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가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유튜브를 보면 연예인에 대한 것이 있다. 최근 사망한 개그맨에 대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낚시성 제목에 현혹되어 들어가 본다. 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몰라도 되는 것이다.
머리맡에 디가나까야를 읽고 있다. 거의 다 읽어간다. 34경 중에서 33경 합송의 경을 읽고 있다. 법수별로 되어 있다. 네 번째 법수중에 사정근이 있다.
사정근은 교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악한 것은 쳐내고 선한 것은 증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를 네 가지 경우의 수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 사정근이다.
사정근은 알아야 할 것이다. 내용을 알면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다. 몰라도 되는 가십과 다른 것이다. 이처럼 알아야 할 것은 새겨두고자 한다.
모든 학문은 외우는 것에서부터
팔정도에서 사정근은 삼마위리야(Sammaviriya)라 하여 바른 정진, 정정진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네 가지 노력이라고도 하는데 제어, 버림, 수행, 수호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선법은 일어나지 않도록 제어하는 노력을 해야 하고, 이미 생겨난 불선법은 버리도록 노력해야 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법은 생겨나도록 수행해야 하고, 이미 생겨난 선법은 유지하고 계발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정근 정형구는 팔정도분석경(S45.8)에 상세히 실려 있다. 이와 같은 팔정도분석경을 빠알리어로 외운 바 있다. 마치 산수를 잘하려면 구구단을 외우는 것과 같고 수학을 잘하려면 미적분 공식을 외우는 것과 같다. 영어를 잘 하려면 단어와 문장을 외우는 것과 같다. 국어를 잘 하려면 고문을 외우는 것과 같다. 물리를 잘하려면 물리공식을 외우는 것과 같고 화학을 잘 하려면 화학공식을 외우는 것과 같다.
모든 학문은 외우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해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외워야 한다. 경을 외우는 것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불자들이라면 팔정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정견, 정사유 등 여덟 가지 용어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팔정도분석경에서는 세부적으로 알려 준다. 마치 용어에 대한 정의 같다. 정정진에 대하여 네 가지 노력, 즉 제어, 버림, 수행, 유지로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은 외워야 한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과 같은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은 이해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외워서 확실히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외워두면 경전을 열어보지 않고 머리속에서 곧바로 가져와서 쓸 수 있다.
역자주에서
디가니까야 합송의 경에서 사정근을 읽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각주에 있는 것이다. 한줄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페이지가 각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팔정도분석경에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여기에서 ‘역자주’라 하여 내용이 추가 되었다.
역자주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전재성 선생이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이다. 사정근에 대하여 팔정도분석경 플러스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어떤 것이 플러스 되어 있을까?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선법에 대해서는
사정근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제어의 노력(saṃvarappadhāna: 律儀勤)이다. 이와 같은 율의근 설명을 보면 마나씨까라, 여리작의가 추가되어 있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선법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 지혜로운 주의기울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이런 각주를 보지 못했다. 새기고 싶은 내용이다. 꼭 알아야 되는 것이다. 이것을 새기고 싶어 글을 쓴다. 제어의 노력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어의 노력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방지하는 노력을 말한다. 마음의 장애는 정신적 흐름 속에 지속되지만 감각적 체험의 유입을 통해서 활성화 된다. 감각적 체험은 감각적 자료, 즉 시각자료, 청각자료, 후각자료, 미각자료, 접촉자료로 구성된다. 이러한 감각자료들은 의식에 의존하는 감각과 만나게 된다. 이때 의식이 함께 수반하면서 감각자료는 지속되고 평가되고 적절한 반응을 일으킨다. 의식이 그러한 자료적 인상에 대하여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如理作意)을 기울이지 않으면 감각자료는 악하고 불건전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오염된다. 이러한 오염의 경향은 감각대상에 따라 규정된다. 매력적인 인상은 탐욕, 혐오적인 인상은 분노, 중성적인 대상은 어리석음을 수반하는 오염을 일으킨다. 따라서 이러한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감관을 다스려야 한다.”(KPTS본 디가니까야, 2585번 각주)
제어에 노력에 대한 것을 보면 키워드는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다. 이를 한자어로 여리작의(如理作意)라고 하고 빠알리어로는 마나씨까라(manasikāra)라고 한다.
대상에 대한 주의기울임이 없으면 대상에 빠져 버린다. 매혹적인 형상을 보면 탐욕이 생기고 혐오하는 대상을 보면 분노가 생겨남을 말한다. 그래서 율의근에서는 감각기관을 다스려야한다고 했다.
