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봄비 내리는 아침에

담마다사 이병욱 2023. 4. 5. 10:45

봄비 내리는 아침에
 
 
비가 내린다. 어제 늦은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했는데 밤새도록 내렸나 보다. 굵은 비는 아니다. 가는 비로 맞을 만하다.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릴 수 있다. 오염된 공기로 인하여 오염물질이 침투할 수 있다. 작은 비라도 우산을 써야 한다.
 
요즘 날씨가 푸근해서 걸어서 일터에 간다. 이마트를 끼고 돌아서 비산사거리를 횡단한다. ‘꿈에 그린’ 아파트를 가로지르면 안양천이 나타난다. 안양에서 시작해서 안양천일까? 그런 것 같지 않다.
 
안양천은 저 멀리 수원 가까이 있는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중간에서 학의천 등 여러 하천과 결합된다. 안양천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남서부를 가로 질러 한강에 이른다. 서울에서도 안양천이라는 이름이 통용된다.
 
안양천에 생명의 기운이 가득
 
안양천에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황량한 듯한 느낌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바라보니 초록의 기운으로 충만하다. 나무에는 물이 잔뜩 올랐다. 새로운 잎파리가 튀어나올 것 같다. 이미 튀어 나오 것도 있다. 은행나무에 새잎이 나면 신록이 시작되는 것이다.
 
흔히 ‘계절무상’이라고 말한다. 낙엽이 질 때 실감한다. 작년 늦은 가을 은행나무 잎이 떨어졌을 때 그랬다. 글을 쓰면서 십여년 주욱 관찰한 바에 따르면 대게 11월 20일 전후해서 은행나무 잎이 진다. 다음 해 새싹이 날 때까지 나목의 상태로 있게 된다.
 
이제 은행나무에서 잎이 나기 시작 했으니 신록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신록인가! 작년 11월 말에 낙엽이 진 이후 5개월만이다. 5개월 동안 마음도 나목이 된 것 같았다. 마침내 새 잎이 나고 있으니 생명으로 충만한 계절이 되었다!
 
벚꽃나무에 꽃이 보이지 않는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흰 꽃을 볼 수 있었지만 어제 내린 비로 자취를 감추었다. 벚꽃은 일제히 피었다가 일제히 진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벚꽃에서 꽃이 진다고 하여 계절무상을 느끼지 않는다. 생명으로 충만한 계절에는 무상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벚꽃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릴레이 하듯이 필 꽃들이 대기하고 있다. 조만간 철쭉의 계절이 될 것 같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한다. 벚꽃은 화무오일백(花無五日白)이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오래 피는 꽃이 있다. 하천 양변에 있는 보라색의 야생화이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고 아무도 보지 않지만 이맘때가 되면 하천을 온통 보라색 세상으로 물들인다.
 

 
보라색 야생화에서 강한 생명력을 본다. 화려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고 희지도 않지만 보라색 야생화는 매력적이다. 이 꽃 이름은 무엇일까? 누군가 명칭을 붙였을 것이다. 검색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잡초에서 피는 꽃이 아름답다. 잡초도 꽃을 피우는 것이다.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꽃을 피운다. 그런데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잡초 같은 인생도 봄날은 있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시인들은 왜 마침표를 쓰지 않는 것일까?
 
안양천에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하다. 대지에서는 일제히 초록의 싹이 나고 나무에서도 초록의 잎이 난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는 봄비에 생명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다. 이런 때에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가 생각 났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 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봄비라는 제목의 시이다. 인터넷 검색해서 찾아 냈다. 이수복 시로서 1969년에 발표한 것이라고 한다.
 
봄비에서 가장 남는 구절은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라는 말이다. 시인은 왜 봄비 내리는 강나루 언덕에서 풀빛을 보며 서럽다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옛사랑과 관련 있는지 모른다. 이는 “처녀 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시를 보면 늘 드는 의문이 있다. 이는 “왜 시에서는 마침표가 없을까?”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페이스북 친구에게 물어 보았다.
 
페이스북에는 시인들이 많다. 시인에게 “시에는 왜 마침표가 없나요?”라고 물어 보았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답을 듣지 못했다. 아무리 해도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 마침표를 쓴다. 의문문에는 물음표를 단다. 문장은 마침표 등이 있어야 글이 성립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시인들의 시를 보면 한결같이 마침표가 없다.
 
