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이나 사진을 접했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4. 10:46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이나 사진을 접했을 때
 

감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진다. 감정은 감각과 동의어이다. 공통적으로 느낌에 대한 것이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다.

느낌에 따라 번뇌가 일어난다. 흔히 108번뇌를 말한다. 108가지 번뇌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108가지 느낌에 대한 것이다. 6근과 6경이 만나면 6식이 생겨난다. 이른바 삼사화합이다. 삼사화합촉에 따라 느낌이 발생한다.

 
법수 별로 보는 느낌

상윳따니까야를 보면 느낌에 대하여 법수별로 소개 되어 있다. 차례로 나열하면 두 가지 느낌, 세 가지 느낌, 다섯 가지 느낌, 여섯 가지 느낌, 열여덟 가지 느낌, 삼십육 가지 느낌, 백팔 가지 느낌이 있다. 이를 상세히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두 가지의 느낌
육체적인 느낌, 정신적인 느낌
(Kāyikā, cetasikā)
 
 
2) 세 가지의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sukhā, dukkhā, adukkhamasukhā)
 
3) 다섯 가지의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만족한 느낌, 불만의 느낌, 평정한 느낌
(sukhindriya, dukkhindriya, somanassindriya, omanassindriya, upekkhindriya)
 
4) 여섯 가지의 느낌
시각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청각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후각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미각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촉각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정신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5) 열여덟 가지의 느낌
여섯 가지 만족을 경험하는 느낌,
여섯 가지 불만을 경험하는 느낌,
여섯 가지 평정을 경험하는 느낌
 
6) 서른여섯 가지의 느낌
여섯 가지 재가의 만족
여섯 가지 출가의 만족
여섯 가지 재가의 불만
여섯 가지 출가의 불만
여섯 가지 재가의 평정
여섯 가지 출가의 평정
 
7) 백여덟 가지의 느낌
서른여섯 가지 과거의 느낌
서른여섯 가지 현재의 느낌
서른여섯 가지 미래의 느낌
 
 
이상 일곱 그룹의 느낌은 상윳따니까야 ‘백여덟 가지에 대한 법문의 경’(S36.22)에 실려 있다.
 
백팔번뇌와 백팔느낌
 
흔히 백팔번뇌를 말한다. 백팔번뇌는 백팔느낌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백팔번뇌는 어떤 것일까?

대승불교에서는 백팔번뇌를 말한다. 먼저 36가지 번뇌가 있다. 이는 6근과 6경의 12처에다가 세 가지 느낌, 즉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곱하면 36가지 번뇌가 되다. 여기에 과거, 현재, 미래 세 가지를 곱하면 108번뇌가 된다. 그러나 초기불교 계산법은 이와 다르다.

 
초기불교에서 108번뇌는 없고 108느낌이 있다. 이는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한다.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백여덟 가지 느낌이란 무엇인가? 서른여섯 가지 과거의 느낌, 서른여섯 가지 현재의 느낌, 서른여섯 가지 미래의 느낌이다.”(S36.22)라고 했기 때문이다.
 
 
서른여섯 가지 느낌은 여섯 가지 재가의 만족, 여섯 가지 출가의 만족, 여섯 가지 재가의 불만, 여섯 가지 출가의 불만, 여섯 가지 재가의 평정, 여섯 가지 출가의 평정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서른 여섯 가지 느낌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느낌을 곱하면 108가지 느낌이 된다.
 
서른여섯 가지 느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맛지마니까야 ‘여섯 감역에 대한분석의 경’(M137)을 보면 여섯 가지 그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1) 여섯 가지 재가의 만족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들 가운데 원하는 것이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답고, 감각적 쾌락을 유발하고 탐욕을 야기하는 것이고 세속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획득된 것을 획득된 것으로 여기거나, 지나가고 사라지고 변해 버리기 이전에 획득된 것으로 회상할 때에 만족이 생겨난다. 이와 같은 쾌락이 있는데 이것을 재가의 생활에 기초한 만족이라고 부른다.”(M137)
 
2) 여섯 가지 출가의 만족
 
형상들이 무상하고 변화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형상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와 같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면 만족이 생겨난다. 이와 같은 만족이 있는데 이것을 출가의 생활에 기초한 만족이라고 부른다.” (M137)
 
