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14. 10:08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창 밖으로 여명이 비친다. 몇 시나 되었을까? 아침 7시 11분이다. 늦은 시간이다.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늦잠 자지 않았다. 이제 막 행선을 막 마쳤을 뿐이다.

잠에서 깼을 때 몇 시인지 가늠할 수 없다. 방 창 밖에 여명이 비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소리로도 판단할 수 있다. 아파트가 바로 대로변에 있기 때문에 자동차 소음으로 시간을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겨울의 밤은 깊다. 7시가 되었어도 컴컴하다. 아마 행선을 한시간 한 것 같다. 행선 중에 암송도 있었다. 그런데 긴 밤에 행선을 두 번 했다는 것이다. 새벽에 한번 했다가 잠 든 것이다.

새벽에 행선을 하고 꿈을 꾸었다. 모처럼 기분 좋은 꿈이다. 꿈에서 이루어진 것은 좋은 꿈이다. 꿈속에서 주체가 되어 이룬 것이다. 꿈 속에서 행위의 주체가 된 것이다. 꿈 속에서는 선명했으나 깨고 나니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의지대로 꿈을 통제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잠에서 깼다. 이른 아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태에서 스마트폰을 보면 모든 것이 다 깨져 버린다. 아침에 형성된 고요를 유지하려면 스마트폰을 봐서는 안된다. 책을 봐서도 안된다. 창 밖으로 어렴풋이 비치는 여명에 행선을 시작했다.

이른 아침 행선은 집중이 잘 된다. 잠에서 막 깼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 있다. 이런 상태에서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 잘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거저먹기나 다름 없다고 말한다.

아침에는 TV도 안보고 스마트폰도 안보고 책도 안본다. 언어적 형성이 없어서 방해받지 않은 마음상태가 된다. 다만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행선을 했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말을 하면 사띠가 깨진다는 것이다. 일을 해도 사띠가 깨진다. 화분을 옮겼을 때 사띠가 깨진다. 당연히 TV나 스마트폰, 책을 봐도 사띠가 깨진다. 모두 언어와 관련 있다. 그러나 아는 마음은 다르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마음이 있다. 이는 아는 마음이다. 그런데 아는 마음은 언어적 형성이라기 보다는 자각이라 말할 수 있다. 자각의 마음은 의지와 다른 것이다. 단지 수동적으로 지켜 보는 마음이다. 지켜 보는 마음이고 곧 관찰하는 마음이다.

새벽이나 이른 아침 행선할 때는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자각하는 마음, 지켜 보는 마음만 있게 된다. 사띠가 강할수록 선명하다. 그러나 집중이 약하면 아는 마음도 약하다. 잡념이 치고 들어와 망상이 될 수 있다.

망상에서 깨면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그 짧은 시간에 만리장성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사띠가 확립되어 있으면 망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설령 잡념이 치고 들어 오더라도 아는 힘이 강했을 때 곧바로 분쇄된다.

이른 아침 두 번째 행선을 했을 때 잘 집중되지 않았다. 마음은 청정한 상태가 되었지만 발의 움직임에 마음이 잘 집중되지 않았다. 더구나 비틀거렸다. 집중이 덜 됐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이럴 때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암송하는 것이다.

암송의 효과는 이미 알고 있다. 여러 차례 검증한 바 있다. 암송하고 나면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몸과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몸과 마음이 다른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행선이 잘 되지 않을 때 암송한다.

행선할 때 암송의 힘을 빌리면 효과적이다. 암송으로 형성된 집중을 고스란히 행선으로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띠의 확립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세로 알 수 있다.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꽤 긴 길이의 경이다. 게송이 25개나 된다. 빠알리 게송을 천천히 읊는다. 방을 왔다갔다하면서 나즈막히 소리내서 읊는다. 이를 이근원통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내는 소리를 자신이 듣고 신심을 내는 것이다.

빠다나경은 거의 매일 암송한다. 그러나 암송할 때마다 긴장된다. 늘 암송하는 것이라 다 외우고 있지만 갑자기 막힐 수가 있다. 그러나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는 비교적 잘 떠오른다. 이렇게 10여분 암송하고 나면 확실히 다른 상태가 된다. 이는 행선을 해보면 알 수 있다.

행선할 때 암송전과 암송후는 다르다. 암송전에는 발에 잘 집중되지 않아 비틀거렸으나 암송하고 난 다음 행선하면 비틀거림이 없다. 자세가 잡히는 것 같다. 마치 좌선할 때 사띠가 확립되어 집중되면 자연스럽게 허리가 펴져 곧바른 자세가 되는 것과 같다.

어제 오후 사무실에서 행선과 좌선을 했다.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10분도 버티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자극 받았기 때문이다. 관리비 고지서를 받고 흥분했기 때문이다.

