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어떻게 해야 사과 맛을 볼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2. 15. 16:33

어떻게 해야 사과 맛을 볼 수 있을까?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언젠가 BTN에서 간화선 세미나를 봤다. 인터넷 BTN사이트에서 본 것이다. 그때 어떤 스님은 사과는 먹어 봐야 맛을 안다고 했다. 자전거는 타 봐야 하고 수영은 헤엄쳐 봐야 안다고 했다. 백날 이론으로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깨달음은 이론으로 알 수 없다. 실제로 체험해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도 똑같은 얘기가 있다는 것이다.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비유하자면 사과를 아직 먹어 보지 않은 이가 다른 이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 사과의 맛을 알수는 없다. 스스로 먹어 보았을 때 직접 경험하여 '다른 이가 말한 사과의 맛이 이런 성품이구나'라고 사실대로 아는 것과 같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266)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사과의 비유를 들고 있다. 직접 먹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품이라는 말이 나온다. 성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품을 아는 것이 사과를 맛보는 것과 같은 의미임을 말한다. 성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성품은 빠라맛타담마를 말한다. 주석서에서는 57가지 법들을 말한다. 57가지 법은 실재하기 때문에 삿찌깟타(진실의)라고 하고, 직접 드러나기 때문에 빠라맛타(수승의)라고 한다. 어떤 법일까? 이는 다름아닌 5, 12, 18, 22근을 말한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관찰될 수 있는 것이다.

57
법은 관찰될 수 있는 법이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볼 수 있는 근본법이다. 근본법 또는 구경법은 크게 마음, 마음부수, 물질, 열반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마음과 열반은 하나씩 있다. 나머지는 물질과 마음부수에 대한 것이다. 이를 명색(나마루빠)이라고 한다. 결국 위빠사나 수행은 명색을 관찰하는 것이 된다.

실재하는 것이 있다면 실재하지 않는 것도 있다. 실재하는 것을 빠라맛타라고 하고, 실재하지 않는 것을 빤냣띠라고 한다. 빠라맛타는 명색을 관찰하면 볼 수 있다. 그러나 빤냣띠는 실재하지 않는 개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관찰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실재하는 것을 보기 힘들다. 대부분 비실재하는 것을 본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개념화 된 것을 보는 것이다. 여자나 남자처럼 명칭된 것을 보는 것이다. 개념화 된 것을 보면 실상을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명칭은 생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실재의, 빤냣띠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실재의, 빠라맛타담마가 존재하는 것이다. 왜 빠라맛타담마가 존재할까? 법이 생멸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빠라맛타담마는 생멸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이 법의 성품이다. 생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건적으로 발생함을 뜻한다. 그래서 짧게 머문다. 찰나에 생겼다가 찰나에 멸하는 것이다. 이런 법의 성품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은 법의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관찰할 수 있는 법은 47개의 법이다. 이 법들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관찰된다. 눈으로 사과를 보았을 때 사과는 대상이 되는 법이고, 눈은 감성물질로서의 법이고,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눈의 의식도 법인 것이다. 대상을 보았을 때 법 아닌 것이 없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법 아닌 것이 없다.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났을 때 법들이 일어난다. 조건에 따라 생겨난 법들은 생멸한다. 그것도 빠르게 생멸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와 같은 생멸하는 근본법의 성품을 관찰하는 것이다. 법이 무상, , 무아의 성품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를 사과를 직접 먹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사과는 먹어야 맛을 알 수 있다. 자전거는 타봐야 하고 수영은 해 보아야 알 수 있다. 이론으로 아는 것은 빤냣띠, 개념으로 아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명색을 관찰하는 것은 사과를 직접 먹어 보는 것과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대상을 빤냣띠(개념)로 본다. 하나의 예를 들 수 있다. 대보름날에 깡통불을 돌리면 원형으로 보인다. 이때 둥근 불빛을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둥근 불빛은 없다. 있다면 여러단계의 불빛만 있을 뿐이다. 실재하지 않는 둥근 불빛은 빤냣띠(개념)이고, 실재하는 여러 단계의 불빛은 빠라맛타(구경법)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 수 있다. 그것은 명칭에 대한 것이다. 여자라는 명칭을 모르는 사람은 글과 뜻을 분리해서 익힌다. 그러나 여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즉각 알게 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판단하는 과정이 있다. 마치 둥근 불빛에 여러 단계가 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과정을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개념으로 보면 실상을 볼 수 없다. 여자(또는 남자)를 본다고 했을 때 이는 개념으로 본 것이다. 더 자세히 관찰하면 오온을 보는 것이다. 여자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실재의이다.

비실재의는 개념이기 때문에 생멸이 없다. 생멸이 없기 때문에 개념 지어진 것, 명칭 지어진 것이다. 비실재의의 개념은 생멸이 없어서 법의 성품을 볼 수 없다.

법의 성품을 보려면 오온을 관찰해야 한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법의 성품을 관찰하는 것이다. 5, 12, 18, 22근과 같은 빠라맛타담마(구경법)를 관찰하는 것이다.

구경법은 생멸하기 때문에 법의 성품을 관찰할 수 있다. 법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왜 하는가? 이는 대념처경에 잘 설명되어 있다. 경에서는 신, , , 법 사념처에서 공통적으로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D22.4)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탐욕이나 성냄도 빠라맛타담마(구경법)이다. 마음부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자 또는 남자를 보았을 때 탐욕이 일어 났다면 구경법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구경법은 찰나생찰나멸한다고 했다.

탐욕은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곧바로 사라진다. 그럼에도 대상에 계속 끄달려 간다면 집착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개념에 집착하는 것이다. 개념은 생멸이 없고 비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탐욕에 따른 집착은 망상이 되기 쉽다. 실재하지도 않는 것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대상에 집착하면 어떻게 될까? 연기가 회전되어서 괴로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고 했다. 집착의 종착지는 절망인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BTN에서 선사는 사과의 비유를 들었다. 직접 맛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대신심, 대분심 등을 일으키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면 모든 것이 명쾌하다. 실재의와 비실재의로 설명했다. 즉 빠라맛타담마(구경법)와 빤냣띠(개념)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법의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5, 12, 18, 22근이라는 57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찰나생찰나멸하는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경법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기 때문에 집착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사과 맛 아닐까?


2023-02-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