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사띠 번역어 새김이 왜 최상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2. 08:43

사띠 번역어 새김이 왜 최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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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스마트폰으로 시각을 확인했다. 방금 좌선을 마쳤다. 몇 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잠에서 깼을 때도 그랬다. 겨울의 깊은 밤에, 새벽시간에는 몇 시인지 가늠할 수 없다. 일부러 시계를 보지 않는다. 다 끝난 다음에 본다.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또다시 잠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으로 보내기는 시간이 아깝다. 차라리 그 시간에 깨어 있기로 했다. 책을 보거나 에스엔에스를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마음이 그쪽에 가 있게 된다.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것 같다. 이럴 경우 차라리 행선하는 것이 낫다.

새벽에 행선이나 좌선하는 것은 거저먹기나 다름없다. 마음이 청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별다른 집중이 없어도 쉽게 사띠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빠르게 사띠를 확립하려면 암송하는 것이 좋다.

경행을 하면서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눈을 감고 좁은 방을 왔다갔다하며 기억을 끄집어 내는 것이다. 새벽이라 거칠 것이 없다. 말이 술술 나온다. 25게송 암송이 끝나면 확실히 집중상태가 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이 집중을 행선에 활용해야 한다.

새벽행선은 거저먹기나 다름없다. 이미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서 암송까지 마쳤으니 알아차림은 선명해진다. 사띠가 어느 정도 확립된 것이다. 이는 낮에 행선했을 때와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행선을 하면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떠오른 생각은 보석같은 것이다. 사띠가 확립되지 않았을 때는 망상이 되기 쉽다. 어느 정도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떠오르는 생각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경전에서 읽었던 문구가 떠올랐다. 그것은 오래 전에 이루어진 것을 기억하여 지속적으로 새기는 것”(Smv530.)이라는 말이다. 어제 머리맡에 있는 디가니까야에서 본 것이다. 디가니까야 16번경 마하빠리닙바나경 각주에서 보았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띠에 대한 것이다.

흔히 대반열반경이라 불리우는 마하빠리닙바나경에 일곱가지 불퇴전의 원리가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전에 밧지족의 일곱 가지 불퇴전의 원리를 설했는데 이를 번영만이 기대되지 퇴전은 기대되지 않는다.”(D16.4)라고 했다. 부처님은 이와같은 불퇴전의 원리를 수행승에게도 적용했다. 그래서 수행승의 일곱 가지 불퇴전의 원리 3’을 보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이 새김을 확립하는 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에게는 번영만이 기대되지 퇴전은 기대되지 않는다.”(D16.10)


이 가르침은 사띠에 대한 것이다. 일곱 가지 불퇴전의 원리 중의 하나이다. 이는 믿음(삿다), 부끄러움(히리), 창피함(옷땁빠), 배움(수따), 정진(위리야), 새김(사띠), 지혜(빤냐)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원리는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를 칠성재라고도 하는데 누구도 훔쳐갈 수도 없고 빼앗아 갈수도 없다고 해서 일곱 가지 정신적 재물이라고 말한다.

주석에서는 사띠에 대해서 오래 전에 이루어진 것을 기억하여 지속적으로 새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에 사무쳤다. 사띠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하고 가장 잘 풀이해 놓은 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띠에 대해서 여러 가지 번역어가 있다.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번역어는 마음챙김이다. 그러나 이 번역어는 요즘 비판 받고 있다. 사띠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사띠는 본래 기억의 의미가 있는데 이런 본래의 의미가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전재성 선생은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띠에는 기억의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지혜의 의미도 있음을 말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불교인은 가능하면 경전에 근거해서 말해야 한다. 제아무리 저명한 학자나 고명한 스님일지라도 경전에 근거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이를 사견이라고 한다. 사띠의 번역어도 마찬가지이다. 사띠가 기억과 지혜의 의미인 것은 경전을 근거로 한다.

