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동사형 명칭붙이기를 생활화하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25. 11:53

동사형 명칭붙이기를 생활화하면
 
 
차분한 토요일 아침이다. 글쓰기 좋은 시간이다. 이런 때는 인터넷을 보지 않는다. 책도 보지 않는다. 오로지 흰 여백만 대한다. 글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자판 치는 대로 쓰는 것이다.
 
책을 내기 위한 글을 쓰지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한 글을 쓰지 않는다. 어떤 목적이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글을 쓴다면 결혼을 전제로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다.
 
요즘 책을 만들고 있더. 통산 89권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책을 내기 위해서 글을 쓴 것은 아니다. 그날그날 의무적으로 매일 쓰다 보니 글이 축적되었고, 축적되다 보니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 책을 묶을 필요를 느꼈다.
 
글을 쓸 때는 먼 미래에 책이 될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 그러다 보니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쌓인 글이 금자탑을 이루었다. 오늘 쓰는 글도 미래에 책의 일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는데
 
요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이제까지 접한 위빠사나 수행지침서 중에서 최상의 지침서이다. 시중에는 수많은 수행지침서가 있는데 대부분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을 참고로 한 것 같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교학과 교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어야 한다. 교학과 교리를 모르고 접근하면 읽어 내기 힘들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읽었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물론 니까야도 읽어야 한다.
 
책을 읽을 때는 새기면서 읽는다. 그러다 보니 진도가 더디다. 하루에 한두 페이지가 고작이다. 그것도 밑줄치고 읽고, 형광메모리칠 하면서 읽는다. 읽고 나서 한번 더 읽어 본다.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숙고해 본다. 이렇게 글로 정리하면 최상이다.
 
실재와 비실재가 있다. 실재는 무엇이고 비실재는 무엇인가? 실재는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것이라고 했을 때, 이때 ‘것’은 담마를 말한다.
 
담마를 문맥에 따라 번역하면
 
흔히 말을 할 때 ‘이런 법이다’ 또는 ‘저런 법이다’라고 말한다. 이때 법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런 것이다’ 또는 ‘저런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법을 뜻하는 담마(dhamma)는 ‘것’으로도 번역될 수 있고 ‘것’으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담마를 때에 따라 ‘것’으로 번역한다. 이는 ‘법(法)’자를 붙여 주기에 곤란할 때 쓰는 것이라고 한다.
 
초기불전연구원의 경우 담마에 대하여 모두 ‘법’이라고 번역한다. 부처님이 담마라고 말씀하신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담마가 들어간 말은 모조리 법으로 번역되어 있다.
 
담마를 문맥에 따라 진리, 원리, 가르침, 법, 것 등으로 번역하면 유연하다. 이는 담마의 뜻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한국빠일리성전협회에서는 이렇게 번역했다. 그러나 담마에 대하여 오로지 하나 법으로만 번역했을 때 경직된다. 딱딱한 번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끝마다 ‘이런 법이다’ 또는 ‘저런 법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를 보려면 실재를 보아야
 
실재하는 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언어적 개념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눈으로 형상을 보았을 때 저것이 ‘사람이다’또는 ‘여자이다’ 또는 ‘남자이다’라고 본다면 개념으로 본 것이다.
 
개념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언어적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적으로 보았을 때 진리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진리를 보려면 실재를 보아야 한다. 어떤 실재를 말하는가? 궁극적 실재이다. 이를 빠라맛타담마라고 한다. 한역으로 구경법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82가지 구경법이 있다. 근본이 되는 법,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법이 82가지 있는 것이다. 이를 크게 물질, 마음부수, 열반, 마음으로 나눈다. 여기서 물질은 28가지고, 마음부수는 52가지이고, 열반은 하나이고, 마음도 하나이다.
 
왜 견해가 청정해야 하는가?
 
위빠사나 수행은 16단계로 구분된다. 단계가 높아질수록 수행의 깊이도 깊어진다. 궁극적으로 열반에 이른다. 이처럼 단계적으로 되어 있는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첫번째 단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이다.
 
