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케세라세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12. 07:46

케세라세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지금 시각은 새벽 4 48분이다. 방금 좌선을 마쳤다. 새벽좌선은 거저먹기나 다름 없다. 별다른 노력이 없어도 집중이 잘 된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날그날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새벽 화장실 가는 소리에 깼다. 법정스님에 따르면 잠이 깼을 때 다시 잠을 자지 말라고 했다. 인생을 잠으로 보낼 수 없다. 노숙인들은 늘 잠자는 듯한 모습인데 잠 밖에 잘 것이 없다면 이번 생은 망한 것이 아닐까?

고요한 새벽이다. 어제 있었던 일이 떠 올랐다. 천국과 같은 것도 있었고 지옥과 같은 것도 있었다. 감정이 교차된다. 분노의 마음도 일어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빠다나경을 암송하기로 했다. 속으로 암송하기 보다 소리내서 하기로 했다. 자신이 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암송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금방금방 떠 오르기 때문이다. 25게송을 빠른 속도로 암송했다. 빠알리어지만 뜻을 새기며 암송했다. 부처님 승리에 대한 게송이다. 마구니, 마라의 군대를 쳐부순 통쾌한 게송이다. 자신 내면에 있는 욕망의 군대, 혐오의 군대 등 여덟 마라의 군대와 싸워 승리한 게송이다.

암송은 집중을 필요로 한다. 집중이 없으면 기억을 떠 오르게 할 수 없다. 암송을 하고 나면 집중도 남아 있다. 이 집중을 어떻게 해야 할까? 행선으로 가져 갈수도 있고 좌선으로 가져 갈수도 있다. 오늘 새벽에는 좌선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새벽시간은 본래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다. 머리가 맑아졌기 때문이다. 번뇌가 많으면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근심걱정이 있으면 좌선을 하기 힘들다. 근심걱정때문에 5분 앉아 있기도 어렵다. 그러나 새벽은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쉽게 집중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새벽좌선을 거저먹기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암송으로 형성된 집중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 집중에 집중이 되어서 더 깊은 집중이 될 것이다.

좌선을 해서 신비한 체험을 해보지 못했다. 다만 집중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집중이라 하여 반드시 호흡만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사유하는 것으로도 집중이 된다. 본래 집중된 상태에서, 즉 사띠가 된 상태에서 일어난 생각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다. 어제 지옥을 경험했다면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케세라세라, 좌선 중에 갑 이런 말이 떠올랐다. 이 말에 대해서 될대로 되어버려라!”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어를 분석하면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사건이나 사고가 나는 것이다.

니까야에 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과 우연의 피습(Opakkamikāni)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모든 것이 숙명론적 인과관계가 아님을 말한다. 사건이나 사고는 예기치 않게 발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사고가 날 수 있다. 아무리 방어운전을 한다고 해도 뒤에서 들이 받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불운한 것이다. 하필 그 시간에 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다. 운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일지 모른다. 수많은 죽음의 요인이 있는데 용케 살아 남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해서 안될 것이다. 집 밖으로 나가면 어떤 변을 당할지 모른다. 불운한 사건뿐만 아니라 우연의 피습도 있기 때문이다.

우연의 피습, 용어가 참으로 고상하다. 같은 말이라도 한자어를 사용하면 품위가 있고 고상해 보인다. 그래서 문자 쓴다고 말하는지 모른다. 영어를 쓰는 것도 문자 쓰는 것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다면 빠알리어를 쓴다면 어떻게 될까? 마음을 불편하게 할지 모른다.

우연한 피습은 오빡까미까니(Opakkamikāni)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직접적인 원인에 따른 우연의 피습이 있다. 부처님이 돌조각에 우연이 발을 다친 것이 예가 될 수 있다. 데바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할 목적으로 바위를 굴렸는데 그 때 돌조각 하나가 부처님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이처럼 예기치 않게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우연의 피습이라고 한다.

간접적 원인에 따른 우연의 피습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굶주림이나 목마름, 중독, 물림, 불타고, 익사하고, 살해되는 것은 제때에 업보에 따라 죽지 못한 것으로 본다. (Milp.302)”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인도를 걷다가 간판이 떨어져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 이를 전생에 지은 업의 성숙에 따른 업보로 볼 수 있을까? 불운이나 우연에 의한 것도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해야 합니다.(S36.21)”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흔히 사고가 났을 때 그만하길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경미한 사고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시간 지나면 해결되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죽을 정도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누군가는 업보의 성숙으로 볼지 모른다. 모든 것을 업보의 성숙으로 본다면 숙명론자가 될 것이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즉각적으로 받는 것은 아니다. 시차를 놓고 받는다. 이번 생에 받을 수도 있고 다음 생에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살다보면 반드시 업보의 성숙에 따른 과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여덟 가지 요인으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1)담즙(Pitta), 2)점액(Semha), 3)바람(Vāta), 4)체질(Sannipātikāni), 5)계절의 변화(Sannipātikāni), 6)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 7)우연한 피습(Opakkamikāni), 8)업보의 성숙(Kammavipākajāni)을 말한다.

