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명칭붙여 12단계 행선을 했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22. 13:19

명칭붙여 12단계 행선을 했는데

 


설날 새벽이다. 사위는 고요하다. 시간을 보니 새벽 5시이다. 참 좋은 시간이다. 이런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순 없다. 에스엔스를 하거나 유튜브를 본다면 시간을 뻬앗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오지 않는 귀중한 시간이다. 일어섰다. 편안한 자세에서 엄지치기를 할 수 있으나 행선 후에 하기로 했다. 수행은 생활화 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게 되면 축적된다. 어느 순간 트일지 모른다.

행선을 할 때는 왼발, 오른발한다.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설 때는 서고 나아갈 때는 나간다. 단계를 늘려 볼 수 있다. 왼발, 오른발의 2단계 행선도 있고, 한발에 집중해서 올림, 나감, 내림의 3단계 행선을 할 수도 있다. 3단계를 세분하면 6단계 행선이 된다.

이제까지 6단계 행선을 했었다.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명칭이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늘 뒷북치는 것이 된다. 방법을 달리하기로 했다.

며칠전 중곡동에 있는 김도이 선생 빌라를 방문 했다. 미얀마에서 수행했던 수행도반 김기성 선생과 이학종 선생도 있었다. 김도이 선생과 네명이서 법담을 나누는 중에 행선 이야기가 있었다. 김도이 선생은 12단계 행선을 한다고 했다.

12단계 행선은 어떤 것일까? 김도이 선생에 따르면 의도, 듦, 나감, 내림의 네 단계에 대해서 각 단계마다 세 번 명칭 붙인다고 했다. 그래서 "의도 의도 의도, 듦 듦 듦, 나감 나감 나감, 내림 내림 내림"한다고 했다. 이것이 양곤에 있는 마하시 선원에서 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오늘 새벽 김도이 선생 방식대로 해보기로 했다. 너댓보 밖에 되지 않는 좁은 방에서 12단계 행선을 실시했다. 발을 움직이기 전에 의도가 먼저 일어나는데 "의도, 의도, 의도"라고 한 것이다. 물론 명칭붙이기가 실제 의도와 일치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명칭 붙이기를 하면 집중하는데 상당히 효과가 있다. 순간집중을 말한다. 다른 말로 찰나삼매, 카니까 사마디라고 말한다.

발을 올려서 이동해서 내리는 과정에서 각 단계마다 세 번 명칭 붙인다. 발을 들 때는 "듦, 듦, 듦"이라고 명칭 붙인다. 발을 들어서 밀 때에는 "나감, 나감, 나감"이라며 명칭 붙인다. 발을 내려 디딜 때는 "내림, 내림, 내림"이라고 명칭 붙인다.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의도와는 달리 발의 움직임 세 단계는 알아차릴 수 있다. 마치 슬로우 모션 비디오를 보듯이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김도이 선생 방식 12단계 행선을 해보았다.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단순히 발을 떼고,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6단계 보다 더 집중이 잘 되었다. 그 결과 행선이 지루하지 않았다. 자세도 바로 잡혔다. 행선에 집중이 되지 않으면 비틀거리는데 비틀거림도 없었다. 한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행선을 하면 발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갖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그런데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떠오른 생각은 착하고 건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경전에서 봤던 것도 떠오르고 수행지침서에서 봤던 것도 떠오른다. 이는 읽을 때 새겼기 때문이다.

꼭 기억해두고 싶은 구절은 다시 한번 본다. 형광 메모리 칠한 부위를 다시 보는 것이다. 행선이나 좌선 중에 떠오른다면 내것이 된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본 것도  그런 것중의 하나이다.

위빠사나 지혜는 단계적으로 성취된다. 1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행선을 함으로써 파악된다. 의도는 정신이고 사대로 파악되는 몸은 물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온이 오로지 정신-물질 작용에 대한 것임을 알게 되면 이 몸과 마음이 내것이라고 여기는 유신견이 사라진다. 나라고 여기는 것은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 여자, 남자, 사람, 중생은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일 뿐이지 실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위빠사나 지혜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가 생겨나면 유신견이 부서진다.

