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사나운 꿈을 꾸었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27. 07:45

사나운 꿈을 꾸었을 때



지금 시각 5시 19분이다. 행선을 마치고 스마트폰을 본 것이다. 새벽에는 일부러 시계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일어났을 때 몇 시인지 모른다.

꿈이 사나울 때가 있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갈증이 나기도 한다. 새벽 1시 반부터 비몽사몽간이 되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다. 이대로 아침을 맞으면 녹초가 될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전환을 해야 한다. 몸과 마음의 상태를 바꾸어 주어야 한다. 행선보다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더 좋은 것은 암송하는 것이다.

암송에 따른 집중의 효과를 알고 있다. 이는 암송전과 암송후가 확실히 다르기 때문이다. 암송을 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확실히 다른 상태가 된다. 집중이 된 것이다. 이 집중을 행선에 이용하면 사띠가 강화된다.

행선을 할 때는 천천히 한다. 좁은 방에서 4-5보 가량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의도를 볼 수 있고 행위를 볼 수 있다. 동작 하나하나 알아차릴 수 있다.

새벽 행선은 거저먹기나 다름 없다. 새벽시간은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업무시간과 대조된다. 일을 하다가 행선을 하면 5분 앉아 있기도 힘들다. 전화를 받았는데 품질사고에 대한 것이라면 마음은 온통 거기에 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행선이나 좌선을 한다면 5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행선은 천천히 한다. 마치 허리 아픈 환자처럼 하라고 했다. 한발 내딛는 것은 슬로우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이렇게 천천히 해야 법을 볼 수 있다. 어떤 법인가? 구경법이다. 빠라맛타담마라고도 한다. 의도도 법이고 알아차리는 것도 법이다. 마치 시간을 잘게 쪼개서 보는 것과 같다.

시간을 쪼갤 수 있을까? 1초를 쪼개면 몇 개가 될까? 1초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손가락 튕기는 시간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 집중을 하면 1초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오실로스코프를 보는 것 같다.

오실로스코프는 개발자에게 친숙한 계측기이다. 보통 스코프라고 말한다. 주파수를 보기 위한 계측기이다. 시간을 분할하면 고주파를 볼 수 있다. 주파수와 시간은 반비례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사인파나 구형파(사각파)를 보기 위한 것이다.

오실로스코프는 1초를 여러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시간을 나누면 나눌수록 잘 보인다. 최종적으로 사인파가 드러난다. 행선이나 좌선하는 것도 시간을 쪼개서 보기 위함이다. 미세한 것을 보는 것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구경법을 보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수행에 대하여 계측기 비유를 드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마치 불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교를 현대물리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양자론을 불교와 접목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회에 대하여 어떻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요즘 과학의 시대이다. 사람들은 과학적 잣대를 윤회에도 들이밀고자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윤회는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은 것이라고 하여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과학적 탐구를 예를 들어 윤회를 배척한다. 윤회가 있다면 현실의 삶에서만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고락윤회를 말한다.

과학적 잣대를 불교에 적용하면 불교는 설 자리가 없다. 초기경전에 있는 신화적 이야기나 초월적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 된다. 그러나 과학적 잣대는 치명적 문제가 있다. 그것은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과학은 관찰할 수 있는 도구가 없으면 성립될 수 없다. 양자론도 도구로 관찰된 것이다. 우주를 관측하는 것도 도구의 힘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도구로 관찰되는 과학으로 윤회를 부정한다면 이는 방법이 잘못된 것이다.

과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없다. 도구를 사용하는 과학으로 종교를 재단할 수 없다. 윤회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다.

물질을 관찰하는 과학과 정신을 관찰하는 종교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마음 관찰하는데 있어서 도구는 필요치 않는다. 마음을 집중해서 삼매에 들면 법이 관찰된다. 구경법을 말한다. 이런 구경법을 도구를 이용해서 관찰할 수 있을까?

물질영역과 정신영역은 다르다. 물질영역은 계측기와 도구로 관찰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신영역은 마음을 집중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행선이나 좌선은 정신영역을 관찰하는 도구가 된다.

수행은 다른 상태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집중을 필요로 한다. 집중을 하기 위한 여러 기법이 있다. 암송을 하는 것도 집중이고, 행선을 하는 것도 집중이고, 좌선을 하는 것도 집중이다.

집중된 상태에서는 법을 볼 수 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음을 말한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법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다. 이를 구경법이라고 한다. 고유한 특성과 일반적 특성을 갖는 구경법을 말한다.

행선을 하면 의도와 행위를 볼 수 있다.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은 의도라는 구경법을 보는 것이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 부드럽거나 딱딱한 감촉이 감지됐다면 느낌이라는 구경법을 보게 된다. 이런 구경법은 각자 고유한 특성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행선을 하면 구경법이 관찰된다. 구경법은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탐욕도 구경법이고 성냄도 구경법인데 역시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라 여겨 꽉 움켜 쥐고 있다.

느낌도 구경법이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가 된다. 갈애는 집착의 조건이 된다. 집착의 끝은 어디일까? 절망이다. 이는 십이연기의 연결고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시각은 6시 26분이다. 이제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 사나운 꿈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깨어 있는 것이 낫다. 더 좋은 것은 행선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 상태를 바꾸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수행이다. 수행은 다른 상태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암송과 행선을 함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 상태가 다른 상태로 변했다. 사나운 꿈에서 깨지 않고 계속 누워 있었다면 녹초가 되었을 것 같다. 이렇게 수행은 사람의 상태를 바꾸어 준다.



2023-01-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