사나를 닦는 것이 유리하다. 찰나삼매로 위빠사나를 닦아 지혜가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그 높아진 지혜에 해당되는 선정단계외 같은 찰나삼매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수행은 멀고도 험한 길이다. 궁극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 첫발은 행선하는 것이다. 행선하면서 정신-물질을 파악하고 조건을 알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반복하면 숙달된다.

행선은 남이 보기에 무의미해 보인다. 그 시간에 감각을 즐기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하다 보면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찰나삼매 상태가 되는 것이다.



2023-01-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