구경법 82가지 중에서 물질과 정신에 관한 법이 가장 많다. 그래서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1단계는 먼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분석적 방법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변화 하는 대상에 순간집중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 1단계는 칠청정에서 세 번째 청정인 견해청정과 함께 한다. 나라는 존재가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나(我)라는 말은 단지 명칭에 지나지 않고 다섯 가지 다발, 즉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다발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실재가 된다. 이와 같은 비실재에 대하여 빤냣띠라고 한다. 한자어로 개념 또는 관념이라고 한다.
 
나라는 말은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이름도 명칭도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름이 그 사람이라 하지만 이는 서로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 사람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이 단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사람도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오온으로 보아야 한다.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온이었다. 부처님은 관심사를 우주로 확대하지 않았다. 또한 부처님의 관심사는 고와 고의 소멸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에서 부처님은  “나는 예나 지금이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가르친다.”(M22)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세상에 살다가 이 세상에서 죽는다. 이제까지 이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삼라만상과 산천초목이 있는 우주적 세상이 아니다. 이는 부처님이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S35.107)라며 삼사화합촉으로 설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내가 만들어낸 세상이다. 이는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S35.107)로 시작하여 연기가 회전되었을 때 부처님은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S35.107)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 눈으로 형상을 보았을 때 접촉이 일어난다. 접촉이 일어나면 시각의식이 일어난다. 이렇게 삼사화합촉으로 인하여 느낌이 발생되는데,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된다. 세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이 세상은 괴로움의 바다
 
부처님은 이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를 설명했다. 이 세상은 창조주가 있어서 창조한 세상이 아님을 말한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했을 때 접촉으로 인한 의식이 발생되는데 이를 세상의 발생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괴로움이 된다.
 
괴로운 느낌은 물론 즐거운 느낌도 괴로움으로 된다. 괴로움은 괴로움 그 자체로 괴로운 것이고, 즐거움은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이어서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의 발생에 대하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일어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이것이 괴로움의 생겨남이다.”(S35.106)라고 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괴로움의 바다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세상은 우주적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삼사화합촉에 따라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을 말한다. 좋거나 싫은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할 수밖에 없는데 그 끝은 항상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니까야에서 십이연기 정형구를 보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S35.107)라고 했다.
 
수행을 왜 하는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그렇다면 어떯게 해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첫번째 단계는 물질이 무엇인지 정신이 무엇인지 아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를 말한다.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는 내가 있다는 견해를 깨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위빠사나 1단계 지혜와 병행하는 것이 견해청정이다. 칠정에서 세 번째 청정을 말한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는 견해를 부수는 지혜에 해당된다. 이런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빤냣띠와 빠라맛타를 알아야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개념을 부수기 위한 방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동사형 명칭붙이기
 
위빠사나 수행은 관찰수행이다. 변화하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눈으로 형상을 볼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본다. 본다’라고 관찰하라고 했다. 들릴 때는 ‘들린다, 들린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흔히 한국에서 위빠사나를 지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있다. 볼 때는 ‘봄, 봄’하고, 들릴 때는 ‘들림, 들림’하라고 한다. 명사로 명칭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동사로 명칭을 붙인다.
 
미얀마에서 동사로 명칭을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보는 순간에 ‘본다’라고 새기면 법들을 새겨 아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 ‘눈, 감성물질, 형색 감각장소, 눈 의식, 접촉, 느낌’이라고 하는 이 다섯 가지 법을 새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59쪽)라고 설명되어서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대상을 볼 때 순간적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느낌으로 나타난다.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된다.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될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첫번째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느낌 단계에서 멈추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 방편으로 명칭붙이기가 이용된다. 볼 때는 ‘본다’라고 하고 들을 때는 ‘들린다’라고 하는 것이다.
 
볼 때 ‘본다’라고 하는 것은 동사형이다. 동사형을 쓰는 것은 ‘눈, 감성물질, 형색 감각장소, 눈 의식, 접촉, 느낌’이라는 여섯 단계를 보는 것을 말한다. 대상을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느낌까지 일어나는데 이때 ‘본다’라고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형상을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여섯 단계가 진행된다. 이 과정을 모두 볼 수 없다. 각 단계마다 의미와 명칭을 숙고하고 생각해서 관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볼 때마다 ‘본다, 본다’하며 일반적으로만 새겨야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60쪽)라고 했다.
 