이미 생겨난 불선법에 대해서는
이미 생겨난 불선법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매혹적인 형상을 보아서 탐욕의 마음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버림의 노력(pahānappadhāna: 斷勤)으로 설명하고 있다. KPTS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버림의 노력은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버리는 것이다. 감관을 제어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장애들을 극복하였더라도 과거의 업(業)으로부터 유래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버림에 의한 노력’이다. 여기에는 다섯 가지 정신적 장애가 포함된다. 다섯 가지 장애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그 조건을 소멸시킴으로써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를 없애는 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대한 숙고를 통해 없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대한 사유마저 소멸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대치하는 것은 마치 능숙한 미장이나 그 도제가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 궁극적으로는 착하고 건전한 것들도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KPTS본 디가니까야, 2585번 각주)
단근에 대한 설명에서 키워드는 쐐기이다. 커다란 악의 쐐기를 작은 선의 쐐기로 쳐내서 제거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쐐기론은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M20)에서 발견된다.
간화선에서 화두를 들 때 의심을 한다. 이는 작은 의심으로 큰 의심을 깨기 위한 것이다. 마치 독을 독으로써 제독하는 것과 같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마치 숙련된 미쟁이나 그의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제거하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M20)라며 쐐기론을 말씀 하셨다.
단근은 쐐기론으로 설명되어 있다. 업에 의해서 생겨난 불선법은 선법으로 퇴치 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선법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작용만하는 마음이 되기 위함이다.
작용만 하는 마음은 업을 짓지 않는다. 불선법이든 불선법이든 업이 되지 않는다. 이는 늘 알아차림이 유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느낌에 따라 즐겁거나 괴로워도 단지 “그렇네”라고 할 뿐이다.
아직 생겨나지 선법에 대해서는
흔히 수행한다고 말한다. 몸을 닦는다는 말도 있지만 초기경전에서는 어떤 상태로 되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인 경지를 맛보았을 때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려면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그런데 열반 체험으로 끝나는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궁극적 경지는 맛보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번뇌가 있다. 그래서 수행을 해야 한다.
견도하여 수다원이 된자는 수행도를 닦아야 한다. 사다함과 아나함은 수행도에 해당된다.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시키는 단계를 말한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아라한이 된다. 수행의 완성이다. 가르침의 완성이다. 사정근에서는 수행의 노력(bhāvanāppadhāna: 修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수행의 노력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생겨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수행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지만 경전에서 특히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칠각지)를 들고 있다.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 탐구의 깨달음의 고리, 정진의 깨달음의 고리, 희열의 깨달음의 고리, 안온의 깨달음의 고리, 집중의 깨달음의 고리, 평정의 깨달음의 고리를 닦아야 한다.”(KPTS본 디가니까야, 2585번 각주)
수행은 어떤 상태로 되는 것이다. 범부에서 성자로 되는 것도 수행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단계가 있다.
위빠사나 수행에는 16단계가 있다. 범부에서 성자가 되는 단계를 말한다. 단계를 거칠 때마다 어떤 상태가 된다. 수행을 닦는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단계별로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뜻하는 빠알리와 바와나(bhāvanā)가 문자적으로 ‘존재(existence)’ 또는 ‘산출해 내는 것(producing)’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생겨난 선법에 대해서는
마지막으로 수호의 노력(anurakkhaṇāppadhāna: 守護勤)이 있다. 어떤 것일까?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호의 노력으로 이미 생겨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유지하고 계발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정신집중을 통해 나타나는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상기시키는 지각의 인상을 수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수호의 노력은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 벌레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고름이 가득 찬 시체에 대한 지각,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부푼 시체에 대한 지각 등을 수호하는데 있다. 이러한 존재의 궁극적인 괴로움, 즉 죽음에 수반되는 현실의 처참함을 자각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존재의 속박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에서 벗어나 해탈을 수호하는 데 있다.”(KPTS본 디가니까야, 2585번 각주)
수호근에서는 부정관을 들고 있다. 열 가지 부정관을 하면 불선법들을 수호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여인의 이빨을 보고서 아라한이 된 장로가 연상된다.
쩨띠야빱바따 산에서 살던 장로 마하 띳싸가 아누라다푸라로 탁발 하러 가던 중에 양가집 여인을 만났다. 여인은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고 난 다음에 친정으로 가기 위해 꽃단장을 하고 길을 나섰다.
여인은 장로를 보자 넋나간 마음으로 이빨을 보이며 크게 웃었다. 장로는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쳐다 보다가 이빨에 대한 부정을 지각했다.
그때 그녀의 남편이 뒤따라 왔다. 그는 장로를 보고서 “존자여, 어떤 여인을 보았습니까?”라며 물었다. 그러자 장로는 “여인이나 남자가 여기서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단지 해골의 다발이 이 큰 길을 지나갔다.”(Vism.1.55)라고 말했다.