3) 여섯 가지 재가의 불만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들 가운데 원하는 것이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답고, 감각적 쾌락을 유발하고 탐욕을 야기하는 것이고 세속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획득되지 못한 것을 획득되지 못한 것으로 여기거나, 지나가고 사라지고 변해 버리기 이전에 획득되지 못한 것으로 회상할 때에 불만이 생겨난다. 이와 같은 불만이 있는데 이것을 재가의 생활에 기초한 불만이라고 부른다.” (M137)
 
4) 여섯 가지 출가의 불만
 
형상들이 무상하고 변화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형상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와 같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고 ‘고귀한 님들이 성취한 세계가 있는데, 나는 그 세계를 언제 성취할 것인가?’라고 위없는 해탈을 갈망한다. 위없는 해탈을 갈망을 일으키면, 그 갈망을 조건으로 불만이 생겨난다. 이와 같은 불만이 있는데 이것을 출가의 생활에 기초한 불만이라고 부른다.” (M137)
 
5) 여섯 가지 재가의 평정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을 보고 형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영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재난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고 미혹한 사람들, 그 배우지 못한 일반 사람들에게 평정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평정은 그 형상을 뛰어넘지 못하므로 재가 생활에 기초한 평정이라고 부른다.” (M137)
 
6) 여섯 가지 출가의 평정
 
형상들이 무상하고 변화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형상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와 같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면 평정이 생겨난다. 이와 같은 평정이 있는데, 이것을 출가의 생활에 기초한 평정이라고 부른다.” (M137)
 
세간의 느낌과 출세간의 느낌
 
여섯 가지 그룹의 재가와 출가의 느낌은 공통적으로 육근과 육경에서 일어난다. 위 글에서는 시각에 대한 것이다. 청각 등 나머지 다섯 가지는 생략된 된 것이다. 그래서 재가의 만족 6가지, 출가의 만족 6가지, 재가의 불만 6가지, 출가의 불만 6가지, 재가의 평정 6가지, 출가의 평정 6가지를 합하면 36가지 느낌이 있게 된다.
 
재가와 출가의 느낌에 대한 만족, 불만족, 평정을 보면 세간적인과 출세간적인 것으로 나뉜다. 그런데 세간적인 것과 출세간적인 느낌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세간에서 만족은 감각을 즐기는 것을 말하고, 출세간에서 만족은 감각을 즐기는 것이 무상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반된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도 확인된다.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S35.136)
 
 
세간과 출세간에서는 느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일반사람들은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의 모든 것들을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부처님 제자들은 정반대로 그러한 것들이 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즐거운 것들은 오래지속되지 않아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에 대해서는 “모든 세상을 통해 보이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는 그와는 정반대가 되네.”(S35.136)라고 했다.
 
간화선에서 대분심은
 
출가자에게도 불만이 있다. 어떤 불만인가? 놀랍게도 “고귀한 님들이 성취한 세계가 있는데, 나는 그 세계를 언제 성취할 것인가?”라고 불만족 하는 것이다. 이런 불만을 보면 간화선 삼요체 중의 하나인 대분심(大憤心)을 연상케 한다.
 
대신심은 자신이 본래 부처인 것을 아는 것이다. 자신이 본래 부처라면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증명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부처인 것을 입증하지 못했을 때 분심이 일어날 것이다. 역대 조사 스님들이나 선사들이 그 길로 가서 자신이 부처인 것을 알았는데 자신은 아직까지 자신이 부처인 것을 보지 못했을 때 더욱더 용맹정진할 것이다.
 
간화선에서 대분심은 어쩌면 초기경전, 니까야에 근거한 것인지 모른다. 대분심의 모티브가 되는 구절이 니까야에 있기 때문이다. 그 구절은 “고귀한 님들이 성취한 세계가 있는데, 나는 그 세계를 언제 성취할 것인가?”라고 불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재가자의 평정과 출가자의 평정
 
평정도 평정나름이다. 재가의 평정과 출가의 평정은 다르다. 재가의 평정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조건만 바뀌면 언제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으로 바뀔지 모른다.
 
재가의 평정은 일시적인 평온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 평온이 깨질지 모른다. 반면에 출가의 평정은 깨지지 않는다. 이는 대상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출가자는 “형상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알기 때문에 동요하지 않는다.
 
