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SR이 종교성을 배제한 이유는?
고요한 새벽이다. 새벽에는 마음이 맑아서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특히 담마에 대한 것이다. 어제 읽었던 경전 문구나 주석서 문구가 선명하다. 이런 것도 사띠라고 할 수 있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은 지혜에 해당된다. 경전을 봤을 때 새기고자 했던 것이 떠 올랐을 때 내것이 된 것이다. 이를 이해 차원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현실에서 적용해서 틀림없음을 확인 했다면 몸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분노의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스트레스를 폭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다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명상을 하는 것이다. 호흡을 지켜 보는 것이다.
마음이 집중되지 않은 상태에서 호흡을 보면 망상이 되기 쉽다. 이럴 때는 예비단계의 명상을 해야 한다. 경전 문구를 떠 올리는 것이다. 경전이나 주석서에서 봤던 인상적 문구를 떠 올리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행선이나 좌선하기 전에 암송하는 것이다.
암송의 효과는 알고 있다. 혼란된 마음을 돌리는데 암송만한 것이 없다. 경을 하나 외워서 필요할 때 암송하는 것이다. 혼란했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암송으로 집중된 마음을 행선이나 경행으로 가져오면 암송은 예비수행이 된다.
요즘은 타종교인들도 명상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명상은 불교의 전유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타종교인의 명상과 불교의 명상은 다르다. 결정적 차이는 관찰에 있다. 타종교인의 명상은 대상에 몰입하는 것이지만 불교의 명상은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른바 위빠사나 명상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무아사상이다. 무아의 가르침은 오로지 불교에만 있다. 타종교는 모두 유아사상이라고 보면 된다. 만약 타종교에서 무아를 말한다면 바로 그것은 불교가 된다. 그래서 무아사상은 불교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방법으로도 사용된다.
타종교의 명상은 사마타이고 불교의 명상은 위빠사나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의 명상을 단지 대상에 집중하는 사마타 명상으로 한정하면 더 이상 불교가 아니다. 불교를 불교이게끔 하는 것이 위빠사나 명상이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제3자적 시각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내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연기의 흐름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연기의 흐름에 나는 없다. 몸과 마음이 내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타종교인은 몸과 마음을 내것으로 안다. 일반사람도 몸과 마음을 내것으로 본다. 감정에 충실하는 것도 내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몸과 마음을 내것으로 보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보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내것으로 보지 않아야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런 수행은 없었다. 오로지 불교에만 있는 위대한 수행이다.
위빠사나와 유사한 수행도 있다. 미국에서 개발된 MBSR이 대표적이다. 이 수행방법은 스트레스 완화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데 있어서 위빠사나와 유사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유사 위빠사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
MBSR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지 않는다. 단지 대상을 지켜 보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 이상 깊게 파고 들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관찰하는 것에서 한발 더 들어간다.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 몸과 마음을 정신과 물질로 구분되는 것으로 보고 또한 원인과 결과로 본다. 더 나아가 몸과 마음이 생멸하는 것으로 본다. 이쯤 되면 위빠사나 명상은 MBSR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MBSR은 종교성을 배제한 수행방법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명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위빠사나에서 관찰이라는 테크닉만 도입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기법으로 활용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이건 아니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타종교인도 할 수 있는 것이 MBSR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 가면 타종교인도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009년 한국명상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했었는데 그때 수녀도 있었다. 수녀는 행선도 하고 좌선도 하고 법문도 들었다.
수녀는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아마도 수행기법만 배웠을 것이다. 만약 수녀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에 이르렀다면 수녀복을 벗었을지 모른다.
수녀는 위빠사나 테크닉만 배웠을 것이다. MBSR과 같은 것이다. 위빠사나 기법만 배워도 삶에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 했을 때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을“스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인이라면 정신-물질을 관찰하는 본질로 들어 갈 것이다.