진실한 개념과 생겨난 개념
 
형상을 보았을 때 ‘본다’라고 명칭을 붙여서 관찰한다. 이렇게 명칭 붙이면 여섯 단계, 즉 ‘눈, 감성물질, 형색 감각장소, 눈 의식, 접촉, 느낌’중에 분명히 드러나는 법 하나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수행 초기 단계에서는 명칭을 붙인다. 이런 명칭은 개념에 해당된다. 수행초기에는 보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개념으로 정신과 물질이 생겨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를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진실한 개념(vijjamāna paññatti)’과 ‘생겨난 개념(tajja paññatti)’이라고 했다.
 
진실한 개념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존재하는 빠라맛타 실제성품에 대한 명칭이다.”(381쪽)라고 했다. 궁극적 실재를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관찰을 통해서 가능하다. 형상을 관찰하여 ‘본다’라고 명칭붙여서 여섯 단계의 일어남 중에 하나를 보았을 때 실제 성품을 보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는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나의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나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과 정신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눈으로 형상을 볼 때 ‘본다, 본다’라고 관찰하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들린다, 들린다’라고 관찰한다. 이렇게 관찰할 때 없던 법이 생겨남을 알 수 있고, 생겨난 법이 소멸함을 알 수 있다. 이런 관찰은 진실한 것이다. 설령 명칭을 붙여서 ‘본다, 본다’로 관찰하지만 물질과 정신이 생겨나는 법을 보기 때문에 진실한 법이라고 말한다.
 
생겨난 개념이란 무엇인가?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눈에서부터 느낌까지 여섯 단계가 진행되는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된다.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이를 막으려면 알아 차려야 한다.
 
여섯 단계에서 가장 알아차리기 쉬운 단계는 아마 느낌일 것이다. 느낌을 알아차려서 단지 생멸하는 것임을 알았을 때 실재성품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한 고유성품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생멸법이 실재이고 고유인 것을 알게 하는 것에 대하여 ‘생겨난 개념’이라고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법의 성품을 아는 것이다. 법의 성품은 다름 아닌 생멸이다. 어떤 법이든지 생멸하지 않는 것이 없다. 눈으로 형상을 보았을 때 여섯 단계가 생멸한다. 가장 마지막 단계는 느낌이다. 이와 같은 법의 성품을 알기 위해서는 ‘본다, 본다’라며 명칭 붙이는 것이다.
 
명칭 붙이는 것은 개념으로 실재하는 성품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땅, 딱딱함, 거칢, 부드러움, 닿음, 들림, 감 등 갖가지 명칭이 있다. 이런 명칭은 고유성품을 알기 위해서 붙이는 것이다. 이를 ‘진실한 개념(vijjamāna paññatti)’과 ‘생겨난 개념(tajja paññatti)’이라고 했다.
 
명칭을 붙이면 어떤 이득이
 
흔히 독으로서 독을 제독한다고 말한다. 화두 드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화두를 들어 작은 의심으로 큰 의심을 타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명칭 붙이는 것도 똑 같은 원리라고 볼 수 있다.
 
명칭을 붙이면 법의 실재하는 성품을 알 수 있다. 이때 법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현상을 말한다. 주로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이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실재하는 법이 된다.
 
명칭을 붙이면 개념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눈으로 형상을 보아서 ‘본다, 본다’라고 명칭 붙였을 때 대상은 ‘눈, 감성물질, 형색 감각장소, 눈 의식, 접촉, 느낌’중의 하나가 된다. 이때 여섯 가지 대상은 개념에 해당된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이 성숙되기 전에는 [개념]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처음 수행을 할 때는 명칭을 통해 분명하게 구별하면서 새겨야만 빠르게 마음이 집중되어 실재 성품인 물질과 정신을 알 수 있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61쪽)
 
 
위빠사나 수행 초보 단계에서는 명칭을 붙인다. 행선 할 때는 발을 듦, 올림, 밈, 내림, 디딤, 누름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좌선할 때는 배의 부품, 꺼짐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일상에서는 ‘본다, 본다’라든가, ‘들린다, 들린다’라고 명칭 붙인다. 개념으로 법의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법의 고유성품과 일반성품
 
실재하는 법의 고유성품과 일반성품을 보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탐욕이라는 법은 거머쥐려는 고유성품이 있고, 생멸이라는 일반성품이 있다. 분노라는 법은 밀쳐 내려는 고유성품이 있고, 역시 생멸이라는 일반성품이 있다.
 