느낌과 잠재성향
 
매순간 느낌이 일어난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마음은 탐욕이나 성냄으로 가기 쉽다. 즐거운 느낌이 발생하면 탐심이 되고, 괴로운 느낌이 발생하면 성냄이 되는 것이다.
 
느낌은 단지 느낌일 뿐이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가 된다. 갈애가 더욱 강화되면 집착이 된다. 집착단계가 되면 업을 짓게 된다. 그래서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 즐거운 느낌에 닿아 그것을 기뻐하고 환영하고 탐착하면, 탐욕에 대한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 그 괴로운 느낌에 닿아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비탄해하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미혹에 빠지면, 분노의 잠재적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M148)
 
 
탐욕과 성냄은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다. 느낌에 따라 탐욕이 되고 성냄이 된다. 그러나 느낌이 무상하고 변화하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지혜로 안다면 갈애와 집착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느낌을 알아차리면 잠재성향을 근절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적 경향을 없애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분노의 잠재적 경향을 제거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적 경향을 근절하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킨다면, 현세에서 괴로움의 종식을 성취하겠다는 것이 타당하다.”(M148)라고 했다.
 
느낌은 생멸법
 
느낌은 법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느낌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시각, 청각 등 여섯 감역에서 수시로 또는 동시다발적으로 발생된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발생되어서 연기가 회전하게 된다.
 
느낌의 종착지는 항상 괴로움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와 고성제 정형구를 보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고 했다.
 
느낌은 근본법이다. 근본법은 생멸법이다. 생멸하는 법은 실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느낌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느낌은 생멸법이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발생했다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느낌은 일어났다가 곧바로 사라진다. 그러나 여운은 남아 있다. 불선심을 자극하는 이름이나 사진을 보았을 때 불쾌가 발생한다. 발생한 것은 곧바로 소멸한다. 그런데 불쾌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느낌이 갈애로 전이 되었음을 말한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갈애의 강을 건너가면 집착으로 치닫게 된다. 이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성냄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분노의 마음이 극에 달했을 때 괴롭다.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이나 사진을 접했을 때
 
요즘 뉴스를 보지 않는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지 않는 것이 큰 이유이다. 무엇보다 선택적 보도를 하는 것이다. 수많은 뉴스 중에서도 기자의 입맛에 맞는 것만 보도 되고 되고 다른 것은 묻힌다. 수많은 뉴스가 있지만 데스크에서 걸러진 것만 보도 된다. 마치 검사가 선택적 수사를 하고 선택적 기소를 하는 것과 같다.
 
최근 도올 김용옥 선생이 분노했다. 현 정부가 정적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당 대표를 날리더니 이제 야당 대표를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적제거에 올인하다 보면 국민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주역을 근거로 해서 말했다. 민심을 자극하면 민중의 분노가 폭발해서 엎어 버릴 수 있음을 말한다. 올해 주역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때 에스엔에스에서 싫어하는 대상에 대한 이름이나 사진이나 글을 접하면 불쾌가 발생한다.
 
불쾌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름이나 사진을 접했을 때 불쾌가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고 분노로 전개되는 것은 이미 갈애의 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과 같이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방일하지 않고 성실하게 정진할 때에 괴로운 느낌이 생겨나면, 그는 이와 같이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것은 조건적이지 조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이 몸을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이 몸을 원인으로 생겨난 괴로운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것인가?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하면, 몸에 관한 그리고 느낌에 관한 분노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S36.71)
 
이 경은 부처님이 병실에서 설한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성냄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또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나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히 알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일 때는 “나에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느낌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떻게 분명히 아는가? “그것은 조건적이지 조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라고 아는 것이다. 조건발생하는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몸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이 몸을 원인으로 생겨난 괴로운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것인가?”라며 아는 것이다.
 
느낌은 조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몸도 조건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조건에 조건발생하여 느낌이 발생되었다. 발생된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발생했다가 소멸해 버린 느낌을 붙들고 있다면 집착하고 있는 것이 된다.
 
집착은 반드시 괴로움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은 괴로운 것이 된다. 그러나 현자들은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린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게, 갈애의 강을 건너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단지 “나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거나,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2023-03-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