정신-물질을 관찰하면 개념이 부수어진다. 사람, 남자, 여자, 중생이라는 말이 단지 명칭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인과의 지혜에 이르게 되면 자아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연스럽게 창조주도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된다. 왜 MBSR에서 불교적 색채를 지워버렸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요즘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이제까지 읽은 수행지침서 중에서 내용이 가장 심오하다. 한구절한구절이 금과옥조와도 같다. 새기고 또 새기며 읽는다. 그러다 보니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어제 읽은 것 중에 기억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닿을 때, 가고 있을 때, 서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굽힐 때, 펼 때, 생각할 때, 그 순간 생겨나고 있는 현재의 법들을 ‘물질과 정신, 무상-고-무아’라고 알고 보도록 관찰해야 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04쪽)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알아차리라는 말이다.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무상, 고, 무아로 아는 것이다. 이는 불교라는 종교의 영역이다. MBSR에서도 무상, 고, 무아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이상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불교적 색채를 지우고 관찰수행 테크닉만 가져 간 것이 MBSR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의 법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야 위빠사나 지혜에 이를 수 있다. 이는 단지 그 순간 만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과는 다르다. 실재하는 법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다. 그래서 대념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 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 있으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 있으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떤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분명히 안다.”(D22.5)
누구나 가고 서고 앉고 눕는다. 개나 고양이도 이렇게 할 것이다. 나도 가고 서고 앉고 눕는다. 그런데 부처님은 가고 서고 앉고 눕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핵심어는 ‘분명히 안다(pajānāti)’라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네 가지 행동양식을 말씀하셨다. 단순히 행주좌와를 말한 것이 아니다. 개나 고양이처럼 ‘우리가 걷는다’라는 앎이 아니다. 이런 앎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뭇삶의 망상을 끊지 못하고, 자아가 있다는 지각을 제어하지 못하고, 명상수행이나 새김의 확립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Smv.766)라고 했다.
부처님은 말씀하신 분명한 앎, 빠자나띠는 무엇을 말할까? 이는 걸어 갈 때 어떤 뭇삶의 감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감도 아니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주석에서는 “마음의 작용과 운동의 요소(風)의 침투에 의해서만 간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의도가 있어서 행위함을 말한다.
행선을 할 때 발을 이동한다. 이때 발을 들려는 의도가 있다.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의도가 있으면 발을 드는 움직임이 있다. 발을 들었을 때 이를 아는 마음이 있다. 이것 역시 위빠사나이다.
의도와 행위를 모두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이렇게 행주좌와를 알아차리면 행위자는 없고 행위만 있게 된다. 여기에 나를 움직이게 하는 배후가 없다. 단지 의도만 있을 뿐이다. 의도와 행위의 연속만 있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정신-물질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오온에서 조건발생하는 흐름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아에 대한 환상은 깨진다. 자연스럽게 창조주에 대한 환상도 깨진다. 이는 언어적 형성에 따라 개념지어진 번뇌에서 자유로움을 말한다. 그러나 타종교인은 이 단계에까지 이르지 않는다.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도 타종교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개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위빠사나 명상기법만 배워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찰수행 테크닉만 배울 뿐 그 이상은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정신-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이르고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에 이른다면 개종할지 모른다.
위빠사나 수행은 단순한 관찰수행이 아니다. 정신-물질을 관찰하는 분석적 수행이다. 생멸하는 실재를 관찰하면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기 때문에 번뇌에서 자유롭다. 또한 영혼이나 창조주와 같은 개념은 발붙이지 못하게 된다. MBSR이 불교라는 종교성을 배제한 이유에 해당된다.
“내일 살아 있을지,
죽을지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반조하고,
번뇌를 태워버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내일, 모레 등으로
시간을 미루지 말고,
오늘 바로 기다리지 말고,
멈추지 말고 실천하라.
맞다.
내일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들에게는
물-불-독-무기-질병 등으로
죽게 할 수 있는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왕이라 불리는
그 죽음이라는 법과
약속하는 것, 뇌물 주는 것,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양성하는 것 등으로
대항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일 죽을지
누가 알겠는가?”(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01쪽)
2023-02-2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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