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욕망 하자는 대로 하다 보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3. 2. 3. 08:18

욕망 하자는 대로 하다 보면

 


욕망 하자는 대로 하다 보면 망하기 쉽다. 배고프다고 아무것이나 허겁지겁 먹었을 때 대가는 크다. 새김을 잃고 먹었을 때 반드시 고통을 초래한다.

새벽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떤 것이 원인인지 알고 있다. 어제 점심 때 순대국밥 먹은 것이 탈 난 것이다. 맛집이라 하여 줄 서서 먹는 곳인데 허겁지겁 먹었기 때문이다.

 


밖에 추위에 줄 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자리를 비워 주어야 했다. 누긋하게 여유있게 천천히 먹을 수 없었다. 잘 씹지도 않고 급하게 넣었다. 양도 많았다. 고기도 많고 국물도 풍부했다.

먹을 때는 좋았다. 포만감에 행복했다. TV 먹방채널에서 국밥먹는 것처럼 게걸스럽게 먹었다. 이렇게 한번은 영양보충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급작스럽에 평소 양보다 훨씬 더 많이 먹었을 때 위에 부담이 왔다. 화장실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새벽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속에서 전쟁을 하듯 부글거렸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약을 먹어야 한다. 속이 불편할 때 먹는 약이 있다. 서산 보광당 한약방에서 만든 십년환이다. 십년환을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새벽 빈 속에 작용을 잘 할 것이라고 기대 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갔다.

기분전환을 해야 한다. 속이 불편하다고 거기에 마음을 두면 괴롭다. 좁은 방에서 행선을 했다. 발에 마음을 두었다. 좀더 집중하기 위해서 암송을 했다. 기억을 되살려 마음 속으로 읊었다. 8개월 가량 하던 것이기 때문에 기억이 잘 올라 왔다. 기억나지 않은 단어는 패스한다.

화장실을 다녀 왔다. 행선과 암송을 하자 속은 어느 정도 진정 되었다. 그리고 강한 후회의 감정이 밀려 왔다. "나는 음식절제에 실패했다."라고. "나는 음식에 적당량을 몰랐다."라고. 마치 십년공부가 무너진 것 같았다. 아마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일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원인을 추적해 보니 그것은 욕망이었다. 음식을 욕망으로 먹은 것이었다. 음식을 탐욕으로 먹었을 때 반드시 대가를 치룬다. 이는 삶의 과정에서 무수하게 겪는다. 수행을 좀 한다는 지금도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경계에 접하자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나는 언제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오늘은 금식하기로 했다. 아침은 먹지 않는 것이다. 점심은 소박하게 먹기로 했다. 된장국을 진하게 해서 소식하는 것이다. 장에 탈 났을 때 나에게는 된장국이 즉효약이다. 중앙시장에서 달래와 같은 야채를 사서 넣고자 한다.

사람이 병이 나면 괴롭다. 지옥고를 겪는 것 같다. 지옥에서 고통은 어떠할까?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무간지옥이라고 한다. 지옥에서는  너무 괴로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옥에 가보지 않았다. 그러나 잘 알고 있다. 왜 그런가?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무간지옥에도 갔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적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수행도 할 수 없다. 당연히 사띠도 되지 않는다.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때 김동수 열사 추모제 때 5.18 국립묘지에 있었다. 그때 치통이 있었다. 치통이 주기적으로 엄습해 왔지만 수행의 힘으로 극복해 보고자 했다. 이번 기회에 수행점검도 해보고자 했다. 치통이 오는 순간 알아차리고자 한 것이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치통만큼은 힘든 것 같다. 그때 토요일 오후였다. 치과에 가기는 늦었다. 일요일을 보내고 월요일 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 일요일에 지옥의 고통을 맛 본 것이다. 5.18 기념 현장에서도 치통은 극심했다. 아무리 맛 있는 음식도 치통 앞에서는 그림의 떡이 되었다.

치통은 치과에서 깨끗하게 해결 되었다. 잇몸치료 한번으로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치과가 없는 옛날이라면 어땠을까? 아마 무간지옥의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치과를 가장 신뢰한다.

문득 욕망이 엄습할 때가 있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된다. 욕망은 악마와 같은 것이다. 욕망을 욕망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악마의 영역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

이 문구를 글에서 수없이 인용했다. 감각적 욕망의 재난에 대한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다가 그 순간에 죽었을 때 악처에 태어남을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을 다시 해석하게 되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산다.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이 괴로움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감각을 추구한 대가는 괴로움으로 귀결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오늘도 내일도 감각적 욕망으로, 감각을 즐기며 사는 것이다.

요즘 유튜브에서 이혼소송 전문변호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대부분 상대방의 외도로 인해서 소송이 제기된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서 패가망신하는 것이다.

먹을 때는 좋았다. 고기가 듬뿍 들어 있는 순대국밥을 두 그릇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김을 잃고 허겁지겁 먹었을 때 결과는 속쓰림이라는 괴로움으로 나타났다. 만일 이 순간에 최후를 맞이했다면 어떻게 될까? 후회와 괴로운 느낌이라는 불선법들 때문에 악처에 나게 될 것이다.

아직 멀었다. 마음공부, 불교공부를 한다면서 경전을 읽고, 글을 쓰고, 암송을 하고,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새김을 잃었을 때 욕망 한방에 무너졌다.

“우리가 그대 때문에 아수라가 되고
그대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존재가 되는 것이니.
언젠가 축생의 존재가 되고
아귀의 존재가 되는 것도 오로지 그대 때문이다.”(Thag.1134)

마음을 제어하지 못했을 때 괴로움이 따른다. 지옥이나 축생은 다음 세상에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아 있는 현실에서 맛볼 수 있다. 새김을 잃었을 때, 가르침을 잃었을 때 짐승이 되고 지옥에 있게 된다.

“벗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세속적인 일에서 호감을 찾고, 세속적인 일에서 기쁨을 찾고, 세속적인 일에서 즐거움에 몰두하고, 잡담에서 호감을 찾고, 잡담에서 기쁨을 찾고, 잡담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잠에서 호감을 찾고, 잠에서 기쁨을 찾고, 잠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모임에서 호감을 찾고, 모임에서 기쁨을 찾고, 모임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교제에서 호감을 찾고, 교제에서 기쁨을 찾고, 교제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희론에서 호감을 찾고, 희론에서 기쁨을 찾고, 희론의 즐거움에 몰두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살면 임종에 이를 때 후회하는 그러한 삶을 삽니다.” (A6.15)

2023-02-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