시인들은 왜 마침표를 쓰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무척 궁금하다. 혼자 상상해 본다. 시어가 아마도 상징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시라는 것이 이미지를 나타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만 이렇게 상상하고 있는 것일까?
 
종종 시를 쓴다. 그렇다고 등단한 시인은 아니다. 언젠가 시인이 되고 싶어서 지역 문인협회에 알아 보았더니 거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상당한 진입 장벽이 있음을 느꼈다.
 
문인협회에 소속된 자들만이 시인은 아닐 것이다. 등단한 사람만이 시를 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 이야기하듯이 쓸 수도 있다. 그런데 시를 쓸 때는 반드시 마침표를 쓴다는 사실이다.
 
마침표를 쓰지 않아야 시라고 볼 수 있을까? 시인들은 왜 마침표를 쓰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누군가 속시원히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바닥을 때리는 비를 보고서
 
우산을 쓰고 안양천을 건넜다. 평소에는 징검다리를 건넌다. 그러나 어제 늦은 오후부터 내린 비로 인하여 건너갈 수 없다. 무지개 다리를 이용해서 건넜다.
 
비는 우산을 때린다. 길 바닥 웅덩이에는 파문이 인다.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빗방울이 물바닥을 때리는 것이다.
 
웅덩이의 파문을 쳐다 본다. 끊임없이 새로운 파문이 일어난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한다. 아마 0.5초 이내에 사라져 가는 것 같다.
 
바닥을 때리는 비를 보고서 부처님 가르침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무상에 대한 것이다. 웅덩이 이곳저것에 끊임없이 파문을 내는 것을 보면 역동성이 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루한지 모른다. 그런데 이처럼 빗물을 보고서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을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에 물거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데, 눈 있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실로 물거품의 실체일 수 있는가?”(S22.95)
 
 
이 가르침은 오온 중에서도 ‘느낌(vedhana)’에 대한 것이다. 느낌을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빗물의 비유를 든 것이다. 빗물이 바닥을 때렸을 때 포말을 그리며 곧바로 사라지는데 이에 대하여 ‘느낌에는 실체가 없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이 없다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 본다.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물을 보면 동그란 파문만 보인다. 파문이 일었다가 곧바로 사라진다. 계속 관찰하다 보면 사라지는 것만 보인다. 생겨나는 것에는 조건이 필요하지만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이 필요치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어떤 씨앗이 밭에 뿌려지면,
흙의 자양분을 조건으로
습기와 공급을 조건으로
이 한 쌍을 조건으로 성장하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과 인식의 세계
그리고 이들 감각영역들은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버린다.”(S5.9)
 
 
게송에서 핵심은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버린다.”(S5.9)라는 말이다. 이 말은 매우 유명하다. 사리뿟따 존자가 앗사지 존자의 경행하는 것에 감탄하여 얻어낸 게송이기 때문이다. 이 게송을 ‘연기법송’이라고 한다.
 
연기법송은 율장 대품에서 볼 수 있다. 앗사지 존자는 새내기 수행승으로서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송을 사리뿟따 존자에게 들려 주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 연기법송을 듣고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Vin.I.40)라는 법안이 생겨나서 수다원이 되었다.
 
사리뿟따 존자는 2주 동안 분석적인 관찰을 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어떤 것을 분석적으로 관찰했는가? 그것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한 것이다. 이는 게송에서 “존재의 다발과 인식의 세계 그리고 이들 감각영역들은”(S5.9)이라고 표기 되어 있다.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은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에서 조건발생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런데 생겨나는 것에는 반드시 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조건 없이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새싹이 나는 것에 대하여 “흙의 자양분을 조건으로 습기와 공급을 조건으로”(S5.9)라고 했다.
 
생겨난 것은 모두 조건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멸하는데도 조건을 필요로 할까? 게송을 보면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버린다.”(S5.9)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소멸하는 것은 원인을 조건으로 한다.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원인이 없으면 생겨날 것도 없고 사라질 것도 없다. 원인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따라야 생겨난다. 씨앗이라는 원인이 있어도 밭과 비료와 물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조건발생하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라질 때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 조띠까 사야도는 ‘마음의 지도’라는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서 “단지 사라질 뿐입니다.”(마음의 지도, 182쪽)라고 했다.
 