삶은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 산속에서 홀로 산다면 안전할까? 맹수에 물려 죽을 수도 있고 독충에 물려 죽을 수도 있다. 세상에는 죽을 수 있는 요인은 너무 많다. 업보의 성숙에 따른 죽음은 여덟 가지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불운한 사건과 우연의 피습, 이 두 가지는 삶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다. 살아 가는 한 늘 상존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행운을 바라는 마음이 이해가 된다. 언젠가는 맞닥뜨릴지 모른다. 이런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은 팔고 중의 하나이다. 한자어로 원증회고(怨憎會苦)이다. 이 괴로움에 대한 니까야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사랑스럽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은 어떤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원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상들, 소리들, 냄새들, 맛들, 감촉들, 사실들이 있거나, 또는 불행을 원하는 자들, 불익을 원하는 자들, 불편을 원하는 자들, 불안을 원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과 만나고 교류하고 합류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사랑스럽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이라고 한다.”(D22.25)


원증회고는 접촉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과거 전생의 업보의 성숙에 따라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여섯 감역에서 접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담즙 등 여덟 가지 사건도 엄밀히 말하면 접촉에 따라 발생된 것이다. 당연히 불운한 사건이나 우연의 피습도 접촉에 따른 것이다. 업보의 성숙도 접촉에 따른 것이다.

세상은 접촉에 따라 발생한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았을 때 시각의식이 생겨나는데 이를 삼사화합이라고 한다. 세상은 삼사화합촉에 따라 발생한다. 접촉이 일어나면 대게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에 대한 것이다.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이 잠재되어 있고, 괴로운 느낌에는 성냄이 잠재되어 있다. 조건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교차한다. 업보의 성숙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리는 것이다.

흔히 자동차사고를 접촉사고라고 말한다. 대단히 탁월한 표현이다. 사실 삶의 과정에서 접촉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일까 십지연기는 접촉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S35.107)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삼사화합촉에서부터 연기가 회전된다. 그 끝은 어디일까? 괴로움이다. 그래서 접촉에 따른 세상의 발생은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로 끝난다. 접촉은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엄지치기 하다보니 6 36분이 되었다. 1시간 50분가량 쉼없이 엄지치기 했다. 이런 노력은 글의 완성으로 나타난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또 하나의 글이 추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 긴 글을 읽을 것이다. 시간낭비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다.

오늘도 무수히 접촉이 일어날 것이다. 무수히 우주가 생겨났다가 소멸할 것이다. 그냥 소멸하지 않는다. 반드시 업으로 남는다. 언젠가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 과보로 나타날 것이다. 업보의 성숙이다.

삶은 반드시 업보의 성숙에 지배 받지 않는다. 이는 부처님이 씨바까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여깁니다. 그러나 스스로 체험적으로 알았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고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되었다는 것도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S36.2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과거 업이 아니더라도 사고의 요인은 도처에 깔려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케세라세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오늘 인도를 걷다가 간판이 떨어져 즉사할 수 있다. 하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움직이는 동물이다. 또한 생각하는 인간이다. 한순간도 가만 있지 않는다. 이런 인간이 길을 걷다가 간판을 맞았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간판은 오래 걸어 두면 녹이 슬게 되어 있다. 언젠가 하고 떨어질지 모른다. 간판도 무상한 것이다. 그때 불운하게도 간판 밑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맞을 수 있다. 이는 불운한 사건이자 우연의 피습이다. 또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이다. 접촉에 따라 발생된 것이다.

모든 괴로움은 접촉에 따라 발생된다. 접촉이 없으면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섯 감역에서의 접촉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접촉에 따른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없을까?

삼사화합에 따라 접촉이 발생하면 필연적으로 느낌이 생겨난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과거행위에 대한 이숙때문에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는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는 것이다. 갈애가 집착이 되어서 업이 된다. 업이 성숙되면 업보를 받는다. 불운한 사건이나 우연의 피습이 접촉에 따라 발생된 것이긴 하지만 인과법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접촉에 따른 인과로 인하여 괴로움을 겪는데 즉각적인 업보를 받는다고 볼 수 있다. 그 괴로움은 항상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 즉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나타난다.

나도 무상하고 세상도 무상하다. 무상한 세상에서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다. 이런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서 일어났다고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느낌을 사띠하는 것 외에 달리 할 것이 없다.


2023-03-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