위빠사나 2단계 지혜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행선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확인 된다. 발을 들려는 의도는 원인에 대한 것이고 발을 드는 것은 결과에 대한 것이다. 이런 행위에 배후가 있을 수 없다. 업과 업의 과보만 있을 뿐이다. 숙명론적인 것도 아니고, 신의 뜻도 아니고, 우연론 적인 것도 아니다. 오로지 원인과 결과에 따른 업과 업의 과보만 있을 뿐이다. 이를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라고 하는데 위빠사나 2단계 지혜에 해당된다.

행선으로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가 파악된다. 이 두 단계 지혜만 생겨나도 악처는 면한다고 한다. 다만 다음생 한번 뿐이다. 영원히 악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 한다.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1단계와 2단계 지혜만 있어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말한다. 이를 '쭐라 소따빤나'라고 하는데 이는 '작은 수다원'이라는 뜻이다.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 이후는 무엇일까? 보통 생멸의 지혜와 무너짐의 지혜로 알고 있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그 사이에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삼법인과 관련된 무상, 고, 무아는 열반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체득되는 것으로 알았는데 위빠사나 지혜 2단계 이후에 배치해 놓은 것이다. 이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그보다 더 무르익게 되면 항상하지 않다고, 괴로움일 뿐이라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고 바르게 안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98쪽)

 


위빠사나 2단계 지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무르익었을 때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지혜가 생겨남을 말한다. 마치 팔정도에서 정견을 보는 것 같다.

팔정도는 계, 정, 혜 삼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순서를 보면 혜학, 계학, 정학 순으로 되어 있다. 정견이 바로 서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십정도가 되면 혜, 계, 정, 혜가 된다. 이때 앞의 혜는 예비적 혜라고 볼 수 있고, 뒤의 혜는 완성된 혜라고 볼 수 있다.

위빠사나 지혜 16단계에서 무상, 고, 무아가 2단계 지혜 다음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십정도에서 앞의 혜와 같은 성격이다. 무상, 고, 무아의 철견은 열반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빠사나 2단계 다음에 오는 무상, 고, 무아는 예비단계 또는 맛보기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의 지혜는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이다. 행선을 해서 위빠사나 2단계 지혜를 알았다고 해서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하기 힘들 것이다. 아직 생멸의 지혜와 무너짐의 지혜 단계까지 이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단계와 2단계 지혜만 알아도 큰 수확이 된다.

오늘 새벽 행선을 하다가 집중이 잘 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연기적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연기법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행선을 통해서 1단계와 2단계 지혜에 대해서 숙고 했을 때 모든 것이 이해 되는 것 같았다. 생멸의 지혜도 연기법에 따른 것이고, 무너짐의 지혜에 연기법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무상, 고, 무아 역시 연기법의 범주안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이다. 지식은 머리로 아는 것이다. 책을 보거나 들어서 아는 것을 말한다. 이런 지식은 돌아 서면 잊어 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유튜브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새기지 않으면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지혜는 몸으로 아는 것이다.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의 지혜가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책을 통해서 아는 것은 지혜가 될 수 없을까?

책을 읽어서 공감했다면 나의 것이 된다. 경전을 읽어서 교리를 이해 했다면 내 것이 된다. 경전의 문구를 새겨서 읽었을 때 나중에 떠오른다면 확실히 내것이 된다. 그렇다고 이를 지혜로 볼 수 없다.

경전문구가 지혜로 되기 위해서는 나의 처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부처님의 고성제에 대해서 내가 처한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림 없음을 알게 된다면 삶의 지혜가 된다. 몸으로 겪지 않았어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지혜가 된다. 그러나 무상, 고, 무아의 지혜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삼법인의 지혜를 알려면 연기법을 이해 해야 한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연기법은 누구나 아는 사실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단지 피상적으로 알 뿐이다. 조건 발생적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연기법은 인(hetu), 연(paccaya), 과(phala)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선을 하면서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를 생각했다. 또한 생멸의 지혜와 무너짐에 대한 지혜도 생각했다. 그때 퍼뜩 "위빠사나 16단계 지혜는 연기법에 대한 지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무상, 고, 무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되자 행선에 집중이 되었다. 갑자기 사띠가 확립된 것 같았다. 김도이 선생 방식대로 12단계 행선을 하면서 명칭을 붙였다.

나의 위빠사나 지혜는 언제나 무르익을까? 김도이 선생 방식 12단계 행선, 명칭 붙이기 행선을 해야 겠다.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지혜가 생겨날 것이다.

2023-01-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