생겨나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사라지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사라질 뿐이다. 그냥 사라질 뿐이다. 이는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버린다.”(S5.9)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라짐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미 괴멸한 것은 남지 않고
미래의 축적도 없다.
현재 생겨나 존속하더라도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Vism.20.72)
 
 
우 조띠까 사야도에 따르면 이 게송은 매우 유명하다고 한다. 왜 그런가? 사라짐, 소멸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라짐에 대하여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Vism.20.72)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송곳 끝에 겨자씨가 있다. 얼마나 오래 버틸까? 머무는 순간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우 조띠까 사야도는 “바늘 끝에 겨자씨를 놓는 것처럼, 그것이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을까요? 즉시 떨어질 것입니다.”(마음의 지도, 182쪽)라고 했다.
 
원인도 무상하고 조건도 무상하니
 
오온을 관찰하다 보면 없던 것이 생겨난다. 이를 좀더 고상하게 한자어를 써서 말하면 이전에 없었던 법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법은 어떤 법인가?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몸의 물질이 생겨나는 것도 법이다. 느낌이 생겨나는 것도 법이고, 지각이 생겨나는 것도 법이고, 형성이 생겨나는 것도 법이고, 의식이 생겨나는 것도 법이다. 이 세상에 법 아닌 것이 없다.
 
부처님이 법이라고 했을 때, 즉 담마(dhamma)라고 했을 때 그 법은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지금 내가 빗방울이 바닥을 때리는 것을 보고 있을 때 빗방울이 포말을 내면서 곧바로 사라져 버렸을 때 법을 본다. 무상을 본다. 그렇다고 자연무상을 보는 것은 아니다.
 
계절이 바뀌면 계절무상을 느낀다. 노인이 되면 인생무상을 느낄 것이다. 이처럼 자연무상과 인생무상을 본다고 하여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자아에 기반한 무상을 느끼는 것으로는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깨닫기 위해서는 오온무상을 보아야 한다. 빗물이 바닥을 칠 때 포말을 그리며 사라지는 것은 무상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빗물이 무상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자연무상에 해당된다.
 
자연무상이나 인생무상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다. 빗물이 바닥을 때릴 때 조건없이 그냥 사라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을 보는 눈과 감성물질, 눈 의식, 접촉, 느낌이 무상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눈이라는 감각기관도 무상하고, 형상이라는 감각대상도 무상한 것이고, 이를 아는 마음도 무상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안팍으로 무상함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느낌은 무상한 것이다. 느낌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도 조건도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것에 의해 생겨나는 느낌이 어찌 무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S22.18)
 
 
오온 중에서 느낌에 대한 것이다. 물질, 지각, 형성, 의식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핵심은 원인도 조건도 무상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무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겨나는 것은 원인과 조건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소멸하는 것에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겨나게 하는 원인과 조건은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인도 무상하고 조건도 무상하니 결과도 무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겨나는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S56.11)라는 통찰이 일어나는 것이다.
 
단지 사라질 뿐
 
빗방울이 바닥을 때릴 때 동그란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내 곧바로 사라진다. 비가 내리는 데는 원인과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사라지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라짐에 대하여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버린다.”(S5.9)라든가,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Vism.20.72)라고 했다. 이는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에서 제 5단계 지혜와 같다. 이는 ‘무너짐을 관찰하는 지혜 (bhaga ñāa)’를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가 있다. 이는 1단계로 물질과 정신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2단계로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좀더 발전되면 위빠사나 제4단계 지혜인 ‘생멸의 지혜’에 이른다.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수행이 급진전 된다고 한다. 오온에 대해서 생멸을 보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단계의 지혜는 5단계‘무너짐의 지혜’이다. 이른바 소멸의 지혜를 말한다.
 
소멸의 지혜는 보는 것마다 사라지는 것을 본다고 한다. 마치 비 오는 날 빗방울이 바닥을 때릴 때 오로지 사라지는 것만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온에서 느낌을 관찰할 때 빗방을 떨어지는 것을 비유로 들었다. 우조띠까 사야도는 청정도론에서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Vism.20.72)라는 게송을 재구성하여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이
어디로 가거나 어디에 모이지 않는 것을 압니다.
단지 사라질 뿐입니다.
일어나기 전에 그것들은 어디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디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마음의 지도, 182쪽)라고.
 
 
2023-04-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