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나마루빠를 이름-형태가 아닌 정신-물질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담마다사 이병욱 2023. 2. 1. 08:59

나마루빠를 이름-형태가 아닌 정신-물질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읽고 또 읽는다.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진리의 말씀리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내것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현재 읽고 있는 책이다. 분홍색 칠로 책이 벌겋다. 다시 칠하면 면칠이 된다. 또 다시 읽으면 이번에는 연필로 밑줄친다. 그 다음에는 이렇게 글로 표현하고자 한다.

흔히 깨달음을 말한다. 깨닫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말한다. 마치 로또 당첨되는 것처럼 깨달음 한방에 목숨거는 것 같다. 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깨달음 순간이 있다. 초전법륜경에서 청정한 삶을 이루었을 때 깨달음의 완성이라고 했다. 청정에 이르는 길이 깨달음의 길이다. 그래서 청정도라고 한다. 청정도론에서는 칠청정을 말한다.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오염된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도 있다. 또한 어떠한 상태로 되는 의미도 있다. 이때 수행을 필요로 한다. 어떤 수행인가?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지침서이다. 미얀마 마하시사야도가 지은 것이다. 읽어 보니 청정도론 못지 않다. 청정도론이 수행에 대한 일종의 개괄서라면 위빳사나 수행방법은 심화된 것이다. 그러나 두 수행지침서의 방향은 하나이다. 궁극적 목적인 열반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수행방법이 있다. 강물이 바다에서 만나듯이 갖가지 수행은 결국 열반의 바다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가장 빠르게 이르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단계적 지혜가 생겨 최단기간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첫번째 단계는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실재를 관찰하는 것이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것이다. 이는 언어적 형성에 따른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두 가지 현상이 있다. 하나는 빤냣띠이고 또 하나는 빠라맛타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실상을 보지 못한다. 언어적 형성에 따른 개념으로 사물을 본다. 이름과 형태로 보는 것이다. 빤냣띠로 보는 것이다.

산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산이라는 형태가 떠오른다. 이름과 형태로 보는 것이다. 그 사람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 형태가 떠오른다.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개념으로 보면 진리를 볼 수 없다. 개념을 부수어야 진리를 볼 수 있다.

사물을 보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개념을 배제하고 보는 것이다. 이를 실재를 본다고 말한다. 어떤 실재인가? 궁극적 실재, 빠라맛타를 보는 것이다.

과학에서는 궁극을 탐구한다. 정신세계에서도 궁극을 탐구한다. 과학에서는 도구를 이용해서 궁극을 탐구한다. 정신세계에서는 명상을 통해 궁극을 탐구한다.

세상에 태어나 세상에서 살다가 세상에서 죽는다.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세계에 대해서 자신이 만든 세계라고 했다. 이를 육처의 세계라고 한다. 눈, 귀, 코, 혀, 몸, 정신이 대상이 접촉했을 때 세계가 생겨난다고 했다. 나는 세상의 창조주인 것이다.

나의 행위가 일어날 때마다 세상은 창조된다. 그리고 파괴된다. 순간순간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그런데 사라짐은 괴롭다는 것이다. 창조한 세계가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지만 조건이 다하면 파괴된다. 그래서 괴롭다.

내가 창조한 이 세계는 이 몸과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몸과 마음을 떠나서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없다. 이를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계라고 한다.

불교의 세계관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있어서 세계가 있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세계도 없다. 내가 눈을 감으면 우주가 파괴된다. 매번 매순간 세계는 생성됐다가 파괴된다. 이를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고 한다. 이를 줄여서 정신-물질이라고 한다.

정신-물질을 나마루빠(nama-rupa)라고 한다. 나마루빠를 정신-물질로 파악하면 궁극적 실재를 볼 수 있다. 진리를 볼 수 있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나마루빠를 이름-형태로 파악하면 진리에 이를 수 없다. 개념화 되었기 때문에 마치 꿈속에 사는 것과 같고 가상현실에 사는 것과 같다.

흔히 꿈깨라고 말한다. 깨달음을 꿈깨는 것으로 말한다. 이는 언어적 형성에 따른 개념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과 같다. 어떻게 보는가? 이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궁극적 실재를 보는 것이다.

궁극적 실재는 별다른 것이 아니다. 지금 보고 있는 대상이 궁극적 실재이다. 듣고 있는 것도 궁극적 실재이다. 탐내고 성내는 것도 궁극적 실재이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도 궁극적 실재이다. 즐겁거나 괴로운 것을 느끼는 것도 궁극적 실재이다. 그런데 궁국 실재는 생겨났다가 곧바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궁극적 실재의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궁극적 실재는 각자 고유한 특성이 있지만 생멸을 특징으로 한다. 탐욕도 궁극적 실재라고 했다. 탐욕이 일어 났을 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가 일어나서 집착이 된다. 탐욕은 사라져 없어졌음에도 집착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실상이 아니다. 언어적 개념에 대한 것이다. 이를 빤냣띠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개념으로 살아간다. 이는 실상을 보지 못함을 말한다. 궁극적 실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에서 살다가 세상에서 죽는다고 생각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이 시대의 최고 수행지침서로 본다. 니까야와 청정도론을 근거로 한다.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계청정과 마음청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지혜청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몸과 마음을 내것으로 여기는 한 지혜청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위빠사나 1단계 지혜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나마루빠를 이름-형태로 보지 않고 정신-물질로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십이연기분석경에서 나마루빠에 대해서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고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고 한다."(S12.2)라고 정의해 놓은 것에서 알 수 있다.

수행자는 경전에 근거해서 말해야 한다. 나마루빠에 대해서 이름-형태로 본다면 경전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왜 그런가? 개념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개념은 생멸이 없어서 진리를 볼 수 없다.

나마루빠를 정신-물질로 봐야 진리를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생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 실재, 빠라맛타담마는 생멸이 있어서 진리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방법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위빳사나가 끝이 나면 도와 과에 이른다. 그 도와 과에 이른 성자들에게는 관찰대상인 물질-정신 형성들이 완전히 소멸하여 고요해진 열반만 드러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248쪽)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단지 언어적 형성을 부수는 것만이 깨달음은 아니다. 신체적 형성도 부수어야 하고 정신적 형성도 부수어야 한다.


두 번째 선정에서는 사유와 숙고라는 언어적 형성이 부서진다. 네 번째 선정에서는 호흡이라는 신체적 형성이 부서진다. 아홉 번째 선정에서는 지각(想)과 느낌(受)이라는 정신적 형성이 부서진다. 이는 선정수행단계를 말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선정없이 찰나삼매로도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생멸의 지혜, 무너짐의 지혜는 찰나삼매 등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위빠사나 지혜가 높아질수록 선정의 단계에 대응되는 찰나삼매가 뒤따른다고 했다. 최종적으로는 물질과 정신이 사라지는 것이다.

흔히 깨달음을 말할 때 언어적 개념을 부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에서 위빠사나 1단계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될 것이다. 또한 이것은 견해청정에 해당된다. 그런데 언어적 개념을 부수는 단계는 깨달음에 있어서 시작단계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이다.

깨달음은 언어적 형성에 따른 개념만 부수는 것이 아니다. 신체적 형성에 따른 호흡도 멈추어야 하고, 정신적 형성에 따른 지각과 느낌도 멈추어야 한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성자들에게는 관찰대상인 물질-정신 형성들이 완전히 소멸하여 고요해진 열반만 드러난다.”라고 한 것이다.


2023-02-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