마하 띳싸장로는 여인의 이빨을 보고서 이전의 지각을 떠올렸다. 장로는 32가지 신체의 형태에 대한 부정관에서 이빨만을 취했다. 이빨에서 취한 습득인상이 열가지 부정상 중에 ‘해골이 드러난 시체’의 대응인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장로는 평소에 “혐오스런 해골이 드러난 시체, 혐오스런 해골이 드러난 시체”라며 부정상을 닦았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장로 마하 띳싸가 이빨만을 바라보았는데, 부인이 전체적으로 시체의 해골더미로 현현한 것”(Vism.6.81)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장로는 여인의 이빨을 보고 부정상을 취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장로는 평소에 부정상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것이다.
수행자가 몰라도 되는 것들
수행자에게는 알아야 하는 것도 있지만 몰라도 되는 것이 있다. 수행자는 부처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그 분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경전을 보고 교학을 공부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수행자는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하지만 몰라도 되는 것들도 있다. 수행자는 세상 것들에 대해서 몰라도 된다. 세상 것들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일부로 체험해 볼 필요 없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어 보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나이가 어려서 동진출가한 스님들은 세상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고 한다. 세상에서 살지 않고 절에서만 살았다면 사춘기가 될 때 절에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설령 절에서 스님으로 살아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여전히 많은 스님도 있다고 한다.
영화 삼사라가 있다. 티벳스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님은 다섯 살 때 절에 맡겨졌다. 절에서 자란 스님은 청년이 되었을 때 깊은 선정 체험을 했다. 그러나 절에 온 어느 여인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젊은 스님은 은사스님에게 말했다. 젊은 스님은 “수행의 길에서 몰라도 되는 것도 있지만 알아야 될 것도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세상으로 들어 갔다. 절에서 보았던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았다. 스님에서 속인이 된 것이다.
스님은 세상을 알았다. 여인과 결혼하고 아이도 가졌다. 몰라도 되는 것을 안 것이다. 스님에게는 구도의 길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었는지 모른다.
스님은 재출가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인이 놔주지 않았다. 처자식을 버리고 다시 출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미 전생에서 겪을 것 다 겪어 보았기 때문에
수행자가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수행자는 세상 것들에 대하여 알지 않아도 된다. 몰라도 되는 것을 알려고 할 때 티벳스님처럼 죽도밥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수행자로 산 사람들은 이미 전생에 겪을 것 다 겪어 보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4)라고 했다.
전생에 겪을 것 다 겪어 보았다면 이제 해야 할 것은 수행뿐이다. 어떻게 수행을 해야 잘 하는 것일까? 가장 먼저 시각에 속지 말아야 한다.
시각에 속지 말아야
여기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름답다고 말한다. 수행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상을 지각해야 한다. 본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은 손가락 튕기는 짧은 시간에도 무상을 지각하면 커다란 과보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소리가 생멸하는 것을 말한다. 소리는 조건발생하여 조건이 다하면 사라진다. 그것도 금방 사라진다. 찰나생찰나멸이다.
보는 것에서 무상을 지각하기가 쉽지 않다. 저 바위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저 하늘 역시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이 있어 형상을 볼 때 대상은 항상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시각이 나를 속이는 것이다.
시각 역시 청각과 마찬가지로 찰나생찰나멸이다. 그럼에도 항상 있는 것처럼 갈애를 일으킨다면 이는 시각에 속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번개를 예로 들었다.
번개가 있으면 천둥이 친다.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감지할 수 있다. 특히 밤하늘에 번개가 치면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없던 것에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 시각을 이런 식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시각에 속기 쉽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다나에서 “쇠망치로 쳐서 튕겨나와 반짝이는 불꽃이 차츰 사라져가니, 행방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Ud.93)라고 했다. 이 게송은 해탈한 자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마치 쇠망치로 바위를 치면 불꽃이 튄다. 시각을 이런 식으로 보아야 한다. 마치
손가락 튕길 때 “딱”하고 나는 것처럼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시각에 속지 않는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 본래 없는 것인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번개불처럼 보아야 하고 쇠망치 불꽃처럼 보아야 한다. 이런 것을 알아야 한다. 경전을 보고 교학을 공부하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을 알기 위함이다.
“사실들이 생겨나더라도
그들의 괴멸은 예정되어 있고,
괴멸의 원리는 현존하니,
과거와는 섞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게 와서
괴멸한 뒤에 보이지 않게 된다.
허공의 섬광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진다.”(Vism.20.72)
알아야 할 것을 알고자
디가니까야 합송의 경을 보다가 사정근 각주를 보게 되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각주한 것을 보니 꼭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팔정도분석경에서 설명한 것 이상이다.
율의근에서는 여리작의를 곁들여 설명했고, 단근에서는 쐐기론으로 설명했다. 수근에서는 칠각지로 설명했고, 수호근에서는 열 가지 부정상으로 설명했다. 사정근에 대하여 이처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 각주는 보기 힘들다. 이런 각주는 알아야 한다. 알아야 할 것을 알고자 이렇게 긴 글을 쓴다.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님입니다.”(Stn.558)
2023-05-0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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