니까야 도처에서 사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는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A8.30)라고 설명된다. 여기서 사띠의 전제조건은최상의 기억과 분별(paramena satinepakkena)”이다. 왜 최상이라고 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의 말씀을 기억(sati)하고 분별(nepakka)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별은 지혜를 뜻한다. 주석에서는 분별을 뜻하는 네빡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여기서 분별을 갖춤은 총혜인데 지혜를 언급하는 것이다. 왜 새김을 말하면서 지혜를 언급하는가? 새김의 강력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여기서는 강력한 새김이 의도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혜와 결합되면 강력한 힘을 갖추지만 분리되면 그렇지 못하다. 지혜와 결합된 새김을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Srp.III.234)


주석을 보면 사띠가 기억과 지혜가 결합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선생의 번역어 새김이 가장 정확하다. 이는 새김에 대해서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한 앎은 지혜에 해당된다.

사띠에 대하여 기억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제따와나선원의 일묵스님의 유튜브 법문을 들어보면 사띠에 대해서 기억이라고 했다. 한때 사띠에 대해서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기억으로 부르고 있다. 그래서 삼마사띠에 대하여 바른기억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띠를 기억이라 칭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사띠의 제일의 뜻인 기억(memory)를 잘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뭔가 부족하다.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사띠를 단지 기억이라고 번역했을 때 사띠의 본래 의미를 다 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2022 12월에 스리랑카 순례를 했었다. 그때 혜월스님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다. 기억은 계발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기억은 기억일뿐이라는 것이다. 사띠는 기억의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 플러스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띠는 계발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한다. 이는 사띠가 기억 플러스 지혜임을 말한다.

사띠는 단순히 기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띠는 기억과 지혜가 플러스된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 즉 니까야 도처에서 사띠에 대한 설명에서 확인된다. 주석에서도 확인된다. 마하빠리닙바나경 주석에서는 일곱 가지 불퇴전의 원리 중에 사띠(새김)와 빤냐(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여기서 마지막 두 마디의 말 새김과 지혜는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승들에게는 올바른 새김(삼마사띠)과 올바른 지혜(위빠사나빤냐)를 뜻한다.”(Smv.530)


이렇게 본다면 사띠의 번역어는 새김이 가장 타당하다. 마음챙김, 마음지킴, 기억, 알아차림 등 수많은 번역어가 있지만 기억과 지혜를 뜻하는 새김이 사띠의 의미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현재 한국에서 사띠의 번역어는 마음챙김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사띠의 본래 의미인 기억과 지혜를 잘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따라 사띠의 개념에 혼란이 있다. 그러나 새김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 해소된다.

한국에 마하시선원이 있다. 이를 한국마하시선원이라고 한다. 안양 관악역 가까이에 있다. 여기에 일창스님이 있다. 미얀마어를 자유자재로 할수 있는 교학승이자 수행승이다. 스님이 번역한 책을 보면 사띠에 대해서 새김으로 번역해 놓았다. 아마 사띠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시각 7 35분이다. 1시간 50분 동안 줄기차게 썼다. 그 사이에 밥도 먹었다. 이제 글을 마무리 해야 한다.

오늘 새벽 암송과 행선과 좌선을 했다. 새벽수행은 거저먹기라는 말이 있듯이 집중이 잘 되었다. 이를 사띠가 잘 확립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사띠와 사띠의 확립은 다른 것이다. 사띠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이고 사띠의 확립은 수행에서 하는 말이다. 행선이나 좌선을 할 때 사띠가 확립되지 않으면 행선이나 좌선을 할 수 없다. 망상때문에 5분도 버티기 힘들다. 그러나 사띠가 확립되면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다. 그리고 보석같은 생각이 샘물처럼 솟는다.

일상에서 사띠는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지혜이다. 부처님은 진리의 말씀을 설했기 때문에 가르침에 지혜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사띠가 수행용어로 사용될 때는 사띠의 확립(우빳티사띠)이 된다. 이와 같은 사띠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오래 전에 이루어진 것을 기억하여 지속적으로 새기는 것이라고 했다.

오래 전에 이루어진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경험이다. 이를 수행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행을 해서 법의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못 잊어 할 것이다. 마치 음식 맛을 잊지 못하여 단골식당을 찾아 가듯이, 수행자는 법의 맛을 잊지 못하여 그 상태가 되고자 한다. 예전의 좋았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도 사띠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새벽과 아침에 사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암송과 행선과 좌선을 하면서 생각해 본 것이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지혜에 해당된다. 그것도 보석같은 지혜이다. 사띠의 번역어가 새김이 최상인 것도 확인 했다. 사띠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지혜와 결합된 기억인 것이다. 그래서 사띠는 계발될 수 있는 것이다.


2023-01-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