모든 법은 생멸법이다. 이 세상에 생멸법 아닌 것이 없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도 생멸법이다. 빠라맛타담마에는 각각 고유의 성품이 있지만 어느 법이든지 생멸을 벗어나지 못한다.
 
생멸법이 아닌 것을 무엇인가? 그것은 개념이라는 법이다. 명칭 같은 것이다. 사람, 남자, 여자, 사람이름, 창조주, 자동차 등과 같은 명칭이다. 이런 명칭법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생멸하지 않는다. 한번 개념 지어지면 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한 영원히 존재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생멸법을 보기 위한 것이다. 법이 생멸하는 것을 보았을 때 집착할 것이 없다. 집착 했다는 것은 이미 소멸해서 없어진 것을 붙들고 있는 것이 된다. 또는 그 법으로 인해서 발생된 망상을 붙들고 있는 것이 된다.
 
누군가의 사진을 보았을 때 좋거나 싫은 느낌이 발생한다. 내 돈을 떼 먹고 달아난 자라면 분노가 치밀 것이다. 이 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된다. 최종적으로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조건발생하는 법을 보면
 
위빠사나 수행 초기에는 명칭을 붙인다. 이는 보는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칭 붙이는 것은 물질과 정신이 앞뒤로 이어진 것을 끊기 위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위빠사나 1단계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관찰수행이다. 대상을 관찰하다 보면 끊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관찰하지 않으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 관찰하면 조건발생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연기는 조건발생이다. 조건발생인 것을 모르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일 것이다. 개념적으로 보는 것이다. 언어적 개념으로 되어 있는 명칭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 조건발생하여 소멸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소멸되기 전에 이전 것을 조건으로 해서 새로운 법이 발생한다. 그래서 조건발생과 소멸, 그리고 상속으로 인하여 연기가 회전된다.
 
동사형 명칭붙이기를 생활화하면
 
연기적 삶을 살면 괴롭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S35.107)로 끝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 현상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명칭을 붙여서 관찰한다.
 
개념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마치 독을 독으로 제독하듯이, 의심이라는 화두로 큰 의심을 타파하듯이, 명칭이라는 방편으로 법의 실재하는 성품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복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다음과 같이 반문해 보자. ‘빠라맛타인 고유성품법을 생겨난 개념을 통해 파악하는 것 아닌가?’라고 이와 같이 반문할 수 있다. 수행의 처음 부분에는 그렇게 파악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개념을 통해서 파악하더라도 수행이 진전되고 성숙되면 개념을 넘어서 제거해 버리고서는 마음이 빠라맛타인 고유성품에만 머문다.”(Pm.i.266,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61쪽)
 
 
이 주석은 부처님의 공덕 거듭새김(buddhanusati)에 나오는 구절이다. 불수념할 때 개념으로 하는 것임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위빠사나 수행 초기에는 명칭을 붙여서 관찰하는데 수행이 성숙되면 더 이상 명칭 붙이지 않음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는 1단계와 2단계이다. 특히 1단계에서는 명칭을 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는 힘이 강하면 명칭을 붙일 필요가 없다. 이에 대하여 “생멸의 지혜 등이 생겨날 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빠르게 물질과 정신들이 드러나기 때문에 명칭을 새기지 못하고, 생멸하고 있는 성품들을 단지 알기만 알 뿐으로 새기는 것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62쪽)라고 했다.
 
독은 독으로 제독할 수 있다. 화두를 들면 작은 의심으로 큰 의심을 타파할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관찰하는 힘이 약하면 명칭을 붙여야 한다. 동사형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일상에서 ‘본다, 본다’라든가, ‘들린다, 들린다’ 등으로 관찰하면 일시적으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독을 독으로 제독하듯이 동사형 명칭붙이기를 생활화하는 것이다.
 
 
2023-03-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