사무실 난방비가 무려 50프로나 인상되었다. 터무니 없는 비용이 청구되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서 가스비용이 대폭 올랐다는 것이다. 이런 고지서를 보고서 마음이 심란해졌다.

사무실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검색해서 알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이곳만큼 싼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심란한 마음이 되었다. 그래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했다.

하루에 최소한 30분 이상 앉아 있기로 했다. 스스로 약속한 것이다. 의무적 좌선을 말한다. 먼저 행선부터 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격정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행선이 잘 되지 않았다.

발을 옮길 때마다 비틀거렸다. 그럼에도 앉아 있고자 했다. 혹시나 하며 행운을 바란 것이다. 그러나 혹시나는 "역시나"가 되었다. 번뇌가 가득한 상태에서 좌선은 잘 될리 없었다. 앉아 있으니 온갖 번뇌가 일어 났다. 결국 10분만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 아침 행선은 순조로웠다. 암송을 한 상태에서 행선은 확실히 효과 있었다. 비틀거리지도 않고 발이 방바닥에 "착착" 하며 달라 붙는 것 같았다. 이는 대상에 마음이 착착 달라 붙는 것과 같다.

사띠의 힘이 좋을수록 선명한 앎이 있을 것이다. 이때 어제 본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삼매의 힘이 좋을 때는 마음이 새기는 대상마다 파고 들어가듯이 생겨난다. 마음과 대상들이 '착착'하며 붙어 가듯이 생겨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91쪽)



여기서 삼매는 찰나삼매를 말한다. 정신과 물질의 현상에 집중하여 관찰했을 때 마음이 고요히 머무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찰나삼매에 대해서 대상에 착착 달라 붙는 것과 같다고 했다.

쌀자루를 바닥에 던지면 "착"하고 달라 붙는다. 날카로운 창을 부드러운 땅에 던지면 "착"하고 꼽힐 것이다. 끈적끈적한 진흙을 벽에 던지면 "찰싹"하며 붙어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는 마하시 사야도가 예를 들어서 설명한 것이다.

찰나삼매는 그 짧은 순간에, 손가락 튕기는 순간에라도 마음이 변화하는 대상에 찰싹 달라 붙는 것을 말한다. 이와같은 찰나삼매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물질-정신 대상들은 여러가지로 바뀌더라도 새기는 대상마다 마음이 찰나삼매로 잘 집중되고 고요히 머물게 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 191쪽)



수행을 왜 하는 것일까? 어떤 이는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수행을 하면 무탐, 무진, 무치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롭다. 이 맛에 수행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불자라면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수행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불교인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도 명상을 하는데 자아나 신을 만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의 명상은 수행을 해서 다른 상태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과 같다.

불교에서 수행하는 목적은 사향사과의 성자가 되고자 하는 것도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궁극적인 체험이 있어야 한다. 열반의 체험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아홉 가지 출세간법, 즉 사향사과와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자들은 그러한 찰나삼매를 통해 위빳사나의 지혜, 도와 과를 생겨나게 하여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91쪽)



수행을 하는 목적은 결국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삶이 괴롭기 때문이다. 즐거운 날도 있지만 괴로운 날이 더 많다. 나이가 들면 더 괴로워진다. 즐거운 것도 사실을 알고 보면 괴로운 것이다. 일체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세상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다. 더 이상 괴로운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수행한다. 사향사과와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한다. 수행을 해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때 부처님 가르침은 완성된다.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듦으로 인하여 가르침의 완성을 스스로 보여 주었다. 세상에 이런 자비가 어디 있을까? 바로 이런 것이 보살도이다. 누구나 수행을 해서 윤회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


지금 시각은 아침 8시 50분이다. 글을 엄지로 치기 시작한지 1시간 40분 되었다. 스탠드 불을 켜고 후기를 쓰고 있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 우려 하는 사람도 있다. 수행기를 인터넷에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드러내지 말라는 뜻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느낀 것을 쓰는 과정에서 정리가 된다. 수행한 시간 보다 쓰는 시간이 훨씬 많은데 쓰는 것도 일종의 수행인 것이다.

행선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가져갈 것에 대한 것이다. 세상의 지식은 모두 다 가져갈 수 없다. 그러나 지혜는 가져갈 수 있다. 지식은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인 것이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고 언어로만 아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몸으로 아는 것이다.

나중에 저승갈 때 무엇을 가져가야 할까? 행위만 가져 간다. 몸으로 언어로 정신으로 지은 행위이다. 이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몸으로 지은 것이다. 몸으로 체험한 것을 말한다. 선정 체험만한 것이 있을까? 선정으로 지혜를 얻었다면 든든한 노자돈이 있는 것과 다름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A9.20)라고.




2023-01-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